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아침 8시, 모처럼 일찍 눈이 떠진 아침이었다. 어제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와 침대에 누워 잠깐 쉰다고 눈을 감은 뒤 기억이 없다. 그래도 오랜만에 쉬는 날 일찍 잠에서 깨어나니, 뭔가 기분 좋은 하루가 시작되는 것만 같다.
오전 8시 반쯤 간단히 아침을 먹었다. 어제 집에 오자마자 저녁도 먹지 않고 자버린 탓에, 어제저녁으로 남은 김치볶음밥이다. 차가웠다. 하지만 밥알이 살짝 굳은 탓에, 씹는 맛은 오히려 좋았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침대에 누워 뭉그적거리며 일주일간 밀린 잠을 조금 더 자볼까 했으나, 몸에 더 이상 피곤함이 없다. 유튜브 영상을 잠시 뒤적거리던 나는, 어제 하지 못한 운동을 하러 가기 위해 옷을 챙겨 입었다.
최근에 날씨가 급격히 추워졌다. 여름이 갓 지났기에, 살짝 두꺼운 운동복을 입고 집을 나섰으나, 몸에 한기가 돋았다. 휴대폰에는 한파주의보가 울렸다. 집 앞에 있어야 할 자전거도 어디 갔는지 당최 보이지가 않았다. 카톡창에는 동생이 자전거를 빌려간다는 메시지가 남아있었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지만, 걸어가기에는 꽤나 귀찮은 거리다. 차키를 가지러 다시 집으로 들어갈까 했지만, 오랜만에 추운 기운과 가을향기가 그리워 거리를 걷기로 했다. 사람들이 옆을 지나간 뒤, 거리에 혼자인 걸 깨닫고 살짝 마스크를 내렸다. 낙엽 향기가 코 밑에 맴돌았다. 가을이라기 보단 겨울에 가까운 향기였다. 맞은편에 다시 사람들이 걸어오는 탓에, 급하게 다시 마스크를 코 위로 올렸다. 마스크 사이로는 계절 고유의 향기가 스며들어오지 않았다.
헬스장으로 향하는 길, 일 년 전 아르바이트를 했던 라멘집을 지났다. 괜히 옛날 생각이나, 라멘집 앞을 서성였다. 통유리 사이로는 같이 일했던 동갑내기 친구 한 명이 홀을 정리하고 있었다. 친구의 모습을 훔쳐보다 다른 아르바이트생과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황급히 몸을 숨겼다. 민망하다. 휴대전화를 들어 가게 오픈을 준비하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어디야! 지금 앞이라며?". 가끔씩 여자 친구와 라멘을 먹으러 놀러 온 탓에, 아르바이트생에게는 익숙한 얼굴이었나 보다. 가게 앞에서 잠시 그와 담소를 나눴다. 뭐가 힘드니, 오늘은 뭐하냐느니, 술이나 한잔 하자느니. 참 시시콜콜하지만, 재미있는 대화였다. 그냥, 친한 친구와 떠드는 것 자체가 재미있기 때문일 것이다.
회원번호를 누른 뒤, 체온 체크를 하고 헬스장에 들었다. 주말 헬스장 카운터는 보기 드물게 친절하다. 주말 아침이라 그런지 헬스장이 적적했다. 빠른 템포의 노래들이 흘러나오고 있지만, 사람들의 에너지 넘치는 신음만큼은 되지 못한다. 나는 익숙하게 옷가지를 챙겨 갈아입고 한적한 운동기구 앞에 자리 잡았다. 한동안 운동에 소홀하고 술이야 고기야 여기저기 먹으러만 다닌 나머지 허리춤에 지방이 가득했다. 이전에 열개를 넘던 턱걸이도, 이젠 다섯 개를 간신히 하는 처지가 됐다. 한 세트를 하고, 웹툰 하나를 살짝살짝 봐가며 한 시간을 내리 쇠질을 해댔다.
운동의 끝은 식사라고, 집에 오자마자 고등어를 구웠다. 냉장고에 있는 그나마 단백질 위주의 음식이다. 어머니가 끓여 놓은 호박죽과, 홍시까지가 내 점심 식사였다. 시곗바늘은 이제야 오후 1시를 가리키고 있다. 아침에 일찍 일어는 것이 좋은 이유 중 하나는, 하루가 참 길다는 것이다.
샤워를 한 뒤, 오랜만에 피부관리에 심혈을 기울였다. 몇 달 전, 여자 친구와 제주도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 면세점에서 샀던 피부 진정팩을 꺼냈다. 40개를 사면 20개를 더 주는 40+20 행사를 하는 하나에 4000원 돈의 팩이었다. 이틀에 한 번씩 두 달 정도면 쓰겠다고 생각하며 샀는데, 3달이 지나도록 20개를 채 쓰지 않았다. 돌이켜보니 충동구매인 듯싶은 게, 다음 여행 때는 좀 더 신중하게 현실적인 기념품을 사 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팩이 수분을 한껏 머금은 탓에 제대로 펴기가 힘들다. 대충 눈만 맞게 "챱"하고 얹은 뒤, 얼굴에 맞게 팩을 당겼다. 행여라도 피부와 팩 사이에 공기가 찰까, 살살 당기며 피부에 맞게 팩을 삭삭 문지른다. 팩에 주름이 지거나, 공기가 차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얼굴이 큰 건지 팩이 작은 건지. 팩 안에 남은 액체들을 손바닥에 짠 뒤, 팩이 닿지 않는 이마의 윗부분과 목에 손바닥을 치덕였다.
모바일 사천성을 하자는 여자 친구의 메시지에, 팩을 기다리는 동안 잠시 휴대폰을 두드렸다. 아침부터 운동을 해서 손가락이 풀렸는지, 오늘따라 금방금방 같은 모양의 블록들을 찾아냈다. 하지만 레벨 300이 넘는 여자 친구의 손가락을 고작 레벨 100도 안 되는 내가 따라가기에는 무리였다. 15분이 지나고 팩을 땐 뒤, 볼을 착착착 두들겨 내용물을 흡수시켰다. 그리고 로션을 꺼내 피부에 펴 바른 뒤 거울을 보니, 웬 거뭇한 피부의 잘생긴 사내 한 명이 앉아있었다.
오후 2시 즈음, 글을 한편 쓰기 위해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켠 뒤, 제목을 써 내려갔다. [수족관의 새우는 같은 자리를 달린다]. 내용.. 내용을 뭐라고 써야 할까. 생각이 바로 나지 않아 주제를 먼저 적기로 했다. [목적이 없는...] 아니, [목적을 잃은...]. 딱히 알맞은 주제가 떠오르지 않아 내용을 먼저 써 내려갔다. [우리는 수족관에서 태어난다...], [수족관 같은 사회...], [수족관보다 더 한 사회...] 내용을 적었다 지웠다 반복하던 나는, 노트북을 덮은 뒤, 책 한 권을 가지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
침대에 몸을 던진 뒤 책을 펴는데도 시간이 꽤 걸렸다. 휴대폰 유튜브 쇼트에 빠져, 이것만, 하나만 더.. 하며 유튜브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다 보니, 침대에 누운 지 한 시간이나 흘렀다. 네모난 바보상자란 말이 딱 맞다. 한 시간 동안 뭘 봤는지 생각도 안 날뿐더러, 기분만 무료해졌다. 책을 펴도 기분은 똑같았다. 영화는 클라이맥스가 제일 재미있는 법인데, 책도 똑같다. 두꺼운 소설책의 서론부터 읽자니, 당장은 책 읽을 기분이 나지 않는다. 책장을 5장 정도 넘긴 나는, 주인공의 이름이 겐카라는 것만 확인한 채로 책갈피 줄을 꽂은 뒤 책을 덮었다. 그 이후로 두 시간을 누워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을 번갈아보며, 담배를 뻑뻑 태웠다. 두 시간을 그렇게 보내니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을 삭제하고 싶었다. 에휴, 차라리 일을 하고 싶다.
시간은 많은데, 딱히 하고 싶은 것도, 해야 할 것도 없다. 시간을 죽이기 딱 좋은 자세다. 인생은 짧은 시간이라는데, 굳이 시간을 죽이고 싶지는 않다. 내 단짝인 여자 친구는 오늘 일하랴, 친구 만나랴 여간 바쁜 게 아니었다. 카카오톡을 들어가 냅다 메시지를 던졌다. [술 마실 사람~?] 어딘가 나처럼 무료한 사람이 있을까? 북적북적했던 카톡방들이 죄다, 침묵으로 가득 찼다. 그러다 반가운 카톡이 하나 울렸다. [고민된다] [이번 주 안 마시려고 했는데] [흐음]
후, 다행히 저녁이 무료하진 않을듯싶다. 세상의 무료라고 하는 건 다 가지고 싶었는데, 삶의 무료는 굳이 가지고 싶지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