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엘리오 리볼리 영국 임페리얼대학(Imperial College London) 공중보건학장 연구팀 연구에 따르면 한국 여성 평균 키는 100년 동안 142.2㎝에서 162.3㎝로 20.1㎝ 증가해 연구 대상 200개 국가 중 가장 큰 증가 폭을 보였고 이는 세계 상위 55번째라는 보도가 있었다.
평균 신장 20cm 증가는 엄청난 것 같지만 100년이라는 시간을 대입하면 그게 그렇게 엄청난 일일까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다. 보도된 바에 따라 우리 민족의 성장을 이끈 유전적 영향이 내게도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을지는 모르겠다. 통계 결과가 아니어도 사실 키에 대해서는 할 말이 있고, 내 성장이 완성된 이후로 40년간 그 변화를 몸으로 느껴오기도 했다.
중,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아직 완성형 신장은 아니었을 때도 내 키는 평균을 훌쩍 넘었다. 당시는 아버지의 키를 물려받았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아버지의 키는 160대 중반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마른 체격이 훤칠하게 보였을지는 모르겠지만 평균보다 월등히 큰 키는 아니셨다. 엄마의 키는 말할 것도 없다. 150대 중반의 키. 초등학교를 다니던 어린 시절에도 엄마가 크다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학창 시절 키 순서로 번호를 정하면 나는 언제나 뒷번호였다. 그나마 뒤에 늘 한 두 명 더 있다는 것이 다행스럽고 고마운 마음이었다. 출석을 번호대로 부르기 시작하면 한참을 긴장하며 기다리곤 했다. 버스를 타고 등교하던 때, 빽빽한 인파에 옴짝달싹도 못할 지경이었지만 적어도 시야가 완전하게 가려지는 일은 없었다. 버스 천정의 바도 어렵지만 잡고 흔들리는 몸을 단단히 추스를 정도는 되었으니까. 이 정도의 정보라면 알 수 있겠지만, 사실 내 키는 드러내어 공론화할 정도의 놀라운 키는 아니다.
그럼에도 큰 키는 내게는 약간의 콤플렉스였다. 오히려 나는 작은 키를 선호했다. 아담하고 눈에 띄지 않고 누가 보기에도 부담스럽지 않은 어중간한 키가 부러웠다. 친구를 만날 때에도 사진을 찍을 때에도 큰 키는 자리 선정을 애매하게 했다. 사진을 찍을 때면 접으면 접힐 수 있을 것처럼 목을 움츠렸다. 어깨도 어정쩡, 다리도 굽히는 듯 마는 듯, 주위에 내 키를 맞추려고 애썼던 기억이다. 그래서인지 단체 사진 속의 나는 언제나 비딱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처음 중학생 아이들을 만난 것이 15년 전이다. 15년 전과 비교해도 지금의 아이들은 나와 시선을 같은 높이에 두고 대화가 가능한 아이들이 꽤 있다. 체격적 조건으로 생각해 보면 남학생이 성장과 발육이 월등할 것 같지만 의외로 여학생들이 나와 눈높이를 같이 하는 경우가 많다. 이름만으로도 아름다운 청춘의 때, 아이들은 키 때문이 아니라 모든 행동이 새의 날갯짓처럼 가벼워서 교실을 자유롭게 부유하는 듯하다.
지난 시절처럼 큰 키에 대한 예민함은 많이 사라졌다. 지금은 오히려 거리에서 도드라지게 큰 키에 쭉 뻗은 몸을 보면 그 길쭉한 시원시원함에 부러움의 탄성이 나오기도 한다. 주위를 온통 시원하게 만드는 우월한 길이감이 무척 아름답게 보이기도 한다. 편안한 단화에 긴 생머리를 하나로 묶고 가능한 만큼 힘차게 보폭을 넓게 해서 걷는 당당한 모습을 보면 지난 시간 나는 왜 그러지 못했을까 슬그머니 후회도 한다.
내 마음을 변화시킨 시간이 무색하게도 지금의 세대도 여전히 키는 중심 화두가 되기에 충분하다. 아이들과 키에 대한 얘기를 나눌 때면 아이들의 반응은 언제나 예상을 뛰어넘는다. 단지 크다 작다가 아닌 생생한 경험을 거리낌 없이 털어놓는다. 자유롭고 활발하게 펼쳐지는 키에 대한 관점들, 각자의 사연을 얘기하기만 해도 한 시간은 훌쩍 넘길 수 있다. 몇몇 아이들의 반응에서 지난 시간의 나를 찾는 신기한 경험도 한다.
정리하면, 학교에서도 장래 직업으로 운동을 생각하거나 모델을 지망하는 학생을 제외하면, 큰 키의 학생들은 대부분 더 이상 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특히 키가 큰 여학생의 경우는 열에 일곱 여덟은 그렇다. 아직 성장판이 열려 있어서 더 클까 걱정된다는 전문적인 의견에 몇 센티 정도는 더 클 것 같다는 진단까지 나온다.
반면 작은 키의 학생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이대로 멈출까 걱정스럽다고 말한다. 여학생이라면 소박하게도 단 5cm만 더 컸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는데, 사실 그들의 절실함에 공감하면서도 지나친 걱정이라고 다독인다. 아직은 충분히 더 자랄 수 있는 나이고 작았던 키가 어느 순간 눈에 띄게 커지는 경우를 무수히 봐왔기 때문이다. (원하는 만큼에는 미치지 못할지라도) 충분히 자랄 것이라는 믿음으로 응원을 보내며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큰 키로 40년의 시간이 지났다. 신기하게도 지금은 공원에서 걸을 때도, 마을 길을 지나칠 때도, 마트나 백화점에서도 이제는 내 키가 그다지 커 보이지 않는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평균 신장의 성장이 큰 몫을 했을 것이다. 또 내가 활동하는 영역에서의 연령이나 성별 분포에 따라, 큰 사람과 작은 사람들이 적당히 잘 어우러진 상황이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리라. 가끔은 내가 묻히는 듯한 안락감까지 맛볼 때도 있으니 세상의 모든 고민과 문제는 역시 시간이 답인 듯하다. 내가 바라던 눈에 띄지 않고 싶다는 바람은 이제야 적당히 달성된 느낌이다.
큰 키가 특별히 큰 상처가 되었던 것도, 키에 포한이 맺힌 세월을 살아온 것도 아니다. 하지만 어쩌면 드러내 표현하지 못할 만큼 키에 대해 속으로 삭인 묵은 감정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뚜렷한 사건이나 기억이 없었기에 어떻게든 풀어야겠다는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다. 무리 지어 길을 걸으며 느꼈던 생각, 사람들과 어울릴 때의 일, 단체 사진 속의 나를 보면 나의 무의식에 키에 대한 부정적 감정의 자리를 넓혔던 것은 아닐까 싶다.
내가 그토록 원했던 자연스러운 어우러짐이 가능한 것은 아마도 자라는 세대들의 성장 조건이 좋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에 여성의 키는 노화로 인한 근 손실로 2-3cm 정도 키를 줄어드는 것이 불가피한 현상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고 하니 그도 한몫 거들었을 것이다. 농담 삼아 긴 시간 내리누르는 중력의 힘에 이제는 몸이 더 버티지 못해서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시간의 법칙에 순응하게 만드는 것이 노화라면 티 나지 않게 스며들 수 있는 지금이 반갑다는 생각도 든다.
때로는 거리의 다른 사람들보다 푹 꺼져드는 느낌도 받는다. 다리가 무거워 한 발짝도 뗄 수 없게 힘든 날, 몸이 땅을 뚫고 내려갈 듯한 느낌이나 땅이 나를 천천히 잡아 삼키는 것 같은 착각. 어떤 날은 발목까지 땅과 일체가 돼서 움직이려고 애써도 몇 발짝 떼지 못한 채 제자리를 맴도는 느낌까지. 시간은 때로 스스로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했던 삶의 오류를 교묘한 방법으로 깨닫게 하는 것 같다.
지난 시간 키로 인해 위축된 마음으로 살아왔으면서도 지금 세대의 아이들에게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키가 크고 작음이 한 사람의 잠재의식을 좌우할 정도의 영향력을 갖는 것은 쓸데없는 소모라고 말한다. 지난 시간의 나를 돌아보면 이 사실은 더 분명하다.
한번 잘못된 생각이 뿌리내리고 나면 그 생각을 바로잡을 수 있는 다양한 관점들이 필요하다. 그러나 나는 부정적 감정을 되돌릴 수 있을 만큼 내게 관심을 쏟지 못했던 것 같다. 홀로 생각하고 판단했으며 그 평가에 대부분 인색했던 것 같다. 내 성장의 과정을 소중히 여겼다면 주변의 시선에 대해 섣불리 판단하고 움츠리는 과민 증상은 없었을 것이다.
사실 나는 불평이 많은 사람이 아니다. 생활에 지장을 초래할 정도로 부정적 감정에 과하게 휘둘리지도 않는다. 뭉근하게 마음을 누르는 생각을 인내하고 묻어두는 것에 익숙하다. 스스로를 잘 통제하는 것을 나름의 장점으로 여기며 살아왔는데, 이제는 너무 사소해서 묻고 지나쳐버린 것들을 하나하나 꺼내서 정리하고 싶다.
다시 후회? 이젠 그런 거 아니다. 나는 지금 내 키도, 나의 노화도 인정한다.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지금의 상황도 긍정한다. 앞으로 더 안락해질 것이고 그게 때로 꺼지는 새로운 경험과 몸의 변화를 수반하더라도 괜찮을 정도로 나는 나를 토닥여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