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람 Sep 18. 2020

몸이 덜 힘든게 '불효'는 아니잖아요

우리 가족은 일 년에 두 번 고향을 찾는다. 아버님의 기일인 한식에 한 번, 추석이 가까워지는 때 벌초하기 위해 한 번 고향을 찾는다. 이제는 모두 고향을 떠나 우리 또래의 세대도 찾기 힘든 곳,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곳에 아흔을 넘거나 바라보시는 친인척이 몇 명 남았을 뿐인 고향, 그곳에 가족의 무덤이 있다.


우리는 남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의 묘소를 매년 돌본다. 아버님은 할아버님이 돌아가시기 10년 전에 병으로 돌아가셨다. 아들의 산소를 돌봐야 했던 할아버님의 심정이야 말로 표현할 수 없었겠지만, 그 할아버님도 이제는 산 한쪽의 자리를 차지하고 계신다.


할아버님이 돌아가시면서 산의 중턱에 있던 아버님의 산소를 야트막한 산의 끝자락으로 이장을 했다. 그게 결혼하고 3년 만의 일이니 벌써 30년이 다 되어간다. 산의 끝자락에 볕이 잘 드는 곳이라고 골라 자리 잡은 산소는 쑥과 가시나무와 이름 모를 나무들이 쑥쑥 잘 자라는 땅이었다. 도무지 잔디가 자랄 수 없는 땅인 것을 시골의 생태와 지형을 모르는, 일 년에 단지 두 번 갈 뿐인 자손들이 알게 된 것은 벌초 때문이다.


산소의 잔디가 잘 자랄 수 있는 곳이 아니라서 볼 때마다 마음이 무거웠다. 중간에 봉분의 떼를 갈아 입히기도 했고, 그러고도 별 효과가 없어 갈 때마다 떼를 사 가서 심기도 했다. 가시나무와 쑥을 죽인다는 농약도 갈 때마다 뿌리기도 했지만 크게 효과는 없었던 것 같다. 여전히 자잘한 잡목들은 무성한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자잘한 나무들은 예초기의 톱날에 잘려 나가기도 하고 그게 안 되면 톱이나 낫을 가지고 잘라내기도 한다. 최소 3명의 가족은 있어야 하루 안에 끝낼 수 있다. 한 명은 예초기 담당, 한 명은 낫이나 톱 담당, 한 명은 베고 난 풀을 걷어 치우는 담당이 된다.


올해도 작년과 다름없이 아들과 함께 산소를 찾았다. 긴 장마에 잡풀과 잡목들은 더욱 무성히 자라서 산소의 형태도 보이지 않았다. 묘지석을 찾아 간신히 헤치고 들어가서 아빠를 대신해 아들이 예초기를 메고 산소 중앙쯤 자리를 잡고 서서 풀을 베기 시작한다.


잘린 풀이 날리며 온갖 생명 있는 것들의 향연이 펼쳐진다. 안락한 둥지를 잃은 생물들은 저마다 분주하다. 자리를 벗어나 날아다니고 뛰어다니고 기어 다니고... 이럴 땐 눈이 나쁜 것이 천만다행이라 생각한다. 말벌이나 독한 벌을 무서워할 개제가 아니다. 흐린 눈으로도 움직이는 생물들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거기에 아들은 한 마디 보탠다. 엄마, 뱀 조심해!


벌레라면 집에서 가끔 나타나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은 거미도 기겁을 하고 파리나 모기도 질색을 하는 도시 사람이지만, 산소에 가면 상황이 달라진다. 달리 기댈 곳도 없고 어느 것 하나 만만한 것이 없다. 그냥 보아 넘기지 않으면 머무는 내내 소리만 지르다 목이 나갈 것이다. 사정이 그러니 예쁘게 보아줄 수밖에 없다.


자연에 잠시 적응이 되면 잠깐 쉬는 동안 사진도 찍고, 새파란 풀색 애벌레를 귀엽다고 바쁜 가족들을 불러 모으기도 한다. 초록색이나 마른 가지 색을 띤 사마귀도 종류별로 탐구한다. 지렁이 정도야 집에서도 비가 내린 다음날 항상 보는 것이고 땅을 풍요롭게 해 준다니 너그러이 보아 줄 만하다. 거기에 말벌이나 그보다 작은 벌과 언제 물고 가는지도 모르는 자잘한 벌레들을 온몸으로 맞는다.


베어낸 풀들을 옮기다 거미줄이 모자에 닿았는지 모자 위에 안착한 총천연색의 거미가 눈앞에 대롱대롱 보이기까지는 그래도 여유 있는 척 지켜볼 만했다. 기겁을 하며 모자를 털어 낸 이후로는 주변의 모든 것들이 신경 쓰여 더는 움직일 기운을 내지 못한다. 마음이야 다 때려치우고 풀숲을 벗어나고 싶지만 여전히 땀 흘리는 가족들을 나 몰라라 할 수 없으니 정신을 차리고 다시 거들 수밖에.


30년을 하면서도 이 일은 도무지 수월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남편의 아버지, 아버님의 산소는 제일 먼저 시작하고 제일 시간도 많이 걸린다. 산소를 단장하겠다고 사다 심어 놓은 향나무에는 가시나무가 칭칭 둥지를 틀고 있다. 가시덤불을 자르고 걷어내는 데만도 한참이 걸린다. 아들은 아들대로 밀림 같은 산소의 한가운데서 산소의 모양을 만드는 중이다. 벌초 2시간 경과, 벌레에게 물리지 않으려고 중무장한 가족들의 옷은 어느새 흠뻑 젖어 있다. 겨우 한 장의 벌초가 엉성하게 끝났다.



열다섯 번쯤 벌초를 했을 때, 벌초 대행하는 업자에게 한두 번 맡긴 적이 있다. 전화로 벌초를 부탁하고 사진으로 단장된 묘지의 모습을 보내오니 그보다 더 좋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의 마음은 달랐던 것 같다. 벌초를 핑계 삼아 산소에 내려가서 주변을 살피고 오곤 했는데 대행업자에게 맡기고 나니 그나마도 일이 바쁘다는 이유로 발걸음을 하지 않기도 했다. 그 해는 몸은 편했지만 마음이 많이 불편했던 것 같다. 막히지 않고 가면 두 시간 걸리는 거리지만 마음의 거리는 참 멀었다.


코로나로 인해 벌초대행이나 랜선으로 성묘하는 것을 권장하는 분위기다. 벌초대행을 생각했지만 본격적으로 알아보지는 않았다. 문중의 여럿이 모여서 행사처럼 하는 것이 아니니, 여전히 어설프지만 우리끼리 얼른 다녀오면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다른 때보다 조금 이르게 벌초를 끝낸 것 같다.


10kg이 넘는다는 예초기를 매고 풀을 깎은 아들은 다음날 온몸이 아프다며 드러누웠다. 갈퀴로 풀을 긁어 모아 버리는 담당이었던 나 역시 어깨 팔의 통증으로 힘들었다. 남편도 사정은 다르지 않은데 내색은 하지 않는다.


남편은 종손이다. 고조할아버지의 큰아들, 증조할아버지의 외아들, 할아버지의 큰아들을 거쳐 아버님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자손의 의무는 무엇일까? 단지 종손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런 수고가 당연해지는 마음이 저절로 생기는 것일까. 종손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단 한 번도 얼굴조차 본 적 없는 조상의 산소를 이제는 아들에게 담당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현재 장례 문화는 매장할 묘지의 문제 때문에 화장이 80%를 넘는다고 한다.(2019년 10월 통계, 88.8%, 한국 장례 문화 진흥원) 유럽의 나라들은 이미 익명의 묘역이나 유골을 묻거나 뿌리는 공동의 장소를 이용하거나 마을 가까운 숲 속 나무 주변에 유골을 묻는 등의 장례를 치른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이미 수목이나 화초 등에 유골을 뿌리거나 묻는 자연장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부모에 대한 예를 다하고 효를 중시하는 것에서 출발한 집단 묘지, 풍수에 따른 묘지의 선택,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 상복을 입고 3년 시묘살이를 하는 것이나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고조부모까지 제사를 지내는 예법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조금씩 간단하게 바뀌고 있다. 부모님과 조상을 생각하는 마음이 변한 것이 아니라 시대와 상황이 바뀌는 것이다.


벌초는 우리 대에서 끝내는 것이 맞는 것 같다고 남편과 종종 이야기한다. 앞으로 몇 년을 벌초를 더 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산소를 정리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떠난 가족을 생각한다는 것, 조금의 흔적이라도 남은 곳에 가서 떠난 사람과의 시간을 떠올리는 것이 마음의 안식을 가져다주는 일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일 년에 두 번 의무처럼 가서 조상을 기억해야 하는 것인가는 생각해 볼 문제 같다. 그 두 번 외에도 우리는 일상 중에 고인을 떠올리며 추억하는 일이 훨씬 더 많다. 몸이 덜 힘든 것이 불효는 아니지 않을까.





이전 12화 행복을 부르는 말, “해브 어 나이스 데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