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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문규 Jul 02. 2021

주마등

1. 자각몽

  밤새 뒤척이며 앓던 밤.

신비스러운 꿈을 꾸었다. 평소 꿈을 잘 꾸지 않았던 터라 무척이나 흥미로웠는데 나는 안개 꽃밭에 누워있었고 그저 멍하니 검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살며시 스치듯 다가오는 바람결에 꽃잎은 살랑거리며 꽃향기에 몸이 축 늘어진다. 고갤 돌려 안개꽃을 바라보며 꺾으려 하자 내 손아귀에 있던 꽃은 마치 진짜 안개라도 된 듯 사라졌다. 깜짝 놀랐지만, 다시 하늘을 바라보며 마음을 추슬렀다. 삶에 지쳐있었던 내게 잠깐의 휴식을 위한 꿈인 걸까? 아니면 다른 무엇인가 있는 것일까? 하지만 이건 꿈이라기엔 너무나도 꺼림칙할 정도로 생생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도무지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가만히 누워있기에는 무료함과 궁금증이 사라질 것 같지 않아, 몸을 일으켜 세우고 안개꽃들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안개꽃들이 아까 그 안개꽃처럼 옷깃을 스치면 사라져 수월하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 조금만 더 가면 끝이 보일 것 같다. 끝이 보일 때쯤, 갑자기 거센 바람이 불었다. 속이 빈 것처럼 텅 빈 소리가 들리고 그와 함께 주저앉고 말았다. 뒤돌아보니 바람 때문인지 꽃밭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내 앞엔 하얀 길이 나 있었다. 잘 된 건가 싶기도 하고 왠지 불안하기도 한 아리송한 기분으로 일단 다시 길을 나섰다. 가는 길가엔 서울에서 볼 수 없었던 고운 모래알갱이가 내 발가락 사이사이에 묻어났다. 길 곳곳에는 민들레 씨앗이 바람에 흩날리는 모습은 기분을 좋게 했다. 마치 어릴 적 아버지랑 함께 시골에 계시는 할머니 댁에 가던 길이 떠올랐다. 그 길도 이곳처럼 전혀 세련됨은 없었지만, 고즈넉한 풍경에 티 없이 맑은 곳이었다.

  꿈에서 깨고 싶지 않을 정도로 정말 행복했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이곳에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현실에서 얼마만큼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괜스레 조급함이 앞선다. 생각보다 많이 걸어왔지만, 처음의 그 아름다움과 생각했던 이상적인 느낌은 어느새 온데간데없고 또, 무엇 하나 나올 기색조차 없는 이 길이 조금 무섭게 느껴졌다. 기대감이 컸던 만큼 찾아오는 불안감은 커지고 이 행동이 부질없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문뜩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만일 내가 계속 걷기만 했던 것이 문제라면 다른 행동을 취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꿈에는 대게 어느 정도 현실이 바탕 되어 만들어지기에 이 꿈에도 이야기가 남아있다면 내가 무엇을 하든 끝은 정해져 있는 것이 맞다. 바닥에 드러눕고 눈을 감았다. 그러자 갑자기 바닥의 모래알들이 옆으로 새어나가더니 비명과 함께 내리막길로 굴러떨어졌다.

  떨어질 때 머리부터 떨어져서 어지러웠다. 시야가 흐릿할 정도로 한동안 정신을 못 차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주 새하얗게 반짝이는 바다가 있었다. 짭조름한 냄새가 코끝을 찡하게 감쌌다. 아름답다. 그간 있었던 짜증이 어느새 사라지고 꿈속이라도 이렇게 아름다운 바다를 볼 수 있어서 좋다. 나도 모르게 살며시 미소 지으며 밀려오는 바닷물 사이에 발목을 담갔다. 밀물과 썰물이 오가며 흘러 들어가는 모래알갱이가 발가락 틈새로 빠져나가는 부드러운 감촉, 실제 바다를 재현해 놓은 듯 신비롭다. 나도 모르게 애처럼 실없는 웃음이 흘러나온다. 바다에서 나와 쪼그리고 앉아 조용히 바다를 응시하다 잠시 눈을 감고 귀를 열어 바다 소리를 감상한다.

‘스으으윽···촤아악···스으윽·····.’

바다의 거짓 없는 맑은 소리에 몸 구석구석을 씻어 내리는 듯하다. 그 거침없으면서도 잔잔한 파도소리에 긴장이 풀려서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졌다.

  얼마나 잠든 것일까. 꿈속에서조차 자고 일어나니 온몸이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 어느 정도 몸도 마음도 정리가 된 것 같아 다시 가던 길이나 가볼까 싶었다. 끝에 뭐가 나올지는 몰라도 꿈에서 깨기 전까지 끝이 보고 싶어졌다. 주위를 둘러보며 떨어진 곳을 확인했다. 생각보다 높은 곳에서 떨어졌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바다를 보고 올라가려고 하는데 어찌 된 게, 바닷물이 갑자기 발목까지 차오르고 움직이려고 하자 바닷물이 붙잡듯 더욱 차오른다. 어떻게 해서든 빠져나오려 발버둥질하다 앞으로 고꾸라졌다. 얼굴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는 도중 뒤에서 불안한 거대한 울림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는 순간 아니나 다를까 큰 파도가 매섭게 나를 향해 달려든다.     

정신을 차려보니 바닷속으로 점점 빠져들고 있었다. 위를 바라보니 그 밝게 발광하던 바다조차 내면은 끝없는 어둠으로 가득했다. 가상이라는 것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죽음의 두려움과 괴로움이 속에서 계속해서 발버둥치지만 바다는 비웃기라도 하듯 점점 더 깊이 빠져들어 간다. 빛은 희미해져만 가고 수압 때문인지 몸이 점점 더 죄는 것만 같다. 조금씩 몸속으로 물이 들어와 곧 죽을 것임을 직감하며 절망이 내 온몸을 감싼다. 마지막 힘을 다해 움직이지 않는 손발로 발버둥을 치지만, 결과는 다를 바가 없다. 더이상 빛이 들어오지 못하는 심해 속으로 갇혀버렸다. 이제는 감각마저 무뎌진 듯 공허함 속에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 눈가에 눈물이 새어 나오는 것을 느꼈다. 그저 느껴질 뿐 보이지 않았다. 서서히 눈이 감으려는 순간, 저 멀리에서 희미한 불빛이 반짝인다.

내가 죽기만을 기다리듯 불빛은 유유히 반짝임을 반복하며 아주 천천히 내게 다가온다. 어느샌가 내 앞으로 다가온 불빛의 정체는 내 몸에 몇 배가 되는 크기의 고래였다. 나는 체념하며 흐릿한 시선 속 그것에게 오라는 하는 듯이 손짓했다. 그것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큰 몸집의 입을 벌려 나를 집어삼키려 할 때 숙연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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