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페터 춤토르 - 건축을 생각하다
- 페터 춤토르 지음, 장택수 옮김, 박창현 감수
쉬는 날 1h
건축에는 그 나름의 영역이 있으며 삶과 특별한 물리적 관계를 가진다. 나는 건축을 메시지나 상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건축은 내부와 주변의 삶을 담는 봉투이자 배경이며 바닥에 닿는 발자국의 리듬, 작업의 집중도, 수면의 침묵을 담는 예민한 그릇이다. - p12
작은 요소들이 전체 작품의 메시지와 상관없는 소리를 내어 전체 인상을 방해하는 경우는 없다. 불필요한 디테일이 전체에 대한 이해를 방해하지도 않는다. 모든 촉감, 연결, 결합이 작품의 조용한 존재감을 더욱 부각시킨다. 나는 건물을 설계할 때 이런 존재감을 부여하려고 노력한다. 다만 조각가들과 달리 나는 건물의 기능과 기술적 요건이라는 목표에서 출발한다. 건축은 언제나 무수한 디테일, 다양한 기능과 형태, 소재, 치수에서 전체를 완성해야 하는 도전에 직면한다. - p15
나는 공간이 무엇인지 안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공간이란 생각하면 할수록 미스터리다. 다만 이것 하나는 확실하다. 우리 건축가들이 다루는 공간은 지구를 둘러싼 무한함의 극히 작은 일부에 불과하지만 각각의 건물은 그 무한함에 유일무이한 흔적을 남긴다. -p22
흘러간 시간에 대한 인식, 그 공간과 방에 있었던 삶에 대한 자각, 그 공간이 지닌 특별한 분위기가 남는다. 이런 순간에 건축의 미학적/실용적 가치, 양식적/역사적 의미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 중요한 것은 나를 감싸는 이 깊은 우울감이다. 건축은 삶에 노출되어 있다. 건축이라는 몸이 충분히 민감하다면 지난 과거의 현실을 목격한 그대로 보유할 것이다. -p24
매일의 작업에서 한 걸음 물러나서 내가 현재 하는 일이 무엇이며 왜 하는지를 생각해 보는 건축에 대한 반추가 나에게는 매우 중요하다. 나는 이 성찰의 행위를 좋아하며 그것이 필요하다. 나는 모든 것이 이론적으로 규명된 상태에서 건축 작업을 시작하지 않는다. 내가 건축을 하고 건물을 세우고 완벽함이라는 이상을 위해 작업하는 것은 어린 시절에 생각나는 대로 물건을 만들던 태도와 비슷하다. -p39
생각해 보면 건축과 삶, 공간적 상황과 내가 경험한 방식 사이를 구분하기란 불가능하다. 건축에 집중하여 내가 본 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조차 나의 지각은 내 경험을 바탕으로 움직이며 내가 관찰해 온 방향을 향한다. 유사한 경험의 기들이 기억 속으로 들어오듯이 연관성을 가진 건축적 상황의 이미지들이 포개진다. -p50
무엇보다 먼저 학생들 앞에 서 있는 사람이 해답을 이미 알면서 질문하는 것이 아님을 알려주어야 한다. 건축 교육이란 스스로 질문하고, 교수의 도움으로 해답을 찾으며 질문을 줄여나가면서 다시 해답을 찾는 것이다. 이 과정의 무한 반복이다. 좋은 디자인은 세상을 감정과 이성으로 이해하는 우리의 능력과 우리 자신 안에 있다. 좋은 건축 디자인은 감각적이며 지적이다. -p65
건축은 언제나 구체적이다.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이다. 종이 위에 그려진 도면이나 프로젝트는 건축이 아니라 음악 악보와 비견되는, 약간은 불충분한 건축의 표현물이다. 음악이 연주되어야 하듯이 건축은 시행되어야 한다. 그래야 몸이 실체가 된다. 이 건축의 몸은 언제나 감각적이다. -p66
기억하건대 나는 인간이 만든 예술품의 아름다움을 항상 경험해 왔다. 특별한 형태감을 지닌 예술품에는 안에서 나오는 분명하고 확고한 존재감이 있다. 작품이 자연 속에서 그 존재감을 나타낼 때 나는 아름다움을 본다. -p75
빛과 그림자, 달의 빛과 그림자, 태양의 빛과 그림자, 우리 집 거실 램프가 만든 빛과 그림자를 연구하다가 스케일과 치수에 대한 감각이 생겼다. 나는 빛에 대한 책을 쓰고 싶다. 폴란드 작가 안제이 스타시우크가 <두클라 이면의 세계>에서 말한 것처럼 빛만큼 나에게 영원을 생각나게 하는 것은 없다. -p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