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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아 Nov 18. 2021

길을 걷는 일이란?

해파랑길 3코스 -  헤매고, 걷고, 지치고, 다시 걷고  

  팔월 첫날, 해파랑길 3코스를 걷는 날이다. 3코스는 부산 기장군 대변항에서 임랑해변까지 걷는 16.5km 길이다. 그날도 시작부터 길을 잃고 헤맸다. 출발지인 대변항에서 봉대산 입구를 찾다가 길을 잘못 들었다. 남편은 물을 사 들고 와 가게 주인이 산에 오르는 길은 이쪽이라고 했다며 가게 옆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기 시작했다. 주변에 이정표가 보이지 않아 찜찜했지만, 남편을 따라갔다.     


 골목길을 따라 한참 올라가던 남편이 전봇대를 가리켰다. 이정표 리본이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제대로 왔나 보다 생각하고 20분을 넘게 걸었는데도 봉대산 입구 이정표는 보이지 않았다. 도중에 안내판을 보니 우리가 걷는 길은 대변항에서 기장군청으로 이어지는 자전거 길이었다. 다시 대변항으로 돌아가 봉대산 입구를 찾으려면 한 시간 가까이 걸릴 것 같았다. 대변항에서 왜 좀 더 꼼꼼하게 주변을 살피며 이정표를 찾지 않았을까 후회가 밀려왔다.     

 

  남편은 대변항으로 돌아가 산길을 걷고 싶어 했지만, 난 발 상태가 안 좋아 그냥 자전거 길로 가자고 했다. 원래 걸으려던 코스를 놓쳐 아쉬운 마음으로 걷던 중 봉대산으로 올라가는 샛길을 만났다. 해파랑길 코스는 아니지만, 올라가면 어디쯤에선가 해파랑길 이정표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좁다란 산길은 바람이 통하지 않아선지 모기 소굴이었다. 모기 기피제를 뿌리고, 손수건으로 쫓아보았지만, 달려드는 모기떼의 공격을 피할 순 없었다. 푹푹 찌는 듯한 더위에 오르막에선 몇 발짝만 떼어도 숨이 턱턱 막혀왔다. 더위와 모기떼가 득실대는 산길을 오르는 건 죽을 만큼 힘들었다.    

  

봉대산에서 만난 해파랑길 이정표


  오르막길을 걷다가 정상을 280m 남겨둔 지점에서 왼쪽으로 내려가는 길을 만났다. 모기 소굴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으로 내려가는 길을 택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봉대산 정상에서 내려오는 해파랑길 이정표를 만났다. 한 시간 가까이 헤매다 만난 이정표가 반갑기 그지없었다. 이정표를 따라가는 길은 널따랗고, 바람이 불어와 시원했다. 귀찮게 따라붙던 모기떼도 없었다. 자그마한 저수지와 밭둑길을 지나 도로변을 따라 걷다 보니 첫 번째 기점인 기장군청이 나왔다. 나무 그늘에 앉아 쉬면서 맞는 바람이 달콤하고 시원했다. 길을 헤매느라 걸어야 할 거리보다 2km를 더 걸었지만, 해파랑길 코스인 봉대산 숲길을 일부라도 걸어 다행이었다.      


  기장군청에서 일광해수욕장까지는 계속 대로변 길이 이어졌다. 땡볕 아래서 대로변 길을 걷는 건 쉽지 않았다. 전날 잡힌 물집 때문에 발가락과 발바닥에서 불이 났다. 걷다 쉬기를 반복하며 4km를 걸어 일광해수욕장에 도착했다. 어디든 앉아 쉬어야 할 것 같아 해변 근처 식당에서 점심으로 물회와 복국을 먹으며 피로를 풀었다. 


일광해수욕장

  일광해수욕장에서 3코스 종착지인 임랑 해변까지는 10km가 더 남았다. 내 발 상태로는 얼마 못 가 금방 주저앉을 것 같았다. 발가락 물집의 고통을 꾹꾹 눌러가며 바닷길을 따라 걸었다. 참을 수 없을 만큼 고통이 극에 달했을 때 이동항 바닷가 정자를 만났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정자 밖과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정자 안은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잠시 쉬어가려던 정자에서 잠깐 잠이 들었다. 사람들 말소리에 잠이 깼다. 짧았지만 꿀잠이었다.      


  국도변 카페거리를 지나서 동백항까지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실컷 보며 걸었다. 전망 좋은 카페에서 흑맥주로 더위를 달래고, 바닷가를 향해 뻗은 소나무 데크 길도 걸었다. 드디어 동백항! 더위와 피로에 지쳐 택시를 기다리며 먹었던 아이스크림은 이제껏 먹어본 아이스크림 중 제일 시원하고 맛있었다.   

산토리니 포토존이 있던 카페


빨간 등대와 빨간 나무 이정표

  

  제주 올레길을 걸을 땐 아무리 힘들어도 그날 걷기로 계획한 코스를 도중에 멈춘 적은 없었다. 나이는 속일 수 없는지 해파랑길 3코스는 4.3km를 남겨두고 동백항에서 멈춰야 했다. ‘다 못 걸으면 어때? 다음 날 걷고, 또 다음 날 이어서 걸으면 되지.’ 몸이 알아서 ‘하루 한 코스 완주 욕심’을 버리게 했다.      


  다음 날은 전날 멈춘 3코스 동백항부터 걷기 시작했다. 하룻밤 쉬었다고 처음 한 동안은 가볍게 걸었지만, 금방 물집 잡힌 발가락에서 불이 나기 시작했다. 발가락 통증 때문에 신평소공원을 지나 칠암항을 지나는 동안 바닷가 마을도, 바다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빨리 목적지에 도착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우리가 걷는 길에는 땡볕만 쏟아져 내릴 뿐 항구에도, 주변 횟집 촌에도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멀리 임랑해변 오른쪽으로 고리원자력발전소가 눈에 들어왔다.   '

   

고리 원자력발전소가 보이는 바다
임랑해수욕장

  임랑해변까지 한 시간 남짓이면 올 수 있는 곳을 발가락 통증 때문에 거의 두 시간이나 걸려 도착했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3코스 종점에서 4코스 시작 스탬프를 찍는 것도 잊었다. 다행히 남편이 스탬프 상자를 발견해 찍을 수 있었다. 해파랑길 패스포트에 스탬프를 찍고 나니 뿌듯한 마음에 발걸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길을 걷는 몸은 상처 입고 아파하고 부서질 수 있는 본래적 한계로 되돌아가지만, 길을 걷는 일 그 자체는 마치 몸을 연장하는 도구처럼 세계로 열린다. 길을 걷는 일은 확장이고, 걷기 위해 만든 공간들은 걷는 일의 기념비들이며, 길을 걷는 일은 세계 속에 존재하면서 세계를 생산하는 일이다." (p36)   

                                                                                               -《걷기의 인문학》 레베카 솔닛 -      

  

   그 날 해파랑길 3코스를 걸은 사람은 남편과 나 둘뿐이었다. 아무도 걷지 않는 불볕 더위 속을 우린 왜 땀 뻘뻘 흘리며 걸었을까? 발가락은 물집투성이가 되고, 발목과 무릎이 꺾일 듯 아프면서도 왜 계속 걷는 걸까? 레베카 솔닛의 말처럼 길을 걷는 일 자체가 세계를  향한 열림이고, 길을 걸으며 만난 세계와 풍경에 대한 사유가 곧 또 다른 세계를 생산하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 해파랑길 3코스 : 대변항 – 봉대산 - 기장군청 – 일광해변 - 이동항 – 동백항 – 임랑해변

* 걸은 날 : 2021. 8. 1. (대변항~ 동백항), 2021. 8. 2. (동백항~ 임랑해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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