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책과 세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람 Dec 24. 2019

사고의 벽과 마주한 시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신영복 옥중서간

전에 다른 책의 작가와의 만남에서 장기수 인터뷰한 과정과 그들의 사연을 들었다. 이야기 말미, 당시 그들을 감옥으로 내몬 공안검사가 국정농단 사건으로 지금은 감옥에 들어갔다 나온 아무개이고, 또 아직도 권력의 상층부에서 더 큰 권력을 쥐기 위해 활동하고 있는 야당의 누구라고 들었던 기억이 있다. 가해자는 아직도 권력의 정점에서 조금도 흔들림이 없는데 피해자는 여전히 과거의 아픈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이다.


저자는 1965년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잡지 <청맥>의 예비 필자 모임인 '새문화 연구원'에 참석했고, 1966년부터 육군사관학교에서 경제학과 교관으로 활동하다가,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중앙정보부(지금의 국가정보원)에서 조사를 받고 구속되었다. 여러 차례 재판 끝에 무기징역형을 받고 안양과 대전, 전주교도소에서 복역했고, 20년간의 옥중에서 가족들에게 쓴 서신을 엮은 것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다. 저자는 1988년 20년 만에 광복절 특사로 출옥했다.


사계절이 스무 번 거듭되는 시간, 같지만 다른 시간의 미세한 차이를 포착하고 사색하는 힘을 만난다. 절망도 희망도 무뎌져야 하는 시간을 면면함으로 덤덤히 말할 수 있는 사색의 깊이를 감히 가늠해 본다. 견딤이라는 것은 이런 것이다,라고 가르쳐 주는 듯하다. 가족들에 대한 따뜻한 애정의 말들과 그들이 하는 수고 혹은 노고의 내용을 고스란히 담아 송구한 상황에서의 감사의 표현들은 정성스럽다. 부모님의 지난한 자식 사랑의 행보와 애끓는 사랑에 대한 감사를 계수님, 형수님께 돌려 표현하는 화자의 화법이 안타까워 오히려 절실하다.


벌레도, 흙냄새와 생명, 풀꽃의 질긴 승부도, 땀 냄새와 온갖 것들의 냄새도 현실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동시에 현실이 아닐 것이라는 착각을 하게 만든다. 단전에 기를 모아 호흡과 명상을 하면 세상의 것이 아닌 몸이 되어 허공으로 둥실 떠오를 때 저자의 이러한 마음가짐이 가능할까 싶다. 감옥에 있다는 이유로 모든 일상이 부끄러움으로 치환되고 마는 수치는, 저자의 몫이 아닌 국가의 몫, 독재자의 몫이어야 한다. 시대의 상처이며 시대의 폭력이 만든 것들이기 때문에.


청구회 추억은 읽는 내내 아팠다. 아이들의 순수가 아프고, 선생님께 마음을 다하는 예가 아팠다. 일찍 나와 만남을 기다리던 그 시간이 아프고, 중학교 대신 자전거포로, 또 다른 곳으로 취직하고 출발하는 시작이 아팠다. 그렇게 아픈 아이들을 저자의 집으로 초대했을 때, 아이들은 왜 안 왔을까. 정권이 어린아이들마저 다른 절망으로 내몬 것은 아닐지 걱정스럽다. 지금은 이미 60줄 언저리에 있을 그들의 현재가, 안녕이 궁금하다. 초등 7학년 8학년의 아이들에게 혹여 국가 변란, 폭력, 파괴 등으로 이름을 씌워 어린 순수를 짓밟았을 것 같아서 책을 덮을 때까지도 그리고 지금도 분노가 치밀고 마음을 놓을 수 없다.


욕설의 적나라한 리얼리즘. 날 것 그대로의 펄떡거리는 언어. 요즘도 길에서 많이 목격한다. 가장 싸고 후진 감정의 해소 방법이라는 것에 동의하며, 예리한 풍자와 골계일 수도 있다는, 언어유희로 귀엽게 보아 줄 수도 있다는 잠깐의 지난 생각을 반성했다. 아무리 포장해도 역시 욕설은 응달의 산물이고 불행의 언어라는 저자의 말을, 욕을 입에 달고 사는 아이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고, 예술적 형상화만큼 빛나는, 음지에서 음지의 언어를 사용하는 감옥에 있는 이들의 인식에 대한 통찰이 깊고 깊어 서늘할 지경이다.


어머니의 부음을 들었을 , 단전에서 터져 나오는  것이 아닌  속의 소리를 듣고 놀란 기억이 있다. 터지는 소리의 괴기스러움에 놀랐고 그것이 마치 굶주린 짐승의 그것 같아서 놀랐다. 어미를 잃은 짐승은 앞으로의 시간을 내내 주린 채로 살아가야 하기에 그런 소리가 터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저자는 교도소라는 공간에서의 침묵의 문화 속에서 소리 없이 쌓이는 슬픔을 채식과 같다고 말한다. 생각을 맑게 하고  마음 한가운데 아름다움을 일으킨다고, 그리고  미의 본질은 비극이라고 덤덤히 말한다. 비극의 아름다움, 비극의 1인칭을 ‘정직성이라고 말한다. 1인칭의 비극을 품고 사는 사람들이, 어떤 가식도 통용되지 않는 공간에서 부대끼며 서로를 향한 배려의 손찌검을 보낸다. 동물의 주림과 채식 슬픔, 다르지만 같은 비극성이라니.


피서(避暑) 철에 피서(避書)를 하고 동장군이 무서워 솜장군으로 무장하고 하는 이야기들. 단순한 사고의 사람인 내게 큰 공감이 되었고, ‘월면보행(月面步行)에서 빵 터져 나오는 웃음을 준다. 역시 ‘아재 개그’식의 내용은 어려운 한자어에도 불구하고 읽는 재미를 더한다. 아버님과 나누는 염려의 편지가 대화의 편지로 바뀌었으면 하는 바람, 감옥의 사면 벽을 사고의 벽으로 표현하는 발상에서 흔들림 없는 마음의 단단함을 느끼며, 20년을 한결같이 이어가는 저자의 허심탄회한 우직함의 자세를 진심으로 배우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진실은 박제되기 때문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