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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Dec 17. 2020

여성, 쓸쓸함으로 남은 빛의 시간

은희경, <빛의 과거>

소설을 읽고 나서 나의 스무 살이 떠올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의 어두컴컴하고 차갑고 무도했던 도시 뒷골목의 풍경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겨울날 저녁 9시, 귀가가 늦어 덕수궁 앞 버스 정류장에서의 불안했던 마음과 클래식 음악다방이라는 곳의 자욱했던 담배연기도 기억 속에서 피어올랐다. 그곳에서 들었던 음악의 혼돈은 클래식 감상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시간이 지나 아이를 키우며 철없던 감정의 시간들이 잠깐씩 떠오를 때마다 털어버리듯 고개를 저으며 지웠다. 유치했던 그 시절에 대한 기억은 실소와 조소 사이의 느낌으로 새어 나왔고 먼지처럼 조금씩 내게서 떠나갔다. 복잡한 감정들은 당시에는 중요했고 성숙을 증명하는 것처럼 생각했다. 그러나 애쓰지 않아도 '시간은 모두를 소멸로 이끄니까.'


시간이란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의 곁을 스쳐 가며 갖가지 슬픔과 기쁨의 무늬를 새기지만 결국은 모두를 소멸로 이끄니까.




소설 <빛의 과거>는 2017년과 1977년을 교차하며 진행된다. 40년 지기 친구인 김유경과 김희진은 친구지만 돈독하지는 않은 '우연이 겹쳐 이어진 점선 같은 관계'다. 소설 속 김희진이 작가로 데뷔하며 쓴 소설 '지금은 없는 공주들을 위하여'는 1977년 유경과 희진이 함께 있었던 기숙사의 풍경과 둘이 지나온 시간의 이야기다.


희진이 쓴 소설에서 김유경의 캐릭터는 김유경 자신이 기억하는 모습과는 너무 다르다. 유경은 다른 이가 기억하는 자신과 스스로가 기억하는 자신의 모습과의 불일치를 확인하며 지나온 시간을 회상한다.


1977년의 풍경이 낯설지 않았다. 시간을 조금 빠르게 감으면 곧 내가 지나온 시간과 만날 수 있었다. 몇 년의 시간차가 있지만, 나의 경험과 가까웠다. 거리감이 없으니 작품 속 인물에 나를 투사했다. 철없고 순수했던 도전과 방황의 기억을 따라 지난 시간으로 빠져들었다.


지난 40여 년의 시간, 간간이 과거를 떠올렸지만 사라진 친구들의 이름은 까마득했다. 그러다 글을 쓰기 시작했고 솔직함에 바탕을 두려고 노력했다. 가족을 끄집어내며 시작된 기억의 소환은 시간대를 가리지 않고 툭툭 튀어나왔다. 그러다 만난 소설 <빛의 과거>는 학창 시절과 친구들, 첫 직장과 동기들까지 한꺼번에 수면으로 끌어올렸다.


하나를 생각하면 다른 하나가 마치 나도 있다는 듯 정체를 드러냈다. 어렴풋한 기억은 확신이 되었고, 가느다랗게 꼬리를 물고 따라 나왔다. 세상에 나온 기억 속에서 퍼즐을 맞추는 듯한 재미와 미숙한 감정들을 마주하는 어색함이 있었다.


1977년이라는 소설의 배경은 안갯속에 갇혀 있던 1980년대의 나를 같이 불러냈다. 그때의 이야기는 어찌 보면 뻔한 드라마의 스토리처럼 막장을 향했지만, 적어도 내게는 가식 없는 세상이었다. 작가의 말대로 '진정한 통속의 세계에는 도덕적 허세 같은 나약함은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것처럼.


경양식집, 덕수궁 돌담길, 멕시칸 사라다, 비엔나커피 등, 기억에 남는 것들과의 만남은 반가웠다. 그와는 별개로, 한의사 집 딸이나 의상학과를 다니며 자신만의 취향을 즐기거나, 부모의 든든한 뒷받침으로 무리 없이 대학에 다니고 용돈을 받아 생활하는 넉넉한 엄친딸들의 모습은 1977년과도 나와도 많이 동떨어진 느낌이 들었지만.


오히려 그들과는 다른 처지에서 살아가는, 백화점에서 일하는 희진의 언니와 공장이나 버스 안내양 또는 여급으로 생활하고 있다는 언니의 친구들, 스스로 학비를 벌며 악착스럽게 생활하는 희진의 모습이 시대와 친밀하게 연결되었다. 그런 점에서 유경의 눈으로, 희진이 기숙사의 다른 친구들과 성격적으로 비교되는 것은 아쉬웠다. 당시에도 부잣집 엄친딸은 분명히 있었겠지만 일반적인 현상은 아니었고, 희진과 그녀의 언니가 처한 상황이 오히려 당시의 모습을 그리는데 가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녀는 산동네를 처음 가보았다. 물지게를 지고 계단을 오르는 꼬마들과 공용 화장실 앞에 늘어선 긴 줄도, 구멍이 숭숭 뚫린 듯 안이 들여다보이는 바라크 집도 처음 보았다. 이사 철에 대책 없이 집에서 쫓겨나 길에 나앉는 사람들과 추석을 앞두고 집을 비우고는 끝내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오현수가 최성옥의 부탁으로 맡게 된 인구주택 총조사를 위해 돌아다니며 보는 풍경들이다. 그녀가 그러한 풍경을 처음 보았다면 그녀의 말대로 '모르는 것이 거의 다'인 삶을 살아온 것이 맞다. 모르는 것이 많은 그녀와 그녀가 속한 무대의 세밀한 묘사는 이 소설이 '세태소설'이라는 이름을 갖게 하는데 어긋나는 느낌이다.


유경이 말하는 '살아오는 동안 지녔던 고독과 가난의 수치'가 누구에게나 비슷하다는 말은 공감하기 어렵다. 고독은 측정할 수 없으니 개인의 몫이라고 해도 가난은 객관적 지표로 측정할 수 있다. 유경과 희진의 처지는 다르고, 하루를 꽉 채운 아르바이트로 생활하는 성옥과 친구의 부탁을 쉽게 수용하고 소일거리로 아르바이트에 나서는 현수의 상황은 분명 다르기 때문에.


여대생들의 미래가 '가구점과 아케이드와 기성복 대리점의 점원 자리와 국민학생을 가르치는 화실의 조수 자리, 서점에서 유니폼을 입고 판매 보조로 사회의 첫발을 디디는 선택'인 것은 그나마 여성의 현실을 똑바로 보여주는 것 같다. 1977년 대학 졸업자의 취업률이 96.4퍼센트를 기록하는 경제 호황에도, 유경이 다닌 여대의 취업률은 26퍼센트에 그친다. 그 이유가 '기업들이 일을 잘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해 여성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보도는 구차하고 슬프다.


소설은 여성의 이야기이다. '젊고 희로애락이 선명하고 새로 시작하는 일도 가능했던 시절' 여성의 꿈과 희망의 빛, 무력과 방어, 실의와 좌절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40년이 지난 지금 '무언가를 욕망하거나 탄식할 나이가 지났을까' 생각하는 유경의 의문이 쓸쓸하다.


기억이란 다른 사람의 기억을 만나 차이라는 새로움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한 사람의 기억도 시간이 흐르면서 새로운 모습으로 되돌아오기도 한다. "차이 나는 것만이 반복되어 돌아온다"라는 말처럼.(337)


밝은 앞날을 장담할 수 없던 과거지만 그리움으로 기억되는 것은 무작정 투명했던 빛이었기 때문은 아닐까. 희진이 SNS를 따라 친구들의 뒤를 추적하는 것처럼, 다시 새로울 수 있다면, 그래서 찬란했던 시간을 반복할 수 있다면 '지금은 없는 친구들'을 기꺼이 찾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존재만으로도 빛나던 젊은 날. 무서울 것도 두려울 것도 없던 찬란한 시간이었지만, 졸업생의 취업률이나 현수가 드문드문 마음대로 작성한 인구주택 총조사 같은 부조리한 통계처럼 부정적 이미지로 각인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2020년은 어떤 통계로 정리될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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