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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자 Jan 26. 2020

1세대의 전멸

(동생과 관련된 책 내용은 현재 작성 중으로 추후 브런치 북으로 목차별 정리할 예정입니다)



설을 이틀 앞둔 평일 점심, 취재원과 식사 도중 어머니께 전화가 온다.

평소 이 시간대에 전화 할리가 없다 보니 무조건 받아야겠다 싶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대..."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에는 슬픔이 녹아 있었다. 외할머니는 총 6명의 자식을 낳으셨는데, 그중 엄마는 막내딸이다. 나는 취재원에게 양해를 구하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TVN <응답하라 1988>에서 덕선이(혜리 역)가 언니로부터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 장면 [사진=TVN 캡처]


버스에서 외할머니의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슬펐다. 하지만 그렇다고 큰 슬픔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1년 반 전 동생의 죽음을 지켜보며 죽음의 고통을 그때 모두 치버렸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더욱이 내게 외할머니와 추억이 많지 않아서일 것도 같다. 외할머니에게 자식이 많다 보니 손주도 당연히 많았고 나는 학업 등을 이유로 외갓집에 자주 들르지도 않았다.


게다가 외할머니는 전형적인 '9988234'가 아닌가. 9988234는 99세까지 팔팔(88)하다가 이틀(2) 아프고 세 번째(3) 날 죽(4)는 것을 의미한다. 외할머니는 98세의 나이로 어디 아프신 데 없이 노환으로 단기 기억상실만 있으신 상태였다. 그러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지며 머리를 다치셨고 결국 돌아가셨다. 세상의 온갖 복을 누리고 오래 산 사람의 상(喪), 즉 호상(好喪)이다.


그러나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사실 그 이유는 바로 엄마라는 존재 때문일 것이다. 근래 2년 내 자식상에 이어 부모상까지 감당해야만 하는 엄마가 떠올랐다. '도대체 엄마가 전생에 뭘 얼마나 잘못했길래, 이러한 시련을 주신단 말인가...' 그동안 내게 작은 소원이 있었다. 부디 외할머니상이 동생상과 시간차를 둔 채 이뤄지기를, 외할머니가 더 오래 사셔서 자식 잃은 어머니가 덜 다치셨으면... 그런 소원들 말이다.


더욱이 외할머니의 부재로 인한 1세대의 전멸(全滅). 이 역시 나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외할아버지를 처음으로 친할아버지, 친할머니가 이어 세상을 떠나셨다. 유일하게 계시던 외할머니까지 돌아가셨으니 '할아버지-할머니'라인은 모두 사라졌다. 이제 그 다음은 부모님을 비롯해 작은 아버지, 큰삼촌, 외숙모 등 2세대 차례다. 막연 추상 속에 존재했던 죽음의 그림자가 1세대의 전멸로 인해 예고도 없이 나를 급습한다. 외할머니의 죽음으로 '부모님의 죽음'은 2번째에서 1번째로, '나의 죽음'은 3번째에서 2번째로 줄어들었다. 할머니의 죽음은 조만간에 찾아올 내 부모님과의 이별, 그리고 나의 죽음도 함께 느끼게 한 것이다.


[사진=픽사베이]



결국 외할머니와 추억거리가 많지는 않지만, 외할머니는 존재 그 자체만으로 내게 보이지 않던 거대한 방패막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내가 태어났을 때 외할머니는 갓 태어난 나를 보며 분명 세상 행복한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어릴 적 뛰어다니는 나의 모습을 보며 분명 나를 사랑스러워했을 것이며, 내가 어엿한 직장인이 됐을 때도 분명히 자랑스러워했을 것이다. 기억도 본 적도 없는데 어떻게 아느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대대손손 피로 이어져 내려오는 가족이라는 테두리와 그 안에서 꽃 피워진 사랑이 이를 입증할 게다.


버스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내 얼굴을 자세히 쳐다보니 어머니의 형채가 떠오른다. 그리고 이어 외할머니의 모습도 이어지며 1-2-3세대의 얼굴이 하나의 모습으로 오버랩된다. 나는 어머니의 자궁에서, 어머니는 또다시 외할머니의 자궁에서 그렇게 생명이 이어져왔다는 분명한 사실을 다시 한번 직시한다. 외할머니의 죽음은 단절이 아닌, 어머니의 삶과 더 나아가 나의 삶으로 고스란히 이어지는 것이다. 죽음은 소멸과 단절이 아닌, 탄생과 연결인 셈이다. 그렇게 나는 집단적 생명의 연결고리 한가운데 서있다.


각종 생각에 빠질 지음, 버스에서 노랫소리가 흘러나온다.


노을 <함께>

살아간다는 건 이런 게 아니겠니
함께 숨 쉬는 마음이 있다는 것
그것만큼 든든한 벽은 없을 것 같아
그 수많은 시련을 이겨내기 위해서


동생에 이어 외할머니도 그렇게 나의 곁을 떠나갔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을 테다. 이 슬픔마저 인생이고, 여전히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숨을 쉬며 더 든든한 벽을 만들 테니까. 비록 눈물이 나왔지만, 외할머니 유산이 이렇게 호사스러울진대 내가 죽음을 슬퍼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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