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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Dec 31. 2019

진실은 박제되기 때문에

<슬픔의 노래>, 정찬

글쓰기 공부의 일환으로 필사를 열심히 하고 있다. 첫 책은 은유 작가의 <쓰기의 말들>이었고, 두 번째 책으로 선택한 것이 정희진 작가의 <정희전처럼 읽기>와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다.


읽을 때는 그냥 지나쳤던 말들을 필사를 하며 나도 모르는 새에 손에 새겨지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어디서 익숙한, 어디서 본 듯한 말들과 문장을 문득 떠올리면 그것의 시작이 내가 필사한 그 책들에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런 발견은 글을 쓰다 문장이 막힐 때나 아무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 덮고 싶을 때 나를 달래준다. 돌파구가 생기는 것이다. 집요하게 파고들지 못하는 성격이어서 머뭇거리다 그만두곤 하는데, 그 순간 다른 길을 제시해주는 것이다.


필사를 하면서 글을 쓰는 방향에 대해 영향을 받기도 한다. 더불어 내가 읽어야 할 책의 목록도, 말해주는 이 없지만 책을 통해 소개 받는다. 그런 경로로 읽은 책이 정찬의 <슬픔의 노래>다. 먼저, 정희진 작가가 나만의 3부작이라고 하는 말이 우선 궁금했다. 도대체 나의 3부작은 언제쯤 목록으로 만들 수 있을까를 가만히 떠올려 보며. 그다음으로 ‘폭력과 권력의 탐구를 짊어지는 작가’라는 표현도 궁금증을 일으켰다.


개인적으로는 폭력을 냉정하게 조명하는 것을 힘들어한다. 영화 <1987>에서도 그랬고, 크리스마스 특선 영화로 보여 준 영화 <밀정>에서도 그랬다. 고문, 무자비한 폭력, 권력의 잔혹성을 혐오한다. 아니 회피한다. 영화에서의 장면이 고스란히 고통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영화의 여운이 오래갈수록 그 잔혹성에 몸서리치면서도, 세상의 모든 인간이 다 그럴 수 있는 존재라는 것에서 인간 혐오에까지 이르고 결국 인정하게 된다.


<슬픔의 노래>에는, 소설가이며 취재를 맡은 유기자와, 유기자의 말대로 1980년 광주의 또 다른 피해자일 수 있는, 지금은 연극을 하는 박운형이 나온다. 그는 광주의 진압군이었으며 폭력의 당사자였다. 한순간 짜릿한 살인자의 쾌락을 느낀 그는, 이후의 시간을 예술을 통한 폭력적 쾌락이라는 행위를 통해 피해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행복한 예술가를 꿈꾸며 ’어둠 속에서 빛을 찾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그는, 행복한 예술가의 목표인 어둠 속에서 빛을 찾기 위해 살아간다.


빛은 ‘슬픔의 강’ 너머에 있고 그 빛을 찾기 위해 그가 선택한 방법은 강물에 빠지는 무한의 고통을 반복하는 것이다. 그는 손쉽게 배를 타고 슬픔의 강을 건너 빛을 찾는 소설가를 조소한다. 그는 스스로 강이 되어, ’가난의 연극(궁핍의 연극)’이라는 강물에 빠지고, 빛을 찾는 것을 거듭 실패하기 위해 매 순간 무대에 오르고, 그렇게 살아남은 자의 형벌을 대신하고 있다.


광주에서 전… 그렇게… 했습니다. 칼이 몸속으로 파고들 때 몸은 반항을 하지요. 죽음에 대한 반항 말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경련이지요. 칼을 움켜쥔 손안에 가득한 경련은, 그 경련은, 생명의 모든 에너지가 압축된 움직임이라고나 할까요. 그러니까 한 인간의 생명이 손안에, 이 작은 손안에 쥐어 있다는 것이지요. …… 자기와 똑같은 한 생명을 그렇게 쥘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은… 상상할 수 없는 쾌감입니다.


무모해 보일 수도 있는 그의 선택은 무모하기 때문에 예술가답다. 그가 존경하는 예르지 그로토프스키의 ‘가난한 연극’은, 그에게 ’외형의 모든 것을 버리고 마지막에는 살까지 깎아 뼈를 보여주게 하’는, 진정한 고통의 발견을 요구하고 있고, 그걸 따르는 것은 예술가로서의 그의 지향이다. 고통을 회피하고자 하는 본능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온몸이 마비되는 죽음의 희열을 겪어내며 도전을 계속하는 힘을 획득한다. 그것이 그가 갈망하는 것이다.


그에게, 매번 죽음에 이르도록 무대로 뛰어들게 하는 힘의 원천은 광주에서의 사건이다. 도대체 광주에선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수많은 사진을 보고 수많은 증언으로도 끝나지 않는 그곳의 참상은 누구에 의한, 어떤 신성에 도전하는 파괴였을까.


아우슈비츠, 오슈비엥침, 축복받은 땅, 150만 명이 악착같이 죽임을 당한 땅.

“언제부턴가 아우슈비츠가, 어둡고 황량한 풍경이….”

“제 내부와 비슷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제가 두렵습니다.”

바로 자신의 내부와 같아 두려워지는 땅에 가지 않으려고 하는 박운형의 말이다.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 보는 대신 회피하며 매번 죽음에 이르기까지 혹사시키는 방법을 선택한 것은 더 수월해서였을까 더 혹독해서였을까.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광주의 비극은 여전히 진행중인데, 그 일을 저지른 집단, 해결을 위한 어떤 노력조차 하지 않는 인간들에게 법과 권력은 너무 관대하다.


이제 법과 권력은 진실되고 정확해야 한다.  최소한 같은 폭력으로 책임을 묻거나, 강탈한 권력과, 그 권력의 주변에 기생한 집단들이 행한 그 사건에 대해서 결론을 내려야 한다. 이대로 두면 진실은 말라 비틀어지고, 결국 알맹이 없는 껍데기만 남을 것이고, 그렇게 박제된 진실은 규명할 수가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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