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어두운 단면,

by 혁꾸

"힐링"


사람들에게 "힐링"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라고 한다면, 아마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 중 하나는 여행일 것이다. 여행은 우리 삶에 아주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작은 원동력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나는 가끔 몇 년 전 떠났던, 휴양지로의 짧은 여행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다. 해변의 작은 Pub, 나무 의자에 앉아 맥주 한 병을 시키고 바라보던 아름다운 에메랄드 색의 바다. 뜨거운 태양 빛에 바다는 반짝이고 있었다. 시원한 맥주 한 모금에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까지 피부를 스쳐 지나가면, 계획이고 뭐고 맥주에 잔뜩 취해 해변의 모래에 덮인 채로 바닷소리를 들으며 한 숨 자고 싶을 뿐이다.

얼마 뒤, 다시 일상 속으로 돌아왔을 때. 허탈한 마음을 가득 안은 채로 오전 9시 직장 내 자리에 앉아서, 다시 또 다음 휴가만을 기다리는 내 모습이 보인다. 다음 휴가까지 우리는 짧았던 여행의 기억을 야금야금 먹으며 견뎌내야 할 것이다. 여행 직후, 휴대폰 사진첩의 행복했던 시간들을 뒤적거린다. 한 달 뒤에도, 반년 뒤에도 인스타그램에 그때의 행복했던 추억을 스토리로 올리게 될 것이다. "또 가고 싶어 ㅠㅠ!"라고 하면서.

하지만 다시 휴가가 2달 전으로 다가왔을 때, 이전 여행의 추억들을 책장에서 깡그리 정리해버린다. 그리고 두 달 뒤에 있을 아주 신나고, 재밌고, 환상으로 가득할 여행 계획을 짜는데 혈안이 된다. 아주 행복한 상상을 하는 두 달을 보내고,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순간인, 여행 출발일을 다시 또 마주하게 된다.

이렇게 우리는 삶이 진부하다고 느껴질 때, 반복되는 일상에 답답해질 때마다 맛있는 여행의 기억을 야금야금 먹으며 살아간다. 정말로, 여행은 인간이 삶을 살아가게 하는 가장 값비싼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여행의 단면, "


사실 알다시피 여행도 꽤나 힘들다. 국내 여행은 그렇다 쳐도, 해외로 여행을 가면 온갖 알 수 없는 언어들과 문자들, 그리고 헷갈리는 길과 지하철의 방향 등 엄청나게 많은 역경이 도사리고 있다. 혼자 여행을 떠나왔는데, 내가 길치였다면. 오 마이 갓! 나는 이 나라의 경찰서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여행의 행복한 기억들을 주로 떠올리지만, 그 안에는 온갖 크고 작은 문제들이 우리를 괴롭혔던 적도 있다. 갑자기 택시비를 두배로 내라고 한다던가, 지나가는 귀엽고 신기한 부엉이와 사진을 찍어보래서 찍었더니 돈을 내라던가 하는 황당하고도 어이없는 일들도 많이 벌어진다. 그럴 때마다 여행의 행복했던 기분은 땅 속으로 곤두박질치기도 한다. 하지만 여행이니까, 우리는 간신히 마음을 붙잡는다. 내가 일 년을 기다려왔던 여행을 이렇게 망칠 수는 없으니까!



"삭제했던 기억들"


우리가 여행을 떠났을 때 삭제했던 기억들엔 무엇이 있을까. 꽤 많은 여행을 다녔지만, 우리가 그 여행들을 낱낱이,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은 그때의 시간을 담은 사진과 동영상들이다. 남는 건 사진뿐이기 때문에, 쉴 새 없이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댔던 우리, 하지만 기분 나쁠 때 셔터를 눌렀던 기억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여행 앨범 속에는 죄다 행복하게 웃고 있는 사진뿐이다. 아! 울고 있는 사진도 있다. 너무 재밌어서 배꼽이 빠질 것 같아 울고 있는 사진들이 말이다.



"혼자 여행"


인생은 혼자다! 살면서 혼자 여행은 꼭 한번쯤 해보는 것이 좋다. 해외가 부담스럽다면 국내라도, 국내 여행으로도 충분하다. 나는 혼자서 국내 여행을 다녀왔다. 참, 외롭고 쓸쓸한 여행이 될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다. 혼자 하는 여행도 혼자 하는 맛이 쏠쏠하게 느껴진다. 4일 동안 혼자 국내 여행을 다녀왔는데, 아주 만족스러운 여행이었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기억 속에서 삭제했던, 혼자 여행에 대한 어두운 단면이다.


혼자 떠나는 여행의 단면, 사실 엄청 외롭다. 친구가 없어서 외롭다기보다는, 혼자 어디를 간다는 것이 외롭고 두렵다. 괜히 혼자 떠났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끝장이니까. 가까운 사람에게 연락을 자주 하게 된다. "야 혹시, 나 20분 안에 연락 안 되면 신고 좀 부탁해..." 하고 관광지로 향하는 좁은 골목길을 들어간다 던 지 말이다. 그리고 4일간의 여행 중 첫날에는 정말 대화할 일이 없다. 대화할 일이 없으니 말할 일도 없다. 6시간을 넘게 입을 내리 다물고만 있으니, 입에서 나는 단내가 인중을 타고 올라온다. 그래서 나는 혼잣말이라도 열심히 했다. "아, 여기가 그 관광지구나... 이쁘네...". 민속촌의 그네를 혼자 타면서 "워후~ 재밌네...", 안동의 부용대로 흐르는 나룻배를 놓쳐 굽이치는 낙동강을 바라보며 "아, 나 정도 수영실력이면 헤엄칠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면서 자기 자랑을 한다던가. 상황이 안 좋아지면 혼자 투덜대기도 했다. 어떤 식으로든 말이라도 좀 하고 싶어 하루 종일 주절주절 거렸던 기억이 난다. 혼자 여행하면 대화할 일이 거의 없다.

밥 먹을 때도 마찬가지다. 어디가 맛집인지 의논할 사람이 없다. 길을 걷다가 방송에 출연한 맛집이라는 플래카드를 보고 그냥 들어섰다. 여행 온 사람들로 채워져 있는 가게 안에 홀로 앉아 물회를 시켰다. 말 한마디 없이, 혼자 여행을 다니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는데 나는 왜 아무 생각이 없을까. 음식이 나올 때까지 멍하니 메뉴판의 음식들을 바라봤다. 우웩, 난생처음 먹어보는 물회인데 맛이 너무 시큼하다. 하지만, 원래 이 맛으로 먹는지, 이게 맛있는 물회인 건지 의논할 사람이 없다. 숟가락을 내려놓고 밥 집을 나섰다. 그리고 바로 옆에 보이는 닭강정 집에서 끼니를 때웠다.


하지만 혼자 하는 여행은 너무나도 자유롭다. 내가 가고 싶은 길, 가고 싶은 곳, 쓰고 싶은 시간에 제약 같은 것은 없다. 다리가 아파서 쓰러질 것 같으면, 길거리의 벤치에 앉아 잠시 쉬면 된다. 오늘 갈 계획이었던 미술관이 가고 싶지 않다면 아쿠아리움을 가도 된다. 하루 종일 바다만 바라보고 싶다면, 바다 앞에 숙소를 잡고 하루 종일 바다만 보고 있어도 아름다운 여행이다. 이런저런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딱히 생각할 필요 없다. 생각하지 않는 게 진정한 힐링이다. 모래사장에 앉아 파도 소리를 들으며 바다를 바라보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다 보면, 아주 성공적인 여행을 했다는 생각이 들것이다. 맛없는 것도 많지만, 맛있는 것도 많다. 하나만 먹어봐도 되고, 이것 저것 다 먹어봐도 뭐라고 할 사람이 한 명도 없다. 오롯이 나를 위한, 내 세상의 여행인 것이다. 자유로운 여행을 가고 싶을 때는, 고독하고 자유로운 여행은 역시 최고의 힐링 여행이다.



"둘이 여행"


가장 친한 친구와 여행을 간다는 것은 아주 설레는 일이다. 친한 친구와의 소중한 추억이 또 하나 생긴다는 것이니까. 하지만, 함께 여행을 간다는 것은 친구의 더 깊숙한 부정적인 부분까지 겪게 한다. 세상에 완전히 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은 없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 할 지라도, 분명히 서로에게 잘 맞지 않는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둘이서 여행을 간다고 하면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여행을 가면 한번쯤은 싸우게 된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니까. 한 때 사진에 목멨던 적이 있다. 역시 남는 건 사진뿐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는 관광지마다 서로 열심히 사진을 찍어줬다. 친구의 인생 샷을 위해 다리를 부들부들 떨어가며 어려운 자세지만 환상적인 구도를 만들어 친구의 사진을 찍어줬다. 하, 그런데 친구는 왜 이리도 사진 찍는 법을 모르는지. 성당의 십자가가 잘려 있고, 좌우는 맞지 않아 비대칭으로 흘러내리려고 한다. 10장을 내리찍어도 마음에 드는 사진이 한 장 없다. 짜증이 안 날래야 안 날 수가 없다. 이번에는 취향이 달라버린다. 철저한 계획 속에 빨리빨리 움직여야 하는 나와 달리, 친구는 빠른 여행의 움직임에 꽤나 힘들어한다. 대부분 계획을 짜는 사람은 철저한 계획 속에 빨리 움직이는 친구라, 힘들다고 하기도 눈치 보일 것이다. 이런, 둘이 여행 왔는데 서로 갈라설 수도 없다. 5일간의 여행이었지만, 감정의 골은 3일 만에 터지고 말았다. 행복한 여행을 와서 서로에게 서운한 소리를 하고 싶지 않았지만, 입에서는 봇물이 터지듯 서운함이 터져 나왔다. 여행 오기 전까지는 친구가 되고 나서 한 번도 싸웠던 적이 없었는데, 여행이 친구 관계를 망치는 걸까.


하지만 그만큼 상대방 이해할 수 있고 관계를 깊게 만들 수 있는 것 또한 여행이다. 아무리 싸웠던 여행이라도 여행은 잘 끝나기 마련이다. 서로의 행복한 여행을 망칠 수는 없기 때문에, 금방 서운함을 풀고 화해하려고 노력한다. 게다가 집과 아주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이곳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내 친구뿐이다.

여행을 끝내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 무렵, 친구와 함께 다녀왔던 여행 앨범을 다시 열었다. 다시 보니, 친구가 삐뚤빼뚤 찍어 준 사진이 너무 웃겼다. 왜 이렇게 못 찍는지 참,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남는 건 사진뿐이다"라는 말에 중요했던 것들은 카메라의 구도나, 각도 같은 것들이 아니었다. 사진 속에 들어있는 우리들의 시간이었다. 그 삐뚤거리는 사진 몇 개로 우리는 오랜 시간을 깔깔대며 웃었다. 그때 그 시간 속의 우리가 너무 귀엽다. 왜 이렇게 여행을 철저한 계획 속에 빨리빨리 다녔는지 싶다. 하긴, 짧은 기간에 모든 것을 다 보고 싶은 마음을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사실 한 번만 올 것도 아닌데, 다음에 와서 또 봐도 되는데 그때는 그 한 번의 여행이 전부 같았다. 다음 여행은 대충 던져 놓은 계획 속에서 놀아야겠다. '오늘은 바다를 갈 거야' 하면 맥주 한 병을 사들고 바다를 거닐며 뜨거운 햇살을 하루 종일 몸에 담을 테다. '번화가를 즐길 테야!'라고 한다면, 친구와 맛있는 맛집들을 찾아다니며 혓바닥 위에서 행복이 펼쳐지게 만들 테다. 그리고 분위기 좋은 곳을 전전하며 새벽을 보내고, 다음날은 수영장이 있는 아주 편안한 선베드에서 칵테일을 마시며 호캉스를 즐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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