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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문규 Jul 12.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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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화 바다

  잔잔한 파도 소리가 귓가에 들린다. 몸 주변에 따스한 모래알갱이 같은 게 느껴진다. 나는 깜짝 놀라 재빨리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주변을 둘러봤다. 바닷속이 선명하게 보일 만큼 투명한 바닷물,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극단적으로 하얀 모래알갱이, 뒤로는 다소 멀리 떨어져 있지만 만화에서나 볼 법한 큰 나무들이 빽빽하게 솟아있었다. 또 어찌된 영문인지 하얀 반팔과 반바지로 옷이 갈아입혀져 있었다. 여기에 오기 전 상황을 다시 되뇌었다. 마지막으로 봤던 새하얀 불빛은 아마도 차였던 것 같다. 그 차에 치여 죽어가고 있었던 것 같은데, 병원도 아닌 여기는 대체일까. 내가 죽은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모든 감각이 너무도 선명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멍하니 손으로 모래알갱이를 더듬었다. 나를 친 트럭기사가 죽어가는 나를 몰래 여기다가 버려둔 게 아닐까 싶었지만, 그러기엔 옷도 그렇고 나의 몸이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것 자체가 모순덩어리다. 너무도 현실성 없는 이곳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다.

  모래가 사부작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누군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손차양을 하며 인상을 찡그리고 바라보자 멀리서 나와 같은 차림을 한 사람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두려움과 반가움을 안고 그에게 다가갔다. 손을 뻗으며 그에게 악수하려고 했지만, 손을 숨겨야 했다. 가까이서 본 그는 사파이어처럼 푸른빛의 머리카락과 눈, 바닷물처럼 희고 투명한 피부와 같은 모든 것이 마치 이곳처럼 너무도 추상적인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누군가가 나에게 말하는 듯했다. 이곳의 모든 것이 어린아이의 스케치북처럼 현실과 너무도 동떨어져 있었다. 문뜩 마음속에 한 가지 확신이 들었다. 나는 죽은 것이 확실하다고 흔히 말하는 천국이 이곳이라고 직감했다.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은 나를 그가 곁부축했다. 괜찮냐고 묻는 그의 따듯한 말이 더욱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에게도 심장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도 모순덩어리였지만, 어딘가 알 수 없는 안도감을 느꼈다. 그와 함께 죽음의 허무함에 힘없이 울음을 터트렸다. 그는 말없이 내 등을 토닥였다.

  그는 내 옆에서 팔을 뒤로 기대고 다리를 곧게 뻗더니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조금은 진정이 된 내 얼굴을 보며 한 번 더 괜찮냐고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짧게 대답하고 다리를 모으고 얼굴을 반쯤 묻은 자세로 정면을 응시했다. 그는 할 말이 남은 듯 헛기침을 하며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애써 모른 척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결심한 듯 다시 말을 이어간다.

“어느 정도 직감하고 있겠지만, 지금 네가 있는 이곳은 죽은 사람이 오는 곳이야.”

말을 하며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의 확신에 찬 목소리와 떨림 없는 눈빛에 진심이 느껴졌다. 머릿속에 제일 먼저 어머니가 떠올랐다. 홀로 남겨둔 어머니는 어떻고 남겨진 빚도 홀로 인내하실 수 있을까, 나 하나만 보신 어머니가 혹여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필름이 뽑히듯 흘러나오자 의지와는 상관없이 또다시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너무나 절망적이고 극단적인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애처럼 주변 사람과 상황을 신경 쓸 여력도 없이 미친 듯이 울었다. 그는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더욱 진한 울음이 쏟아 나왔다. 눈이 따끔거리고 피눈물이 흐르듯 너무나 아프지만 멈출 수가 없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아버지나 나나 주제에 맞게 그토록 열심히 살아온 사람들에겐 신은 너무나도 가혹하다. 신을 믿지 않지만, 누군가를 미워하고 싶은 마음이 신에게 향한다. 그날 조금만 일찍 눈을 뜨고 나갔더라면, 선우를 기다리지 않았더라면 하는 후회들이 다음 머릿속에 가득 채우고 마지막으로 본 불빛과 검은 하늘이 떠올랐다. 점점 호흡이 가빠져 현기증에 눈앞이 시큰거리고 정신이 아득해져 그만 정신을 잃어버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때도 아직 그곳이었다. 아까 그 사람도 옆에 남아있다. 차라리 다시 죽고 싶은 기분이다. 여전히 머리는 맹하고 현기증이 남아 정신은 없지만, 왼손으로 바닥을 집고 다른 손으로 따끔거리는 목을 움켜잡으며 그에게 문뜩 떠오른 말이 있어 말을 꺼냈다.

“아저씨, 전 이제 어떡해야 하는 건가요... 아저씨처럼 이곳에서 바다만 보고 있으면 되는 걸까요?”

또다시 목이 따끔거린다. 눈가에 눈물이 맺히긴 했지만 흘러내리지 않음이 왠지 다행스럽게 여겨진다. 그는 잠시 할 말을 곱씹듯 머뭇거리다가 대견스럽다는 듯 따스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도 처음에는 어떻게 할지 몰랐는데, 이제는 이곳에 오는 사람들에게 산책을 권유해. 계속 산책을 하면서 아주 어렸을 때부터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의 모든 기억을 되새기는 거야. 그러면서 후회와 용서, 미련과 같은 감정을 점점 털어내도록 연습을 하는 거야. 이곳엔 태양이 없어서 시간이라는 개념이 무의미하거든. 그렇게 연습을 해도 미련이 계속 남는다면 이곳에 올 사람을 도와주다 문뜩 떠날 때가 되었다 느끼면 이 백사장의 모래가 되어 사라지게 돼. 다음 사람을 위해 우리가 밑거름이 되어 주는 것. 그게 이곳의 관례야.”

문뜩 선우가 생각이 났다.

“혹시 가다보면 저와 비슷한 시기에 온 사람도 만날 수 있나요?”

아저씨는 그렇다고 말했다. 나는 바다를 바라보며 깊게 호흡했다. 홀로 남겨진 어머니를 위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바다의 끝없는 순수함처럼 본질적인 면을 보자. 다시 돌아갈 수 없음을 이제는 받아드려야 한다. 일어서는 나에게 그는 꼭 안아주며 잘 가라고 말한다. 그에게서 아버지와 닮은 향기가 느껴졌다. 품에 안겨 아까 애써 흘리지 못한 눈물을 흘렸다. 아저씨는 산책로로 가는 방향을 알려주었고 나는 배웅해줄 수 없냐고 물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이곳이 마지막 장소로 택한 곳이라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다고 말했다. 어쩔 수 없어 홀로 그가 말한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 정도 멀어졌을 때쯤 뒤를 돌아봤다. 그는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서 산책로를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산책로의 앞이 하구로 잠겨 있었다. 허리까지 오는 얕은 수심과 약한 물살이었지만 자꾸만 제자리로 밀려났다. 마치 이곳으로 오지 말라고 경고하듯 슬픈 울림이 바닷물에서 느껴졌다. 따듯하면서도 아픈 그 울림이 끝에 다다를수록 나를 더욱 괴롭혔다. 물길을 벗어났을 땐 온몸이 젖어있었다. 숙인 얼굴의 윤곽을 따라 물방울이 쉴 틈 없이 떨어진다. 모래가 물방울을 빠르게 삼켜낸다. 나는 다시 고개를 들고 그가 말했던 것처럼 아주 어렸을 때의 옛 기억을 되새기자 짙은 안개가 드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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