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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혁꾸 Sep 16. 2020

떠나는 나를 걱정해주는 소중한 사람들이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덕목 중 하나가 되어버린 '빨리빨리'

 아직 아침을 맞지 않은 어둑한 새벽 집을 나섰다. 고요한 거리에는 달달거리는 캐리어의 바퀴 소리만 떠다녔다. 집 앞 지하철역에는 엘리베이터가 없다. 그래서 거대한 28인치짜리 캐리어를 들고 낑낑거리며 지하철역의 계단을 내려갔다. 20년 넘게 지하철역을 다니며 엘리베이터는 한 번도 찾지 않았던 주제에, 오늘은 왠지 엘리베이터가 없는 지하철역이 원망스러웠다. 아마 20년 만에 필요에 의해 자기를 찾아주는 엘리베이터도 서운하겠지. 

 

 해는 아직 뜨지도 않았는데 지하철역에는 출근하는 사람들 사이로 발 디딜 틈이 하나 없었다.  자.. 잠깐, 나는 여행 가는 거지 출근하는 게 아니라고...! 게다가 이 곳은 종점이란 말이다; 종점에서부터 앉을자리가 없다니, 당분간 지나는 역의 대부분은 거주지역인데, 다음 역부터 타는 사람들에겐 앉을 수 있다는 희망조차 없었다. 물론 나에게도 편하게 앉아 갈 자리는 허락되지 않았다. 출근길의 사람들로 꽉꽉 들어찬 콩나물 지하철 속, 나의 소중한 캐리어는 다른 사람들의 민폐 덩어리로 전락했다. 최대한 민폐가 되지 않고자 지하철의 마지막 칸, 캐리어와 함께 껌딱지처럼 벽에 붙었다. 추운 겨울의 출근 지하철 안은, 열차의 흔들림에 있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자, 몸의 중심을 유지하는 데에 온 신경을 쏟고 있는 사람들의 거친 호흡으로 가득 차 따뜻했다.

 

 얼마 후 공항까지 배웅해주겠다는 착하고 귀엽고 아름다운 여자 친구 다운이를 만나기 위해 광나루 역에 잠시 내렸다. 더위를 벗어날 때 느끼는 시원한 해방감은 꼭 여름에만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구나 싶었다. 얼마 뒤 다운이가 피곤함에 눈이 반쯤 감겨 쫄래쫄래 뛰어왔다. 졸려서 눈은 반쯤 감긴 채로 실실 웃으면서 총총 뛰어오는 모습이 너무… 너무.. 귀여워라. 행여 내가 피곤할까 유산균이 가득한 요구르트까지 사 오는 사랑스러운 여자 친구. 최고다. 23일간 보고 싶으면 어쩌냐며 가지 말라고 조르던 여자 친구를 두고 가자니 미안했다. 하지만 다녀올게, 안녕!!


 지하철에서 잠시 내린 뒤, 고작 한 두 개의 지하철이 지나갔을 뿐인데, 다시 탑승한 지하철은 놀랍도록 한적했다. 하지만 출근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서는 그 지옥 같은 지하철을 꼭 타야만 했겠지.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수다를 떨다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공항에 도착했다. 배웅을 와준 다운이는 마치 자기가 여행을 가는 것 마냥 들뜬 기분에 방방 뛰었다. 미리 도착해 있었던 성진이와 성진이의 여자 친구와 만나 함께 출국 준비를 시작했다. 짐을 부치고, 환전, 비행기 티켓 교환을 한 뒤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출국심사를 위해 줄을 섰다. 그리고 다운이와 작별인사를 한 뒤 성진이와 공항 검색대로 들어갔다.


 공항까지 따라와 준 다운이와, 성진이의 여자 친구에게 너무 고맙다. 덕분에 성진이와 내가 좀 더 편하게 출국을 준비할 수 있었다. 고마워 다운아! 그리고 성진이 여자 친구도!

다운이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뒤로한 채 나는 면세점으로 향하는 공항 검색대를 통과했다.

명품이 가득한 면세점의 유혹을 지나 항공기 게이트에 도착했다. 딱 맞춰 온 시간에 많은 사람들이 이미 항공기에 탑승하기 위해 줄을 서고 있었다. 오랜만에 타는 비행기에 긴장한 탓인지 배가 살살 아파왔다. 출발까지 남은 시간은 15분. 성진이에게 짐을 맡기고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집중해서 화장실을 이용하는 타입이라 예상 성공 시간은 10분, 깔끔하게 출발 5분 전 탑승할 수 있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화장실에 들어온지 5분이 채 되지 않아, 빨리 입장해 달라고 한다는 성진이의 다급한 재촉과 함께 화장실 문이 흔들렸다. 행여 화장실 문이 열릴까 황급히 이용을 마치고 뛰어나와 비행기에 탑승했다. 금방 출발할 듯 “빨리빨리”를 재촉하던 항공기는 지각 손님에 의해 15분이나 지나서야 출발했다. 좌석의 통로를 지나는 두 명의 한국인 지각 손님은 ‘빨리빨리’를 지향하는 자국 여행객들의 따가운 눈초리의 주인공이 되었다. ‘빨리빨리’는 언젠가부터 한국인이 갖춰야 할 덕목 중 하나가 되었다.


 곧이어 비행기는 이륙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의 절반 이상 뻗어 있는 아름다운 백두대간을 오랜만에 만날 수 있었다.

백두대간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몇 년 전 일본 여행을 처음 할 때였다. 이른 아침 출발에 세명의 친구들과 함께 공항에서 밤을 지새웠었다. 그리고 나는 비행기를 타자마자 잠에 들었다. 일본까지의 비행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자고 일어나면 금방 도착하는 정도? 그렇게 잠에서 깬 나는 창문 밖으로 보이는 눈 덮인 아름다운 산맥에 감탄했다. 그리고 서는 “이야, 역시 일본 산맥 진짜 장난 아니다~ 여기가 ” 하며 이것 좀 보라며 친구를 툭툭 건드렸다. 옆에 있던 친구는 눈을 말똥말똥 거리며 말했다. “아직 한국이야... 혁구야”. 동시에 편안한 비행의 시작을 위한 기장님의 방송이 흘러나왔다. 하하, 역시 아름다운 우리 강산 백두대간이 최고다. 행여 누가 나의 이 민망하고 비애국적인 발언을 들었으랴, 부랴부랴 눈을 감고 꿈속으로 도망쳤다.

어우, 2시간 45분의 짧은 비행이었지만, 내 허리를 고문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던 것 같다. 어우 뻐근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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