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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문규 Jul 14.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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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화 맑은 마음: 안개꽃 하나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 풍경의 윤곽이 흐릿하게 보일 만큼 안개가 걷혔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발에 높게 솟아오른 무언가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간신히 무게중심을 잡고 뒤를 돌아보며 그 모래더미를 확인했다. 모래성으로 보이는 것이 반쯤 무너져 있었다. 그 앞으로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가 스케치북을 들고 울먹이며 노려보고 있었다. 바다 쪽에는 몇 명의 아이들이 물장구를 치고 있었다. 앞에 있던 아이는 울지 않으려 뜨거운 숨을 깊게 내뱉고 들이마시고 있었다. 이 아이도 아저씨와 똑같은 푸른 머리카락과 하얀 옷을 입고 있었다. 아이는 내게 다가오며 물었다.

“아저씨 저거 어쩌실 거예요. 다 만들어서 엄마한테 자랑하려고 했단 말이에요.”

아이는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미안한 마음에 다시 만들어주겠다고 말했다. 아이는 잠시 숲 속으로 들어가 나뭇가지를 하나 가져와서 모래에 성 모양을 그렸다. 그리고는 그림 속 모래성처럼 만들어달라고 말했다. 바닷물이 다소 묻어있는 모래를 손으로 여러 번 긁어모아서 파도가 닿지 않는 근처로 가져다 놨다. 아이도 거기로 와서 앉았다. 아이는 내가 모래성을 만들 동안 어디서 가져왔는지 스케치북을 무릎에 놓고 앞을 힐끗거리며 물장구치는 아이들을 그렸다. 아이는 꽤 섬세하게 연필 힘을 조절하며 스케치를 했다. 생각보다 수준 높은 실력에 감탄하면서도 문뜩 어린 나이에 죽었다는 사실이 안쓰러웠다. 내가 동정하는 얼굴로 바라보자, 아이는 곁눈질로 하나도 완성되지 않는 모래성을 보다가 인상을 쓰고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나는 서둘러 축축한 모래와 마른 모래를 조금씩 섞어서 틀을 만들었다. 그 위에 다시 마른 모래를 섞었다. 중간 정도의 물기를 가진 모래는 견고하게 뭉쳐진다. 미안한 마음에 시작한 것이었지만 모래성을 만들수록 동심으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어렸을 때 느꼈던 어떠한 향수가 다시금 코끝에 다가와서 서성인다. 다시금 아이의 시선이 느껴졌다. 아이의 표정은 아직 경계가 풀어지지 않았지만, 신기하다는 듯이 반짝였다. 그리고는 고양이처럼 느리게 조금씩 옆으로 다가왔다. 아이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내 어릴 때처럼 너무도 내성적인 아이였다. 나는 이럴 때 어떻게 풀었을까. 내 옆에 바싹 다가온 그 아이에게 관심사를 내보이면 편하게 다가올까 싶었다.

“그림 그리는 거 좋아해?”

아이는 그렇다고 했다. 더는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짧은 대답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어색함을 풀고 싶어 다시 말했다.

“너는 왜 저 친구들이랑 안 놀아?”

“그냥, 그림 그리면서 바다는 보는 게 좋아요.” 나는 아이의 그림에 눈길을 돌렸다. 아이는 나이 때답지 않게 그림을 잘 그렸다. 윤곽선 뚜렷한 일본식 만화 체였으나 붓을 옅게 덧바른 수채화였다. 아이에게 그림을 칭찬하며 스케치북을 볼 수 있겠냐고 물었다. 아이는 부끄럽다며 싫다 하면서도 스케치북을 건네줬다. 크로키부터 명암 연습, 색 교합 등 연습을 많이 한 티가 났다. 아이의 왼손 엄지에 약간의 굳은살이 있을 정도였다. 나도 어렸을 때는 그림을 자주 그렸던 것 같은데 취업을 하고부터는 그림과는 멀어진 삶을 살고 있었구나 싶었다. 조금 씁쓸한 감정이 들었다. 쓴웃음을 지으며 스케치북을 넘겨볼수록 공통된 장면들이 있었다. 완성되지 않은 스케치에는 뼈대만 잡혀 있었다. 울고 있는 사람과 그를 안아주는 사람, 어른으로 보이는 남자와 어린아이 만나는 장면, 그리고 숲에서 두 사람이 마주치는 장면까지. 다음 장면을 확인하려고 종이를 넘기려고 하자, 거품처럼 스케치북 흩날리며 사라진다. 그리고 마치 원래 없었던 것처럼 주변에서 물장구치던 아이들이 사라졌다. 아이는 진지한 얼굴을 하고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부드럽게 내 손가락을 움켜잡았다. 아이는 이번에는 울지 않았다.

“아저씨, 예전에 행복했던 기억을 되돌아봐요. 그리고 꼭 다시 행복해야 해요? 알았죠.”

싱긋 웃으며 내 손바닥을 펼쳐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연필을 올려놓았다. 내가 스케치북을 없애버린 것 같아서 미안하다고 말하려는 찰나, 아이는 사라졌다. 파도 소리만 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스산한 기분과 함께 왠지 모르게 가슴 한편이 비어있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행복했던 기억이 있었던가. 손안에 있던 연필이 꽃잎에 닿은 것처럼 간질거렸다. 아이가 준 연필은 어느새 어린 안개꽃 한 송이로 바뀌어 있었다. 안개꽃을 든 손을 눈높이에 맞춰 올리자 안개처럼 흩어진다. 완성되지 않은 모래성이 애매한 형태를 띠며 놓여있다. 그리고 곧바로 안개가 다시 드리운다. 억지로 끼워 맞춘 듯 너무도 부자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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