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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Mar 02. 2020

20년째, 염색이 일상

염색을 하고 왔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염색을 한다. 염색을 하고 난 당일은 새까만 머리가 어색하다. 다음 날부터 눈에 익기 시작함과 동시에 머릿속에서는 반란이 시작된다.


염색과 동시에 흰머리가 규칙적으로 솟아오른다. 그때부터 가려움증이 시작된다. 보아주기는 힘들지만, 아예 흰머리가 온통 뒤덮으면 가려움증이 덜한 것 같다. 조금씩 흰머리가 올라올 때는 가려움증 때문에 신경이 쓰인다. 어느 순간 머리를 벅벅 긁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흰머리는 여자는 보통 42살부터 나온다고 한방에서는 얘기한다고 한다. 나는 대략 그보다 10년 전부터 흰머리가 나왔다. 처음 시작은 새치처럼 특정 부위에 집중적으로 나왔다. 당시는 염색을 한 번 하면 감출 수 있을 때까지 버티며 염색을 미루다가 더는 감추기 어렵게 되었을 때 다시 염색을 하곤 했다. 나이도 많지 않았기에 색상 선택도 자유로웠다. 염색을 해야 하니 기왕이면 이런 색도, 저런 색도 해보자며 다양하게 머리색을 바꾸곤 했다.


머리가 빨리 세는 것은 집안 내력이다. 친정에 형제들이 모두 모여 술자리를 가지며 이야기를 나눌 때, 우연히 각자의 염색 이력에 관해 말이 나왔고, 이제 막 결혼한 조카까지 그 말을 거들으며 자신의 고충을 말할 정도로 모두가 같은 어려움을 겪었던 사연을 얘기했다. '그놈의 피는...', 이라는 생각을 했고 나만의 괴로움이 아니라는 것에 슬며시 안도하기도 했다.


염색 초기에는 3개월에 한 번 정도 주말을 이용해서 펌과 함께 했다. 펌 세 시간에 염색 한 시간, 지루했지만 긴 시간을 미용실에서 보낼 수밖에 없었다. 나이가 들어가며 염색 주기가 빨라졌다. 흰머리가 표 나게 많이 나왔고 범위도 넓었다. 그때부터 염색만을 목적으로 미용실을 한 달에 한 번씩 찾게 되었다. 같은 처지의 지인과 염색 얘기를 한 적이 있다. 한 달에 네 번의 주말에, 한 주는 펌 하고 한 주는 염색하고, 남은 두 주는 경조사 불려 다니면 편하게 쉴 수 있는 주말은 없는 것 같다고. 그 말에 크게 공감했다.



미용실에서 보내는 시간은 지루하다. 그러다 보니 가는 것 자체도 귀찮아서 집에서 해볼 생각으로 염색약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사놓은 것만도 대여섯 종류가 넘고 종류별로 절반 이상씩은 남아있다. 홈쇼핑의 특성상 대량 주문에 따른 결과였다. 집에서 혼자 염색을 하는 것은 항상 결과가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홈쇼핑에서, 간편하고 빠르게 자연스러운 머리색이 나올 수 있다고 쇼호스트가 말하면 그들의 말에 설득당한다. 어느새 주문 완료. 그렇게 주문해서 한두 번 사용하고 남은 염색약들이 버리지도 못한 채로 한쪽에 쌓여 있다.


내가 하는 염색은 어설프다. 매번 약을 흘려서 거실 바닥이 군데군데 까맣게 때가 낀 것처럼 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긴 염색 시간의 지루함을 핑계로, 또는 다른 이유로 미용실을 피하곤 했었는데, 몇 번의 자가 염색 실패를 보던 남편은 그냥 해주는 곳에서 전문가에게 맡기라고 말하곤 했다.


20년 가까운 염색 기간 동안 미용실을 수십 군데 전전했다.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는 이유는 가격 흥정 때문이다. 염색을 하러 왔다고 하면 세 단계로 나누어 가격을 제시한다. 일반약, 천연 재료, 그보다 위의 특정 브랜드. 그것이 끝나면 머릿결이 상했다며 다시 영양을 등급(가격)에 따라 단계별로 제시하고, 그 후엔 코팅이 필요하다며, 하고 나면 머릿결이 훨씬 스타일이 산다며, 그것도 역시 단계(가격)와 색상을 고르게 했다.


머리를 내놓고 벌이는 긴 흥정의 시간이 싫었다. 머릿결이 상할 수 있다고 말하는데, 게다가 염색을 할수록 뻣뻣해지고 머리 끝이 갈라진다는데, 그 누가 자신의 머리를 걸고 가장 저렴한 염색약을 선택하겠는가. 한 번에 가격을 제시하고 최선의 서비스를 해주면 되는 것을 매번 줄다리기를 하는 듯한 그 기분이 묘하게 불쾌했다. 마치 '돈 있으면 이것도 하면 어때? 없으면 말고...', 약 올리는 듯했다.


때문에 최근 몇 년을 제외하면, 마음이 불편하지 않는 곳을 찾아서 매번 다른 곳을 전전했다. 그러다 정착한 곳이 요즘 열심히 찾는 염색방이다. 천연 재료로 염색만 해 주는 곳, 가격도 한 단계다. 한 번만 가면 사람 기억도 잘 하고 염색 경험 많은 주인장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알아서 척척 해주신다.


가격도 저렴하니 찾는 사람들도 많다. 고객층은 간혹 젊은 사람도 있지만 주로 50대 이상, 나이 많이 드신 어르신들이다. 서너 명씩 대기하고 있는 것은 기본이고, 알아서 옷도 갈아입고 자기 순서가 되면 알아서 거울 앞에 앉고, 차도 알아서 마시고 드라이도 각자 한다. 염색약을 다 바르고 난 후 20분 후면 머리를 감겨준다. 순서를 기다리는 시간을 감수할 만큼 염색 시간도 빠르다.


염색은 늘 해오던 것이어서 이제는 일상처럼 익숙해졌다. 한 달에 한 번씩 새카만 머리가 주는 상쾌함을 즐기면 조금 더 젊어 보이게도 해 주니, 일상의 작은 즐거움으로 염색하는 수고를 상쇄할 수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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