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에 앉으면 습관적으로 TV 리모컨을 잡는다. TV를 켜고 채널을 돌린다. 홈쇼핑과 지상파, 종편, 케이블 등으로 채널이 빠르게 바뀐다. 요즘 같은 때는 코로나와 태풍으로 인한 뉴스특보가 많고 나머지는 모두 쇼·오락프로그램이다. 그중 트로트로 대표되는 음악 관련 방송과 먹는 것이 소재가 되는 방송이 쇼·오락프로그램의 절반 이상이다. 먹고 즐기기 위해 사는 세상답게 온통 먹고 즐기는 방송들.
요즘 재미있게 보는 프로그램은 MBC 주말 예능 <놀면 뭐하니>다. '본캐(본래의 캐릭터)', '부캐(부 캐릭터-평소의 나의 모습이 아닌 새로운 모습이나 캐릭터로 행동할 때)'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낸 방송답게 화려한 부캐의 향연이 펼쳐진다. 넋을 놓고 본다. 서너 번째의 재방송 시청임에도 처음 보는 것처럼 TV 화면을 쳐다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 보면 내가 TV를 보는 것인지 TV가 나를 보는 것인지 모를 지경이다.
잠깐 쉬겠다고 앉았는데, 정신을 차리면 시간이 훌쩍 지나있다. 목을 길게 빼고 TV 앞에 앉으면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나면, 리모컨을 쥐고 뒹구는 나의 행동이 묘하게 거슬린다.
'부캐', 이름도 생소한 그 말이 나를 끌어당겼다. 나의 본캐와 부캐를 따져보기도 했다. 누구나 하나쯤 있어야 할 것도 같았고 어른들의 역할놀이가 유치하지만 재미있었다. 이미 부캐로 성공을 이룬, 본캐가 확실한 유재석과 이효리, 비가 만나 성공 신화를 이루어가는 과정이 신기하고 재미있었던 것 같다. 그게 무려 두 달 정도의 시간 동안 길게 이어졌다.
다른 채널에서는 개그맨들이 가수 활동을 한다. 역시 부캐의 활약상을 보여준다. 너나없이 부캐를 만들어 천연덕스럽게 새로운 캐릭터를 연기한다.
연예인들의 부캐는, 똑똑한 본캐에 이은 더 똑똑한 부캐가 된다. 잠깐 활동하며 화려하게 입지를 굳히고, 벌이도 인지도도 높이고 난 뒤 다시 똑똑한 본캐의 일상으로 빠르게 복귀하는 방식이다. 그리고는 부캐의 이미지를 덧씌워 본캐의 활동도 빛을 발하는 시너지를 얻는다. 연예인에게 부캐는, 지금과 같은 부캐 전성시대에는 긴 생존을 위한 필수 요소로 생각될 법하다. 누구든 따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만들어진 부캐는 스토리를 입는다. 출신과 성장 배경을 만들고 성격적 요소까지 장난스럽지만 나름의 개연성을 부여한다. 이야기의 힘은 캐릭터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거기에 제작진의 세심한 연출까지 이어지면 순식간에 시청자를 끌어당긴다. 한번 좋은 이미지로 다가온 방송은, 무작정 채널을 돌리다 나오면 다시 보게 된다.
연예인들의 부캐 성공신화를 넋을 놓고 보다가 조금 다른 생각을 했다. 연예인들의 부캐 활약을 보며 일반인들도 여러 직업을 본캐와 부캐로 나누기도 하는 것을 접한 적이 있다. 방송의 영향력이라니. 일반인들의 본캐 부캐는 연예인들의 그것처럼 화려하지 않다. 그들은 시간 단위로 하루를 쪼개서 여러 캐릭터를 산다. 생계형 일자리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자랑처럼, 낮에는 안정적이고 번듯한 직장에서 일을 하고 퇴근 후에는 유튜브 활동이나 작가로, 또는 다양한 활동을 통해 본래의 직업 이상의 성취와 보람을 얻는다는 사람의 이야기도 나온다. 그들에게 부캐는 이른바 자아실현의 출구가 된다. 그들의 부캐 성공도 역시 유재석만큼 똑똑한 본캐가 있어서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똑똑한 본캐가 있어야 부캐도 성공한다는 말은 맞다.
그렇지만, 방송에서의 부캐 놀이는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다. 가상의 캐릭터 놀음에 슬슬 지쳐가는 중이다. 처음에 신선했던 것이 이제는 식상하다. 비슷한 포맷으로 다른 방송에서도 보인다. 따지고 보면 방송은 본캐 부캐의 활약이 아닌 것이 없다. 이름만 새로울 뿐, 연예인들의 부캐의 시작은 이미 오래된 것이었다. 그걸 새삼스럽게 부각하고 의도적으로 연출해서 보여준다.
처음 재미있게 시청할 때, 사람들에게 힘을 주기 위해서 제작한다고 하는 것이나 얻어진 수익을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기부하겠다고 하는 <놀면 뭐하니>의 방송 취지에 공감을 했다. 사회적 분위기를 고려해 흥청망청이 아닌 최소한의 제작비에다 협찬을 통해 많은 사람들의 추억을 소환하고 기쁨을 주겠다는 말도 예쁘게 들렸다.
하지만 여기저기 따라 하고 비슷한 포맷이 이어지는 지금에 와서는 방송이 나아갈 방향을 오롯이 고민한 결과로 보이지는 않는다. 결국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난다'는 말처럼 어설픈 실력행사에 들어가야 하나? 생각이 된다. 채널을 돌리고 돌리고, 이것저것 따지다 보니 볼 것이 없다. 수십 개의 채널이지만 온통 성공한 몇몇 방송의 포맷을 따라 하는 것들 뿐이다.
시청률로 프로그램의 인기를 따지고, 그에 따라 광고가 따라붙고, 수익을 내야 방송을 유지할 수 있는 방송시스템이라며 따라하기의 정당성을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럼에도 어느 채널을 돌려도 관찰 예능, 쇼와 오락프로그램 일색인 상황은 싫은 정도를 넘어선다.
방송 프로그램의 질 평가에 장르의 다양성이 중요하다고 한다. 방송 채널은 많아졌지만 다양성이 확보되고 있는가는 의문이 든다. 거기에 출연진의 수준도 고려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있다. 너무나 편한 방송, 형, 누나, 동생 등의 친분관계를 외치는 사람들, 반말과 비속어가 난무하는 상황, 날마다 새로 만들어지는 무국적 신조어 등은 기가 막힌다.
백번 양보해서 모든 방송이 프로그램의 양적 질적 균형을 맞추지 못한다면, 적어도 공영방송만큼은 더 엄격하게 맞춰 주었으면 좋겠다. 방송 소비자들에게 프로그램 선택의 권리가 존중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인간의 삶의 질을 고민하고 꼭 다루어야 할 내용들을 골고루 다뤄 주었으면 좋겠다. 그런 방송을 제작하기 위해 고민하는 모습이라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