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고양이가 필요해

- 성숙한 사랑과 서로의 삶을 완성해주는 존재 -

by 혜아


사노 요코의 그림책 《100만 번 산 고양이》를 읽었다. 학교에 있을 때 아이들에게 자주 읽어주었던 책이다. 이 책을 읽어줄 때마다 마지막 장면에서 아이들은 눈물을 글썽였다. 백만 번이나 태어나고, 죽는 동안 한 번도 눈물 흘린 적 없는 고양이가 하얀 고양이를 만나 사랑하고, 하얀 고양이를 잃고는 백만 번이나 울다가 함께 떠나는 장면에서 아이들도 나도 울컥해지곤 했었다.


그림책 속 얼룩 고양이는 한때는 임금님의 고양이였다가 뱃사공, 서커스단 마술사, 도둑, 홀로 사는 할머니, 어린 여자아이의 고양이로 살다가 죽었다. 고양이는 주인들을 싫어했고,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다. 주인들은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고양이를 사랑하고, 죽게 하고, 죽음을 애도했다. 소통 없는 관계 속에서 고양이는 주인의 소유물로만 존재했다. 일방적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에서 고양이에게 삶과 죽음은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했다.

그림책 겉표지의 얼룩 고양이는 초록색 눈에 꼬리를 한껏 치켜세우고, 팔을 굽힌 채 주먹을 꼭 쥐고 있다. 마치 '난 이런 고양이라고!' 하며 으스대는 것 같다. 누구의 고양이도 아닌 도둑고양이로 태어나 자신만을 사랑할 때 모습이다. 백만 한 번째 자유롭고 멋진 도둑고양이로 태어났을 때 암고양이들은 얼룩 고양이의 신부가 되고 싶어 선물 공세를 펼쳤다. 하지만 자신만을 사랑하는 고양이는 “나는 백만 번이나 죽어 봤다고. 새삼스럽게 이런 게 다 뭐야!” 하며 까칠하고 도도하게 굴었다.


그때 파란 눈을 가진 새하얗고 예쁜 고양이만이 얼룩 고양이를 못 본 척했다. 은근 화가 난 고양이는 날마다 하얀 고양이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난 백만 번이나 죽어봤다고”, “너 아직 한 번도 죽어 보지 못했지?" 하며 약을 올리고, 공중돌기 하며 재주를 부리기도 했다. 하얀 고양이는 시큰둥하니 “그래.”하고 대꾸할 뿐 별다른 관심을 드러내지 않았다. 결국 얼룩 고양이는 “네 곁에 있어도 괜찮겠니?” 하고 하얀 고양이에게 물었다. 자기만 좋아하던 고양이가 드디어 다른 존재에게 마음을 열고 다가간 것이다.


얼룩 고양이는 늘 하얀 고양이 곁에 붙어 다녔다. 하얀 고양이는 새끼 고양이를 낳고, 얼룩 고양이는 자신보다 하얀 고양이와 새끼 고양이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더는 “난 백만 번이나…”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사랑을 모르던 고양이, 자신만을 사랑하던 고양이가 다른 존재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초록색 눈빛이 파란색으로 바뀌어 있다. 초록색은 치기, 젊음, 미성숙을 상징하기도 한다. 하늘의 색인 파랑은 이해와 신뢰, 지고한 사랑의 의미를 지닌다. 초록에서 파랑으로 바뀐 눈빛은 얼룩 고양이가 성숙한 사랑에 이르렀음을 말해준다.

“고양이는 처음으로 울었습니다. 밤이 되고, 아침이 되도록, 또 밤이 되고 아침이 되도록 고양이는 백만 번이나 울었습니다. 아침이 되고 또 밤이 되고, 어느 날 낮에 고양이는 울음을 그쳤습니다. 고양이는 하얀 고양이 곁에서 조용히 움직임을 멈췄습니다.”


어느 날 하얀 고양이가 움직임을 멈추었을 때 얼룩 고양이는 처음으로 울었다. 밤이 되고 아침이 되도록 백만 번이나 울고, 하얀 고양이 곁에서 조용히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두 번 다시 태어나지 않았다. 백만 번이나 죽는 동안 한 번도 운 적이 없는 고양이가 다른 고양이를 사랑하면서 울게 된 것이다. 얼룩 고양이가 하얀 고양이를 끌어안은 채 고개를 젖히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목 놓아 우는 장면에선 저절로 울컥해진다.


얼룩 고양이가 백만 번이나 태어나고 죽기를 반복한 것은 그의 삶과 죽음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보다 소중한 존재를 만나고 나서야 사랑할 수 있었다. 하얀 고양이가 얼룩 고양이에게 진정한 사랑과 의미 있는 삶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과 난 서로에게 하얀 고양이가 되어주고 있을까. 서로를 소유의 대상으로 여기며, 백만 명의 주인 같은 모습, 자신만을 사랑한 도둑고양이 모습을 보이는 건 아닐까.


이 그림책은 삶과 죽음, 사랑, 관계에 관해 이야기한다. 백만 명의 주인과 고양이 사이처럼 일방적 관계에선 사랑이 자랄 수 없다는 것, 하얀 고양이가 얼룩 고양이의 삶을 바꾸어 냈듯이 서로를 일깨워주는 관계 속에서 진정한 사랑이 피어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얼룩 고양이가 하얀 고양이를 사랑하고 나서 다시 태어나지 않았듯이, 자기애를 벗어나 다른 존재를 사랑할 수 있을 때 의미 있는 삶과 죽음이 가능하다. 성숙한 사랑과 서로의 삶을 완성해주는 존재로서의 하얀 고양이가 필요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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