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과 혼수에 대하여

30년 전 나의 첫 세탁기

by 바람


TV에서 처음 출시된 금성 세탁기 광고가 나왔다. 배우가 찾아간 세탁소에 어디서 많이 본 세탁기가 소개된다. 두 개의 세탁조, 세탁과 탈수가 따로 되는 그 세탁기. 50년 전 처음 나온 세탁기라고 하는데, 당황스럽게도 30여 년에 가까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그 시절 내가 사용하던 것과 비슷한 세탁기로 보였다. 어떻게 같은 것처럼 보일까 생각하니 옛날 모델을 싸게 장만했었나 하는 생각 너머로 시댁에서 쓰던 것을 넘겨받은 기억이 까맣게 잊힌 시간을 뚫고 올라온다.


신혼살림이었다. 원하던 모습은 아니었지만 자족하려고 노력했다. 그때의 추위는, 수도관이 얼게 하지 않으려고 물을 틀어 놓았고, 물이 버려지는 것이 아까워 받아 놓은 대야의 물은 꽝꽝 얼었고, 흘러넘친 물이 수돗가를 빙판으로 만드는 과정의 반복이었다. 현관으로 들어오면 마주하는 수돗가를 3층 곳곳에 세들어 살던 사람들은 혹시라도 넘어질까 조심조심 드나들었고, 수돗가는 냉동과 해동의 과정을 다채롭고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그것이 수차례 반복되고 추위가 지긋지긋해질 즈음에 봄이 다가왔다. 1층에만도 여러 가구가 사는 다세대 주택, 그중 수돗가 근처의 방 둘 있는 셋방이었다.


부엌이라고 따로 이름 붙일 것 없는, 싱크대와 가스레인지, 냉장고로 꽉 차서 한 명 간신히 서 있을 수 있는 공간이 다였다. 사정이 그러니 세탁기는 어디에도 둘 곳이 없었고 현관문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수도관을 따로 빼서 연결하지는 못했고 세탁할 때면 세탁 호스를 문밖 공동 수도에 연결해 물을 받고, 세탁 수조에 물이 차면 다시 수도를 잠그고를 반복하며 세탁시간 내내 옆에 지키고 있어야 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지만 그때는 그리 낯선 풍경은 아니었다. 아래층의 다른 집들도 사정이 비슷했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겨울이었고, 아기 기저귀는 시도 때도 없이 나왔다. 수도가 얼어 매일 사용할 때마다 뜨거운 물을 부어 녹인 후, 수도꼭지에 고무호스를 연결해 물을 받아 삶은 기저귀를 간신히 세탁만 마친 후, 수돗가에서 큰 대야를 죽 늘어놓고 차례차례 헹구어 빨랫줄에 널었다. 시뻘겋게 변한 얼기 직전의 손으로 빨래를 마쳤고, 운동장에 걸린 만국기처럼 하얀 광목 보드라운 기저귀가 찬바람에 김을 뿜어내며 날리면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기저귀는 모양대로 꽝꽝 얼어붙었다. 안으로 들여와서 녹이고 어느 정도 녹아 흐물흐물해지면 다시 바람을 맞게 하려고 내다 널기를 반복하며 기저귀를 말렸다.


살얼음처럼 투명하게 맑은 바람과 쨍하게 파란 하늘에 하얀 기저귀가 날리는 풍경은, 얼은 손으로 생활에 몸을 담그고 있어도 그림 같다는 생각이 들 만큼 현실을 떠나 있게 만들었고, 그 풍경들을 찬바람 속에서 한참을 멍하니 쳐다보곤 했다. 스스로에 대한 위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세탁과 탈수가 한 번에 되는 것보다 내 마음대로 물을 받아 원하는 만큼 헹굴 수도 있고, 탈수도 더 꼼꼼하게 되어 비누 잔여물이 남지 않을 것 같아 깨끗하게 빨래가 되는 세탁기라고 생각했을 만큼 세탁기에 불만은 없었던 것 같다.


결혼하며 물려받은 첫 세탁기는 그 집에서 이사할 때에도 그다음 이사 때에도 함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용하는 동안 잔 고장이 없었지만, 그 이후의 이사 때에 모양도 예쁘게 잘 빠진, 이불까지 세탁된다는 대용량 세탁기로 바꿨고 새로운 살림을 장만하는 기쁨을 가졌다.


가전제품이 돈을 달라고 할 때마다 새로운 것들에 눈이 간다. 결혼 적령기의 아이들도 있고 해서 백화점 혼수 코너에서 금액을 가늠해 본 적이 있다. 어마어마했다. TV와 세탁기, 냉장고만으로 몇 천을 훌쩍 넘는 금액에 아연했고 얼마 남지 않아 곧 다가올 아이들의 결혼이라는 중대사에서의 현실(돈)의 문제를 실감했다.


기본이 되는 가전제품은 점점 많아지고 있고, 백화점에 가면 온통 막 출시된 신상품만 번쩍번쩍하게 전시되어 있다. 매장을 둘러보다 보면, 지금 사용하고 있는 가전들도 고장 난 것은 아니지만 긁히고 할퀴고 부식되고, 여닫을 때 고무로 된 패킹도 낡아 볼품없어 바꾸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든다. 애들 혼수는 나중의 문제가 된다. 집에 돌아오면 괜히 냉장 온도가 잘 지켜지는지 가스레인지의 화력은 여전한 건지 의심을 하고, 닦고 만질 때마다 바꾸자는 소리를 달고 산다.


‘결혼 정년기’라는 말의 의미도 많이 퇴색했지만, 이미 결혼한 친구들도 있는 딸에게 넌지시 물어본다.


“친구들은 결혼을 어떻게 생각해? 돈 때문에 결혼을 힘들어 하나?”


“돈 때문은 아니야. 대부분은 결혼할 상대가 없는 거지. 결혼하고 싶은 사람은 이미 기혼이고. 상대만 있으면 오히려 아무 생각 없이 결혼을 결정하고 아이도 낳고 하는 애들도 많은 걸.”


돈 때문은 아니라고 한다. 상대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고 보니 나의 결혼도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 결혼하고 싶은 상대가 있으니 나머지 걱정은 하지도 않고 덜컥 결혼을 결정하고 진행했다. 내가 준비할 수 있는 만큼 준비했고, 부모님께 기댈 수 있는 만큼 기댔다. 그러니 신혼의 어려움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이제 부모가 되어 아이들이 결혼할 때 어떤 것을 얼마만큼 준비해야 할지 조금씩 걱정하고 있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내 부모님이 걱정하고 준비하신 만큼 나도 가능한 만큼 도움을 주면 되는 것이고, 아이들 역시도 자신들이 가능한 범위 내에서 준비할 것이니. 그래서 신혼은 늘 부족했던 것투성이고 힘들고 어려웠던 기억만 가득한 채로 서늘하고 살얼음 덮인 기억으로 후에 또 향수가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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