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카로운 첫 김장의 기억

by 바람

1일


배추 100포기(다 세 보지 않았다.), 무 100개(역시 세어보지 않았다.), 쪽파 5단, 갓 10단, 알타리 10단, 대파 10단, 양파 1자루, 황석어젓 1 드럼, 멸치젓 1 드럼, (두 젓갈은 다음날 하루 종일 달여 면 포에 걸러 김장용 액젓으로 재탄생했다.) 새우젓, 마늘, 생새우 등.


점심때를 막 지나 배달된 배추를 다듬고 쪼개고 소금물에 담가 다시 차곡차곡 요리조리 절임 물에 담그니 어느새 밤이 되었다. 물론 이 과정도 혼자서 척척은 아니었다. 배추도 처음 다듬어 봤고, 배추를 반으로 가른 것도 처음이었다. 배추절임물을 만들어 본 것도 처음이었고, 살아있는 듯 성성한 배추에 소금을 마구 뿌려대는 것도 처음이었다. 혹독한 추위에 밖에서 그 모든 것을 하는 것도 처음이었고, 보름달만 한 배를 안고 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김장용이어서 단도 컸지만 사 온 것이 워낙 엄청난 양이었고 채소가게 주인은 인심도 컸다. 놀랍지도 않았다. 현실이 아닌 것 같았다. 그냥 도망치고 싶었다. 갑자기 엄마가 보고 싶어졌다. 출산이 한 달도 남지 않은 만삭이었다. 수돗가에 채소들을 늘어놓는 것만으로 배가 땡땡하고 아프다고 했더니 다 니들이 먹을 거라고 말씀하셨다. 아프다는 말을 꺼낼 때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겨울 동안 김치를 이렇게 많이 먹어야 한다는 사실에 또 놀랐고, 집 안은 물론이고 수돗가까지 빈틈없이 차지한 이것들이 정리는 될 수 있는 것인지 걱정 되었다. 우선 김치가 만들어져야 그다음 먹는 것을 걱정할 차례인 것을…….


가져온 것에서 배추만 빼고는 그대로였다. 채소시장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은 풍경에 이웃들은 문을 드나들며 다들 한 마디씩 거들었다. “김장하는구나”, “어이쿠, 굉장히 많네.”, “언제 다 하나.” 그들의 말이 곧 나의 걱정이었다. 나이 드신 분들도 한마디 하실 만큼 많은 양에 모두들 놀랐다. 오늘도 넘치게 힘들었다. 시작도 안 한 셈이었고 내일은 더 힘든 하루가 충분히 예상되는 것이었다. 한 번도 김장의 전 과정을 옆에서 지켜본 적도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고 얼마나 걸리는지,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하나도 몰랐다. 닥치면 한다는 말은 막말과 다름없었다. 닥쳐서 까이고 베이고 상처 입고 그렇게 힘들게 배우라는 인생 공부를 이르는 말이었다. 닥친다고 다 할 수는 없었다. 갑자기 닥쳐온 것은 아픔이고 고통일 뿐이었다. 꿈자리가 내내 사나웠고, 다음날 아침이 영영 오지 않았으면 싶었다.


2일


오전 내내 쪽파, 파, 양파를 다듬었다. 시간은 이미 오전을 지나 있었다. 그 사이 젓갈은 연탄불 위에서 부글부글 고약한 냄새를 피우며 끓어오르고 있었다. 남들은 슈퍼에서 파는 액젓이 쓰는데 왜 이렇게 해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그때까지도 좀 더 싸게 하려고 이것들을 사 온 것일까 생각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아니었다. 일부러 액젓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고 가르쳐주겠다고 생젓으로 사 오신 것이었다. 사이사이 젓갈의 상태를 물었다. 잘 달여지는지 불 조절은 하는지, 그리고 다듬던 파는 정리가 다 끝나 가는지도. 넋을 놓고 일에 임했다. 오후에는 전날 절여놓은 배추를 씻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다. 중간중간 다듬은 파를 씻으라고 해서 씻었고, 무를 닦으라고 해서 닦았다. 안에서 이것 했는지, 저것 가져오라든지 주문이 많았지만, 의식의 흐름대로 맡겨 놓은 지 이미 오래였다. 가끔 배추를 뒤집으라고 했고, 배가 어떤지 물었다. 힘들다고 하면 잠깐 쉬라고 했고 방에 들어가기 무섭게 뭔가를 가져오라고 불렀다.


배추를 저녁이 다 되어 어찌어찌 씻었다. 문 안쪽에서 끊임없이 무와 대파, 쪽파, 양파 등 각종 파와, 마늘, 종일 달여 놓은 젓갈 등을 차례차례 요구했고, 안으로 들어가니 각종 재료들을 썰어놓은 것에 새우젓과 생새우 등등에 고춧가루를 잔뜩 넣어 버무린 속 재료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절인 배추를 씻어 건지고 소쿠리에 받쳐 놓으니 저녁 10시가 되었다. 점심을 어떻게 먹었는지 모르겠다. 끼니를 챙겨야 했지만 좁은 부엌에 벌려놓은 것이 너무 많았다. 김장 속을 버무리고 나서는 김장 배추와 속을 반찬으로 밥을 때웠던 것 같다. 저녁 같은 점심을 먹었을 것이다. 다른 날의 식사는 무엇을 먹긴 먹었을 것인데, 밥의 기억은 전혀 없다. 산더미 같은 채소 더미들과 그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며 갈피를 잡지 못하던 나의 모습과 조금도 줄지 않던 채소 더미만 떠오른다. 시어머니는 먼저 씻어 건져 놓았던 물 빠진 배추에 속을 버무리셨다. 버무려진 배추를 가지고 나와 빈 항아리에 채웠다. 다시 밖에서 안으로 절여진 배추를 들였고, 안에서 밖으로 버무려진 배추를 들고나오기를 무한 반복했다.


완성된 배추를 항아리와 김치통과 비어있던 모든 통을 채우고 나서도 김장은 끝난 것이 아니었고 아직 안팎으로 채소가 가득이었다. 치우는 것은 나중에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배는 이미 내 것이 아니었다. 돌덩이처럼 단단해져 무슨 일이든 곧 벌어질 것만 같았다. 얼굴빛도 좋지 않았고 몸은 더 좋지 않았다. 들어가서 쉬라는 마지못해 하는 소리에 등 떠밀려 방으로 들어왔다. 시간은 이미 자정이 지나 있었다. 어제오늘의 일이 마법처럼 싹 다 사라져 버렸으면 했다. 힘들었지만 꿈이었으면 했다. 그렇게 첫 김장은 나와 김치를 원수로 만들었다. 더불어 시집살이라는 것에 대해서 기존의 떠돌던 말들을 모두 인정하도록 만들었다. 혹독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고 느꼈다. ‘시’ 자 들어가는 것으로 내려오는 전설에 하나를 더 보태는 사연이 만들어지는 순간이었다.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구나, 생각했다. 누웠지만 잠도 오지 않았다. 밖의 그 시끄러운 상황을 그대로 두고 잠이 오면 그건 비정상이었다. 피곤이라는 말로는 채워지지 않는 몸과 마음의 고통이 있었고 한숨도 자지 못했다.


3일


새벽에 몸을 추스르고 나왔다. 어머니는 이미 나오셔서 무를 썰고 계셨다. 깍두기를 담그려는 준비였다. 김치가게를 차리는 것 같았다. 개업식에 맞춰 알맞게 익은 것을 판매하려고 종류별로 담근다고 생각할만했다. 깍두기 다음은 파김치였고, 파김치 다음은 갓김치, 갓김치 다음은 알타리김치, 마지막으로 동치미였다. 그것이 모두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출산 후에 먹을 백김치라고 하며 따로 담그려고 준비한 것이 있다고 했다. 한쪽에 배추 절인 것이 꽤 많이 남아있던 것을 떠올렸다. 맛있게 하려고 배와 밤, 대추 등을 따로 준비했다고 하시며 썰어 놓은 것들을 풀어놓았다. 고춧가루만 들어가지 않았지 김치속과 다를 바 없는 것이 또 한 대야 준비되었다.


그날 오후 늦게 모든 김장이 끝났다. 옆집 아주머니는 며칠 동안 계속 오가며 그 많은 양에 감탄했다. 이걸 다 어떻게 먹느냐는 걱정을 나보다 더 많이 했고, 차마 내 입으로 못 하는 말들을 입 밖으로 속 시원히 꺼내 주었다. “이까짓 것 얼마 된다고.” 시어머니는 옆집 아주머니 말을 고개도 들지 않고 일축했다. 정리는 하나도 못 했고 엉망이 된 집안을 뒤로하고 시어머니는 바로 당신 집으로 가셨다. 치우다 말고 방으로 들어왔고 남편은 나머지 정리를 했다. 쓰러져 잠이 들었다.


4일


정리했다고는 해도 곳곳에 고춧가루 튄 것과 소금, 젓갈 달이고 남은 찌꺼기(따로 쓰신다고 잘 두라고 하셨다), 각종 양념이 튀고 묻어 벗어놓은 옷 등 빨랫감들. 다음 날 하루는 남편의 뒤통수를 쏘아보며 움직여지지 않는 몸을 꿈적이고 종일 같이 정리했다. 시어머니도 힘이 드셨을 것이다. 누군가를 향해 무언가를 가르치려면, 더구나 그 누군가가 하나도 할 줄 모르는 초보라면, 그것이 솔선수범해야 하는 것이라면 힘든 것은 너무나 자명했다. 그러나 그날 나는 시어머니를 향한 고마움 대신 원망만 가슴속에 품었다. 당신 딸, 나의 시누이는 직장일을 마치고 이틀 밤을 왔었다. 시누이는 시어머니에게 얼마나 힘든지를 묻고 또 물었고, 시어머니가 자신을 딸을 위해 정성껏 차린 밥상을 받고 다음 날 출근을 위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반복했다.


이후 일주일을 앓아누웠다. 그리고 다시 두 주가 지난 후 첫 아이를 낳았다. 그렇게 담근 김장김치는 얼음이 얼었다녹았다를 반복하며 금방 익었고 금방 쉬었다. 더는 먹을 수 없게 될 즈음 시어머니는 교회에서 찌개로 사용한다며 그 많은 것들을 다 교회로 옮겼다. 그렇게 없어질 것을 왜 힘들게 했나 하는 생각보다 우선 속이 시원했다. 눈앞에서 사라지면 속상한 마음이 한결 가실 것이라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꽤 오랫동안 그날의 상황을 곱씹게 되었다. 아이를 낳고 키우며 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당신 자식이나 마찬가지인 며느리가 그렇게 미웠을까. 그렇게 혹독하게 무언가를 가르치고 싶었을까. 꼭 그래야만 했을까.


삼십 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지금도 당시의 상황이 이해가 가질 않는다. 원망이 무너뜨릴 수 없는 담처럼 두껍게 쌓였다. 결혼 자체를 무르고 싶은데 고마움이라니, 생각지도 못할 말이었다. 김장은 시집살이의 시작에 불과했다. 다음 해에도 김장은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처음 김장만큼 강렬하지 않았다. 양도 그랬고 나에게 요구하는 것도 그랬다. 김장에 있어서는 조금 눈치가 생겨서인지도 모르겠지만.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기억될 만큼, 생각하면 지금도 여전히 울컥할 만큼 첫 김장은 악몽이었다. 어머니를 대하는 나의 마음은 그날 이후로 복잡해졌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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