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람 Apr 24. 2024

긴장감, 질문은 힘들어

오랜만에 지나는 학교 앞이었다. 20년의 간극이 실감 나지 않을 정도로 길은 기억 속 그대로였다. 자동차 백미러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며 새삼 시간이 무섭다고 느껴졌다. 화장품 가게가 늘었나, 카페가 많아졌나 하는 생각 잠깐, 좁고 북적이는 길을 바삐 오가는 어수선한 풍경은 그대로인 게 문득 반가웠다.


학교 정문을 벗어나면 작은 상가들이 밀집한 사거리가 바로 나왔다. 좁은 길이지만 횡단보도 앞에서는 항상 숨을 골랐다. 편안해지자, 편안해지자를 다짐하며. 건널목 앞에 자리한 카페는 지금은 주인도 인테리어도 모두 바뀌었지만 위치 선정만은 탁월하다고 생각했다. 10분의 휴식과 쓴 커피는 오후의 나를 충전하기에 충분했다.


대학원 마지막 학기. 논문 준비로 정신없던 1년이 지나고 겨우 논문 심사가 끝났다. 훌륭하지는 않아도 부끄럽게는 보이지 않겠다고, 노력해 보겠다고 다짐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그 마음이 가능한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훌륭하다와 부끄럽지 않다의 경계가 너무 크다고 생각했다. 좀 더 범위를 세분화해서 어딘가에 분명하게 목적지를 정해두고 움직일 수 있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


어렵사리 지도교수와의 면담을 잡았고, 중간 결과물을 보일 때마다 글의 방향이 뒤집어졌다. 뭔가 논리적으로 내 생각을 전달하고 싶었지만 머릿속은 백지가 됐다. 겸손이 아닌 비굴 모드로 몸은 자동 조정되었다.


체계적이고 논리적이어야 하는 논문을 쓰며 점차 자기주장이 사라졌다.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었는지 흔들렸고, 겨우 쓴 내용의 근거도 자신하지 못했다. 새로운 질문이 날아오면 이전의 모든 주장이 무너졌다. 가진 밑천이 없는 자의 바닥이 얼마나 허술한지 실감하는, 그야말로 날마다 나의 실체를 파악하는 과정이었다.


총 서너 번의 중간점검을 통해서 논문의 수정은 진행되었다. 겁도 없었고 철도 없던 시절이었지만 직장에 다니면서도 실감하지 못했던 갑과 을을 위치라는 것을 처음으로 인식했다. 돈을 버는 노동보다 학위를 따는 과정이 객관적이지도 투명하지도 않다는 판단이었다.


논문이 마무리될 때까지 교수의 태도는 한결같았다. 그다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한 느낌. 해도 안 해도 그만인 듯한 심드렁한 목소리. 그런 상황에서도 교수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가장 쉽게 선택하는 현대문학, 가장 많은 학생들이 선택했고 여럿의 지도를 맡았다는 번거로움, 그 불편한 마음을 대놓고 얘기하기도 했으므로.


거기에 인문학이라는 학문의 지향점이 모호하다고 생각했다. 인간과 삶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면 조금 달랐을까. 깊이 없는 글의 건조함과 그것으로부터 출발하는 의문을, 그 답을 구할 수 없었다. 인류 보편의 역사와 철학을 넘나드는 질문에 대답은 늘 군색했다. 자아가 통제되는 느낌, 그 불편하고 억지스러운 상황에서 회피하고 싶었던 경험이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질문을 하는 것도 받는 것도 어려웠다. 미국의 대통령이 우리나라 기자들을 지목하며 특별히 질문을 허락했던 유명한 그 장면, 대한민국의 어떤 기자도 선뜻 질문을 하지 못했고, 대신 중국의 기자가 한국의 기자를 대신해 시간을 쓰고 싶다며 손을 들던 그 순간과 관련된 보도는 내가 그 자리에 있는 듯한 기시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들은 이미 별개의 지성이 아닌 우리가 되었고, 그 초라한 모습이 과거의 내 모습처럼 부끄러웠다.


한편으로 그들도 나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에 안도했던 것 같기도 하다. 누구나 질문을 어려워한다는 사실이 질문에 얽힌 과거의 상처가 희석되는 느낌도 들었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니라는 생각. 질문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것이라는 동질감. 무수히 매스컴에 노출된 사람도 자리에 따라 상대에 따라 그럴 수 있다는 묘한 위안을 받았다.




질문이 날카롭다는 말은 좋으면서도 두려운 양가적 감정을 느끼는 말이다. 날카로움의 방향에 따라 상대를 찌를 수도 있지만 방어하지 못하면 스스로도 상처를 입게 된다. 그래서 질문의 자리는 늘 긴장이 따른다. 질문하는 주체가 될 때도 다르지 않다. 스스로의 질문을 의심한다. 확신이 없으면 자신감은 떨어진다. 질문다운 질문인지, 날카로운지 스스로는 판단조차 할 수 없다. 그쯤부터 타협이 시작된다. 눈치 보기, 타인의 반응 살피기. 상대의 반응에 기댄 질문은 조바심을 불러와 결국 핵심을 놓치게 만든다.


대학원 수업은 돌아가며 발제를 하고 나머지 학생들은 발제에 대한 질문과 대답으로 진행했다. 발제가 끝나면 침묵이 따랐다. 모두가 잘 숙지한 공식처럼 질문은 없었고 질문을 강제하는 시간이 돌아왔다. 돌아가며 묻고 답하기, 긴장이 됐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 아니다. 순서가 빠르면 곤란하다.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순서가 너무 뒤로 밀려도 곤란하다. 질문 거리가 바닥나기 때문이다. 빠르게 몇 가지 질문을 머릿속에 떠올린다. 분명 의문이 있었는데 질문의 형식으로 바꾸어 내놓는 과정은 부담스러웠다.


간신히 그중 하나로 정리하는 사이 내가 생각하고 있던, 어수선하게 떠돌던 의문이 번듯하게 포장해서 질문으로 나왔다. 언제나 그렇듯 타인의 입을 통해서 나오면 마법처럼 괜찮은 질문이 된다. 순서가 돌아올 때마다 생각했던 질문의 목록이 하나씩 삭제됐고 그중의 일부는 강사의 의도에 부합했다. 대화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잠깐 즐거운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입꼬리를 부드럽게 만드는 대화. 그것을 온전히 즐길 수 없는 채로 다음의 내 차례를 기다려야 했다.




20년이 지난 지금 내 수업도 다르지 않다. 아이들과의 수업에서 좋은 질문에는 서로 답을 해보게 했다. 발표한 학생은 어떤 반론에도 대답을 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다. 방향을 한참 벗어난 억지 섞인 질문과 답변이 이어졌지만 질문을 하는 학생도 대답을 하는 학생도 그 당당함과 거침없음에 대해서만은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기본적으로 나는 언제든 칭찬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리고 요즘의 아이들은 질문과 상관없이 말을 잘 이어간다. 논리도 체계도 없는 어수선한 질의응답이 끝나고 나면 오간 내용을 정리하며 수업을 마무리한다.


물론 모두가 좋은 질문을 한 것은 아니고, 모두가 바람직한 답변 자세를 갖춘 것은 아니다. 차례가 돌아오기까지 두려움과 기대, 당황스러움으로 범벅된 마음에 순서에 밀려 간신히 입을 여는 학생도 있다. 가늘고 거친 호흡과 함께 겨우 나오는 반응을 보면 빠른 정리가 최선이다. 건너뛸까? 그렇게 하면 오히려 상처로 남을까? 잠깐 고민한다. 대부분은 생각할 시간을 준다는 이유로 순서를 뒤로 미루고 그 사이 수업은 끝나는 경우가 많다. 다음 시간까지 연결되지 않는 수업의 경우에는 그날의 질문과 관련된 상황은 그렇게 정리된다.


자신의 차례에 질문과 대답을 하지 못한 학생들은 다행이라고 생각했을까? 머뭇거리다 뒤로 미뤄지는 상황이 이미 너무 익숙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넘겼을까? 그렇게 한 시간을 무사히 보낸 것을 안도했을까? 되지도 않는 말로 질문을 통과하거나 비껴간 학생들의 마음은 또 괜찮았을까?


질문이 주는 자극을 생각하면 모든 상황이 생생하고 강렬하기를 원하지만, 수업이 즐거울 수 없었던 친구들을 생각하면 수업의 과정이 그들에게 스쳐 지나는 일상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


3년을 지켜보다 보면, 아주 가끔 성격이나 성향이 바뀌는 아이들을 만난다. 당시에는 몰랐는데 후에 그 변화의 계기가 내게 있었음을 고백하는 경우가 있기도 했다. 나름으로는 아이들과의 개별 상담이나 상담을 가장한 만남에서 무심하게 툭 던지는 질문과 농담 사이 마음은 편안할 수 있기를 바랐다. 나이와 경험을 바탕으로 무거움을 덜어내고 가볍게 드나드는 호흡 같은. 전문적 상담 실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의 비 전문적 방법이었다.




의문(의심스럽게 생각함. 또는 그러한 물음)과 질문(모르거나 의심 나는 점을 물어 대답을 구함)은 상대의 마음을 파고들어야 한다. 어디를 어느 강도로 어떻게 겨냥할지는 결국 선택이다. 경우에 따라 아플 수도 있고 당황할 수도 있으며 혼란스러울 수도 있다. 자신도 모르게 내면을 비집고 나오는 것의 외적인 발산, 여러 선택지를 두고 망설이는 선택의 기로에서의 과감한 결단, 결국 질문이든 의문이든 내지를 용기의 차원이 아닐까 싶다.


질문의 기술도 중요하다. 질문을 쌓아나가는 요령, 말의 강약과 단어의 선택, 질문의 흐름 등의 문제 같은 것들. 간단한 질문도 묵직하게 만드는 효과까지.


그러나 모든 질문과 대답은 결국 사람에 의해 좌우된다. 용기를 내기 위한 과호흡, 과한 통제, 불편한 침묵 같은 마음의 부담이 반복되어 자아에 영향을 미치고 자존감에 상처를 입히지 않도록, 전체적인 분위기를 잘 통제하는 역할이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마음이 의문과 질문 사이에 고려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