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게소에 나타난 멧돼지
[이야기를 위한 이야기] 단편소설 01
두 사람을 태운 승용차 한 대가 서울행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어섰다. 누구나 휴게소 바로 앞, 화장실과 가까운 자리에 주차하고 싶어 하니까 역시 가장 앞쪽 라인은 오늘이 평일이고 여기가 규모 작은 휴게소임을 감안하더라도 주차 자리가 다 찼을 확률이 높겠지 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민수는 관성적으로 앞쪽 라인으로 차를 움직이고는 이내 빈자리를 찾느라 줄지어 선 차량들 사이에 갇혀버렸다.
나 그냥 먼저 내릴 테니까 알아서 주차해. 진희가 신경질적으로 말하고는 차에서 내렸다.
화장실을 갈 건지, 간다면 화장실 앞에서 기다릴 건지, 보통은 휴게소 간식거리를 꼭 사는 편이니 휴게소를 둘러볼 건지, 전부 안 알려주고 내릴 거라면 핸드폰이라도 들고 내리던지. 하는 생각에 민수 역시 불쾌했다.
고집 끝에 적당한 곳에 주차를 성공한 민수는 여자 화장실의 긴 줄을 쓱 훑어보고 볼일을 보러 들어갔다 나왔다. 진희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지만 화장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자신을 찾아올 것이란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냥 우두커니 기다리자니 왠지 자존심이 상했다. 이다음 일정을 생각하면 늘 그래왔듯 진희의 기분을 달래야 편해질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존심을 조금이라도 세우고 싶은 민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잡화 코너를 구경하고 돌아왔다. 자존심 운운하기 우스운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뭐 하자는 건데!
자존심을 세우느라 자신을 찾지 않고 여유롭게 구경이나 하고 다닌 민수의 심리를 귀신같이 알아채고 기다리던 진희가 매섭게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대체 어디 있었어?라고 묻는 게 더 상황에 맞는 질문이지만 그 건 왠지 민수를 애타게 찾아 기다린 것 같아 진희는 싫었다. 진희도 자존심을 조금 세우고 싶었다.
아니 내가 뭐 하자고 했나? 화장실 갔다 왔는데.
민수는 진희가 정말 뭐 하자는 거냐고 묻는 게 아니란 걸 알지만 뭐 하자는 거냐니, 내가 뭘 어쨌다고 싶은 마음에 몹시 황당하고 어이없다는 말투와 표정으로 진희를 자극하듯 대답했다.
더욱 도끼눈을 뜨고 기가 차 따져대는 진희를 보는 민수는 이젠 화가 나기보다 창피하고 난감했다. 분명 주변 사람들은 관심 없는 척하지만 둘을 의식할 게 분명했고, 어떤 커플은 흥미롭게 서로의 팔짱을 꼭 끼며 구경할 것만 같았다.
진희의 말에 민수가 대꾸하지 않자 둘은 서로의 뒷 허공에 시선을 옮겨 말없이 대치했다. 민수는 갑자기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대충 그만하자 섣불리 화해를 시도했다간 더 골치 아파질 게 뻔했고, 이런 와중에도 티맵의 예상 도착 시간이 한없이 늘어나는 것 같아 모든 것이 지긋지긋해진 것이다. 민수는 이 상황을 깨 줄 다른 상황이 생겼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 들고 진희는 민수가 이 상황에 집중을 해줬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때 저 멀리서 웅성웅성 긴장과 호기심이 섞인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둘은 무슨 일인지 궁금했지만 서로에 대한 예의인지, 고집스러운 자존심인지 모를 마음에 자리를 버티고 서있었다.
공격해 온다! 피해요! 으아악! 하는 비명이 사람들 사이에서 터졌다.
무의식적으로 둘은 서로를 향하던 시선을 거두고 위험한 대상을 좇았다. 멧돼지였다. 민수는 멧돼지를 보고는 집채만 하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둘이 같이 살 신혼집에 비하면 실제 집채만 하진 않고 우리 둘이 살 건데 4인용으로 하니, 애도 낳고 손님도 올 건데 6인용으로 하니, 청소 편하고 고급스러운 세라믹으로 하니, 고급이라면 역시 감각 있게 우드가 맞니 언쟁했던 식탁 크기 정도일 뿐이지만 어쨌든 저 멧돼지를 보고 분명 집채만 하다고 느낄 터였다.
겨우 식탁 고르는 일에 서로 조금씩 빈정이 상하던 중 오빠는 감각이 없다고 진희가 비웃음 섞인 말을 던지자, 욱한 민수는 너는 퍽이나 감각이 있어서 회사에서 매일 야근하냐고 맞불을 놓고 디자이너인 진희는 내 실력과 상관없이 클라이언트가 지랄 맞은 건데 여태 날 이렇게 생각해 왔냐며 지난 3년의 연애까지 들먹였다.
제에발 오버 좀 하지 마.
니가 이런 놈일 줄 몰랐다. 하긴 네 말 대로 내가 눈이 없으니 너랑 결혼하는 거겠지.
그래 그래서 우릴 보고 끼리끼리 만났다고 할 수 있는 거야 진희야.
자폭적이고 자조적인 말싸움 도중 원래 들리기로 했던 휴게소에 들어선 아까의 상황으로 민수는 돌아가고 싶었다.
멧돼지를 발견한 진희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지만 민수는 또 다른 종류의 자존심 때문에 크게 동요하지 않으려 했다. 그래도 민수 눈에는 왠지 멧돼지가 잔뜩 흥분한 상태로 보였다. 소리 지르며 혼비백산 뛰어다니는 사람들은 멧돼지를 자극하기 딱이었으나, 멧돼지는 잘 차려진 여러 공격 대상들 중 누구를 먼저 고를지 고민하는 듯이 멈춰 있었다. 멧돼지는 뜨거운 콧김을 뿜어내며 그 거대한 몸 깊은 곳에서 흥분을 최고치로 끌어올리는 듯 몸을 육중하게 떨었다. 그 사이 사람들은 식당가 안으로, 화장실로, 각자의 차로 일사불란하게 흩어져 몸을 피했다. 쓸데없는 자존심 싸움으로 위험을 피할 타이밍을 놓친 미련한 두 사람만이 여전히 멧돼지에게 가장 가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아 씨발. 그제야 민수는 자신도 모르게 욕설을 뱉었다.
안전한 곳에 숨은 사람들이 곳곳에서 두 사람을 걱정스럽게 지켜보기 시작했다. 이쪽으로 와요 빨리, 피해요, 어머 어떡해 같은 소리들이 겹쳐 들려왔지만 이미 몸이 굳어버려 망했다는 생각에 가득 찬 둘에게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멧돼지가 마침내 폭주하기 시작했다. 미끄러운 타일 위로 그 집채만 한 몸을 견디기 어려워 보이는 작은 발이 자꾸만 헛디뎌져 멧돼지는 더욱 흥분했다. 일직선으로만 달려드는 멧돼지의 특성 때문에 유연하게 방향을 틀지 못하고 어묵핫바 코너에서 쿵, 알감자 코너에서 쾅, 호두과자 코너에서 쿵쾅! 스낵 코너 점원들은 안쪽 벽으로 찰싹 붙어 공포에 떨고 있지만 적어도 멧돼지의 우선 공격 대상은 아닌 듯했다.
오빠 뭐 해!
티비에서 봤어. 우선 덩치가 커 보여야 하니까 우리 둘이 꼭 끌어안아야 돼.
그럼 세게 안지 마, 몸이 납작 해지잖아.
멧돼지보다 몸집이 큰 포식자처럼 보이려 서로를 넉넉히 안은 민수와 진희는 굉장히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아까와는 달리 아무도 둘의 그런 모습을 신경 쓰지 않았다. 겨우 일직선으로 달릴 자세로 서게 된 멧돼지는 돌진하려는 행동을 멈추고 두 사람을 가만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진희는 멧돼지와의 눈 맞춤에 얼어버릴 것만 같았다.
신고는 했어요. 금방 도착하긴 한다지만 우선 그 멧돼지 좀 좁은 곳으로 몰아봐요! 어디선가 웬 아저씨가 외쳤다.
여기 휴게소 직원은 뭐 하고요! 좀 도와주세요! 황당한 민수와 진희도 두렵고 떨리는 목소리로 번갈아 외쳤다.
아 저희가 멧돼지의 뒤쪽으로 갈 수가 없어요. 그쪽 방향의 문이 개폐 불량이에요. 그리고 119 대원이 하는 말이 멧돼지를 최대한 자극하지 않게 건물 안으로 피하라고 해서.. 두 사람의 등 뒤로 무책임한 휴게소 직원이 말했다.
우선 그놈을 좀 몰아줘봐요!
걔네들이 생각보다 멍청해요! 눈이 어두워요 걔들이!
무책임한 직원과 여전히 어디에서 말하고 있는지 모를 멧돼지 전문가 같은 아저씨의 쿵짝이 민수와 진희를 밀어붙였다.
이리저리 부딪히느라 휘청거리던 멧돼지가 잠시 숨을 고르는 건지 정말 두 사람의 몸집을 보고 겁을 먹은 건지 거친 숨소리만을 내며 가만히 있자 민수와 진희는 자신들도 모르게 멧돼지를 몰아넣을 곳이 저기 멧돼지 뒤로 보이는 무인로봇카페를 말하는 건가 생각하며 머릿속이 복잡했다.
진희는 가장 가까운 스낵코너 매대에 봉지째 쌓여 있던 뻥튀기 한 줄을 집어 들었고 민수는 오른쪽 왕만두 코너에서 청소용 빗자루를 건네받았다. 둘은 허우적대며 멧돼지의 시야를 교란했고 여전히 한쪽 팔을 서로에게 감싼 채로 아주 큰 몸집을 표현하고자 하는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엉거주춤 나아갔다.
허무하게도 멧돼지는 순순히 뒷걸음질로 물러나 바깥으로 열려 있던 무인로봇카페의 문에 부딪히곤 혼자 화들짝 놀라 카페 안으로 우당탕탕 쑈를 하며 숨어들었고 둘은 재빠르게 쫓아가 문을 닫아버렸다. 그제야 숨어있던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묵직한 물건을 하나씩 문 앞에 쌓고 안도의 한숨을 터트렸다.
누군가 시작한 박수에 두 사람은 얼떨떨했다. 갑자기 영웅이 되었으니 괘씸한 휴게소 직원이 건네주는 물을 어쩔 수 없이 고맙게 받아 마시며 평정심을 찾아야 했다. 휴게소 안 사람들 모두 태어나 이렇게 공포스러웠던 적이 없었지만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던 탓에 그 누구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뻥튀기로 멧돼지와 맞섰던 진희 역시 울지는 않았는데 긴장이 풀리자 내심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민수가 눈치 빠르게 진희를 걱정하고 진희도 상태를 순순히 대답하던 중 이 모든 상황은 단 7분 만에 일어난 일로, 아무리 멧돼지가 출몰했어도 심각했던 두 사람의 자존심 싸움은 잊히지 않았다는 걸 깨달은 민수와 진희는 또 다시 시선을 서로의 뒤편 허공에 두고 말았다. 어색한 둘 뒤로 빠르게 도착한 구조대원들이 신속하게 상황을 정리하고 있었다.
잠시 후 누군가 둘에게 다가와 구조대원이 그러는데 멧돼지는 이미 한차례 교통사고를 유발하고 내상을 입은 채로 이동하던 중 휴게소로 오게 됐고 큰 덩치와 다친 상태에도 공격적인 태도가 극에 달한 것으로 보아 새끼를 배었을 수 있는데 다행히도 두 분께서 멧돼지를 가둬둔 덕에 사살하지 않고 마취해서 데려간 것이라고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며 덧붙여 자신은 휴게소 상황을 모두 본 사람인데 직업이 기자라며 편하신 시간에 용감한 시민 인터뷰를 요청하고 싶으니 수락해 달라는 것이다.
우와 멋있다. 형! 저 아까 형 모습 동영상으로 찍어 놨어요 기자님께 보내 줄게요!라고 까불거리는 남자 아이를 보고 민수와 진희는 더욱 당황했다. 으휴 빨리 가야 돼. 늦었어! 라며 아이의 엄마가 아이를 끌고 가자 그 뒤로 기자가 민수와 진희를 의식하며 능청스럽게 덧붙였다.
괜찮아. 휴게소 CCTV를 사용하면 돼.
기자는 노련하게 두 분이 어떤 관계신지 어디 사시는지만 먼저 짧게 묻겠다며, 오 그럼 서로에게 결혼을 결심하게 된 포인트를 칭찬 삼아 말씀해 주시면 정식 인터뷰때 하실 답변을 저희가 정리해 드릴게요 하고는 자연스럽게 기자수첩에 메모를 하기 시작했다. 꼼짝없이 두 사람이 말할 차례가 됐다.
진희는 뭐든 침착하고 현명하게 행동해서 제가 결혼을 결심하게 된 것도 있어요.
진희의 매력을 칭찬한 민수의 말이 인터뷰를 수락한다는 대답이 되어 내친김에 구체적인 일시까지 잡아낸 기자는 곧 두 사람의 연락처를 받아 적고 명함을 건넨 뒤 자리를 떠났다. 멧돼지로 인한 소동 현장은 일사불란하게 정리되었고 모두가 각자의 길로 떠났다.
차에 탄 진희는 아직 남아있는 애매한 자존심을 떠올리며 괜히 차갑게 말했다.
침착은 무슨. 난 정말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 오빠는 군대에서 봤을 거 아니야.
나도 처음 봐. 근데 그 멧돼지 아까 너 화낼 때랑 똑같았어.
철없는 민수의 말에 진희가 어이없는 실소를 터트리자 민수는 자신이 분위기를 전환하는 데 성공했다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게 진짜 장난하나 싶다가 그 모습이 또 귀엽게 느껴진 진희는 어차피 인터뷰로 우리가 곧 결혼할 사이라는 것을 전국에 알리게 될 텐데 헤어질 것도 아니니 그냥 싸우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희도 화해의 말을 건넨다.
난 오빠가 나 끌어안을 때 무서워서 안긴 줄 알았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