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극복! 추석맞이 60km 행군

제16회 좋은생각 생활문예대상 공모전 떨어졌던 글

by 인문규


2020년 9월 29일, 추석 전날의 일이었다.


작년은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대학에 입학하여 학회장을 맡은 해였다. 그만큼 많은 책임과 기대로 겨울방학 내내 한해 행사 계획만을 준비했다. 그러나 코로나로 인해 행사가 모두 취소되었고 비대면으로 수업이 진행됐다. 허탈함에 되지 않을 희망을 붙잡으며 학교 주변에 있는 고시텔과 원룸, 학과 동아리방 등을 전전하며 아르바이트와 학교생활을 병행했다. 그러나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상황에 심신이 지친 상태로 1학기를 마쳤다.

2학기는 그나마 기숙사에 입주가 가능했고 졸업작품전은 진행할 수 있었지만, 힘이 다 빠진 상태에서 좀처럼 마음이 회복되지 않았다. 매일 유튜브만 보며 무기력하게 보내고 있었다. 그날도 일어나자마자 유튜브를 보고 있었다. 한참을 보다가 우연히 국토대장정을 하는 영상을 보게 되었다. 간단한 짐으로 몇십 킬로를 자신만의 목적지로 향하는 모습과 내 모습이 너무나 대조되어 보였다. 아직 오전 10시도 채 되지 않았고 문뜩 나도 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나둘 영상 속 준비물과 비슷하게 짐을 꾸려보니 어느 정도 충족된 짐이 완성되었다. 추가로 마스크를 담은 뒤, 추석맞이 국토대장정이라며 거창한 제목을 생각하며 지도 앱에서 고향으로 좌표를 찍었다. 내가 있는 화성시 봉담읍에서 고향인 이천시 백사면까지 60km, 시간으로는 약 16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가족이 만류할 것을 알기에 통보하듯이 연락을 남겼다. 가기 전에 일단 1층에서 학식을 먹었다. 식당에서는 코로나 때문인지 아직 학생들은 많이 남아 있었다. 밥을 먹으며 여행 노래들을 플레이리스트에 담았다. 학교에서 나와 후문으로 내려가는 길에 바람이 불었다. 9월의 바람은 습기가 많은 여름의 기운이 남아 있었다.

처음 길을 나선 곳은 막 2000년대를 들어선 것처럼 논밭 위로 전철이 지나다녔다. 아직 익지 않은 푸른 벼는 바람에 기분 좋게 흔들거렸다. 고향을 닮은 풍경과 때 묻지 않은 도시의 외곽은 그간 이곳에 살며 느꼈던 회색빛 색상을 벗겨내기에 충분했다. 단순히 몇 걸음 걸었을 뿐이었는데도 충분한 해방감이 느껴졌다. 화성을 벗어나 수원 터미널까지 갈 당시에는 평소 수원역으로 버스를 타고 가는 방향으로 가게 되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고색 역 인근의 풍경들이었다. 노을이 짙게 깔린 하천에는 가만히 서서 주변을 바라보는 백로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치어들, 자전거를 타고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람들만이 마스크를 썼을 뿐, 자연은 코로나 이전처럼 평범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수원 터미널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완전히 저물었다. 서서히 날이 서늘해지고 왼쪽 약지 발가락이 화상을 입은 듯 따끔거렸고 무릎이 시큰거렸다. 평소 운동도 하지 않고 무작정 시작한 것이 조금 후회되었다. 10시가 지나자 다시금 코로나의 영향이 느껴졌다. 도로와 주변 산책로에는 인기척이 끊기고 상가는 일찍이 문을 닫은 것에 반해 아파트의 불이 가득 들어왔다. 오묘한 밤이었다.

용인 터미널을 지나칠 때쯤에는 어느새 새벽이 되었다. 여전히 도로에는 혼자뿐이었고 몸의 피로가 한계에 부딪혀 졸면서 걷고 있었다. 교차로를 막 건너가던 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달보다 반 정도 작은 별똥별이 3초 정도 길게 빨간색과 초록빛의 불꽃을 띠며 타들어 가며 사라졌다. 어안이 벙벙해져, 길 한가운데 서서 별똥별이 있었던 하늘을 바라봤다. 코끝이 찡했다. 가장 힘든 순간 가장 뜻깊은 선물을 받은 것 같았다. 벅찬 마음을 누르고 남은 한 해를 잘 마치게 해달라고 작은 소원을 빌었다. 발바닥이 무의식적으로 떨릴 정도가 돼서야 용인의 끝인 처인구에 도달할 수 있었다. 더는 움직일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아서 인근 무인텔에 들어가 잠이 들었다. 그간의 수면 중에 가장 만족스러운 잠이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땐, 이미 오후가 되어있었다. 일어나자마자 샤워를 하고 땀에 젖은 옷을 갈아입은 뒤 밖으로 나왔다. 도로 표시판에는 이천이라는 단어가 선명하게 보였다. 이천에서 가는 길은 지도 앱에서 대부분 갓길로 안내를 해서 위험한 순간들이 많았다. 대형 트럭이 지나갈 때면 역풍이 불어 도로 쪽으로 몸이 쏠리기도 하고 갓길로 바짝 붙어서 가는 차에 팔이 쓸릴 뻔한 적도 많았다. 한 번은 시골의 비포장도로에서 인도도 없는 4차선 도로로 가고 있었는데, 신호를 기다리던 차에서 한 모녀가 창문을 열고 혹시 길을 헤매고 있냐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웃으며 여행 중이라고 당당하게 말했지만, 속으로는 제대로 가고 있는지 물음표가 가득했다.

양지면에 있는 기숙 학원에 도착했을 무렵부터 약지 발가락에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불안한 생각이 들긴 했지만, 물이 차서 그런가 보다 싶었다. 대신에 조금씩 무릎이 시큰거렸다. 하는 수없이 인근 버스정류장에서 잠시 누워서 쉬기로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형에게서 전화가 왔다. 차로 지나가는 길에 본 것 같다며 타고 가라고 했다. 20km 정도 남은 상태였고 차로 약 30분이면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형은 오기 부리지 말라고 했지만, 허무하게 끝내고 싶지 않아서 괜찮다고 말했다. 정확히 30분 뒤 형은 도착했다고 문자를 남겼다. 얄밉기도 하고 조금 허무한 느낌이 들었다. 마장면에 도착하고 한참 긴 오르막길을 걷고 있는데, 군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줄지어 뛰어가고 있었다. 몸이 건장하다는 말로는 표현이 아쉬울 정도로 위엄이 있었다. 일반 군인들로는 보이지 않았기에 인근에 특수 부대가 있을 것 같았다. 더 올라가 보니 특수전사령부가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웅장한 입구에 큰 글씨로 ‘안 되면 되게 하라’라는 특전사의 문구가 쓰여 있었다. 유독 그 문구가 큰 동기부여가 됐고 어떡해서든 완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다시 하루의 절반이 지나 노을이 논밭을 가득 물들이고 있었다. 나는 한국도예고등학교 주변 주택가를 걸어가고 있었다. 맞은편에는 노부부와 골든 레트리버가 산책하고 있는 듯했다. 개는 나를 유심히 보더니 해맑게 웃으며 그 큰 덩치로 힘껏 달려들었다. 순간적인 무게에 근육이 놀랐는지 허벅지가 욱신거렸었다. 당황하면 개가 놀랄 것 같아 웃으며 몸을 쓰다듬어주고 손 인사를 하고 다시 걸어갔다. 그러나 붙임성 좋은 개는 마을을 거의 벗어날 때까지 따라왔다. 멀리 찻길에 보여 슬슬 걱정되던 참에 뒤에서 할아버지가 화가 난 얼굴로 나뭇가지를 들고 뛰어왔다.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개는 장난기 여린 얼굴로 근처에 갔다가 도망가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언덕을 요리조리 뛰어다니며 할아버지를 거의 농락하듯이 했다. 그 광경이 너무 웃겨서 한참을 웃다가 할아버지와 함께 붙잡았다. 매로 엉덩이를 몇 대 맞고도 기분이 좋은지 계속 웃으며 순순히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도착하기까지 약 4km가량 남을 때부터 무릎 아래로는 더는 힘이 들어가지 않아 허벅지 근육으로 남은 다리를 끌고 가다시피 걸었다. 게다가 몇 분에 한 번씩 종아리에 쥐가 나서 중간에 쉬기를 반복하는 바람에 이미 도착 예정시간을 훌쩍 넘겨버렸었다. 하염없이 시간은 지체되자 배도 너무 고파 도저히 걸을 힘이 없었다. 가족들에게 먼저 식사를 하라고 말하고 편의점까지만 걸어갔다. 컵라면과 김밥 한 줄을 들고 계산대에 서자 종업원은 내 몰골을 보고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컵라면과 김밥 하나뿐이었지만, 충분히 만족스럽고 든든한 식사였다. 밥을 먹고 나서는 그래도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해 끝까지 걸을 수 있었다.

집에 도착 후 가족들에게 간단하게 인사하고 바로 화장실로 가서 발가락을 확인했다. 발가락 껍데기의 반절이 핏물로 가득 고여 발가락의 형태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궁금함에 여기저기 찔러보았으나 고통은 여전히 느껴지지 않았다. 샤워를 마치고 돌아온 거실에서 가족들에게 여행하며 겪은 일들을 얘기해 주며 발가락 껍데기에 바늘을 찔러 넣었다. 물이 희석된 피는 휴지 세 조각을 가득 적셨다. 물이 가득 빠진 발가락은 마치 노인의 발처럼 깊게 주름이 져 있었다. 속살에 껍데기가 닿으니 그제야 조금씩 통증이 느껴졌다. 처음으로 기분 좋은 흉터가 생겼다.

짧은 여행이었지만 그 속에서 온전히 나만이 담아낼 수 있는 시선과 순간들이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크게 와닿을 수 있었던 것은 현실적인 한계를 조금씩 넘어서며 마지막에 도달했을 때, 꾸준함이 갖는 힘에 대해서 배울 수 있다. 다시 학교로 돌아왔을 때는 학회장으로서 최선을 다해 교수님들도 만족할 만큼 졸업작품전을 성공적으로 이루어 내며 미련 없이 한 해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다쳤던 발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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