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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May 08. 2024

시래기도 채움

나이가 드니 예전에 엄마가 했던 말들이 불쑥불쑥 떠오른다. 김치만 있어도 반찬 걱정은 필요 없다는 말, 쌀이 가득하면 부자가 된 것 같다는 말, 장만 담가놓으면 양념 걱정 없다는 말, 조금만 수고하면 먹을 게 지천이라는 말. 요즘 들어 나는 그때의 엄마가 된다.


시골의 친인척 집을 방문하면 장독대 항아리에서 장을 퍼주곤 한다. 고추장 된장은 기본이고 간장, 막장, 청국장 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많이 먹지 않는다며 조심스럽게 손사래를 쳤는데 모두들 별거 아니라며 기어코 내 손에 안겨준다. 봉지 봉지 가져오면 냉장고 한 귀퉁이에 오래 있다가 버려지는데, 나이가 드니 그렇게 들어온 장은 이제 별것이 된다. 이제는 넙죽 그 마음을 받는다.


여전히 장을 직접 담그지는 못한다. 그러나 엄마의 말대로 나는 김치와 쌀은 늘 미리 넉넉하게 준비한다. 강박적이라고 할 만큼 김치나 쌀이 충분하지 않다 싶으면 한 달은 너끈하게 버틸 수 있어도 조바심을 낸다. 쌀도 미리 주문해서 넘치다 싶게, 김치도 냉장고 통마다 채워야 비로소 마음이 놓인다. 가족들은 뭐 그렇게까지 하냐고 타박하듯 말하지만 내게는 그렇게 쉬운 마음이 아니다. 충분해야 불안했던 마음이 진정되고 끼니 걱정을 안 해도 되겠다는 안도감을 느낀다.


잠시도 쉬는 틈이 없던 엄마가 무심히 던지던 엄마의 말들은 불과 몇 년 전까지도 전혀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결혼을 하고 아이들이 다 자랄 때까지도 한 번씩 툭툭 던지던 엄마의 말을 기억하며 장난처럼 '엄마는 그랬는데...' 되뇌었지만, 그 의미를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우리 집 창고는 마트가 대신한다고 생각했고 언제든 살 수 있는 쌀과 김치에 특별한 의미부여는 필요 없었다.


그랬는데 언제부턴가 엄마의 마음이 조금씩 내게 스며든다. 살기 어렵던 시절, 일곱 남매를 키우는 엄마의 부담감과 책임감, 매 끼니에 대한 걱정이 어느 정도였을지 문득문득 이해가 된다. 이제야 철이 드는 건지도 모르겠다.




겨우내 먹었던 김장김치 마지막 통을 비웠다. 가지런한 김장 김치 위에 김치를 감싸듯 덮어두었던 부서지고 찢긴 배추 이파리가 국물만 남은 통에 동동 떠다녔다. 건져보니 반찬 담는 통에 가득 찰 정도의 양이었다. 버리자니 아깝다는 생각이, 따로 모아 반찬으로 활용하자니 가지런하지 못한 그 모양이 내키지 않았다. 그냥 버리자 싶었는데 부침가루 꺼내고 달걀 꺼내고 먹던 묵은 김치까지 섞어 잘게 다지니 김치전 반죽이 완성됐다.


오랜만에 기름냄새 퍼지는 훈훈한 분위기를 만든다. 명절이 아니고는 번거로워서 엄두도 내지 않던 일을 순식간에 벌였다. 맛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기름에 지글지글 김치와 밀가루 반죽이 적당히 스며들어 구워지는 모양이 그럴듯해 보였다. 며칠 전 유튜브에서 보며 군침을 삼켰던 단 돈 천 원짜리 채소전을 떠올리며, 버금가는 맛도 기대하며. 소리와 냄새가 마음을 들뜨게 했다.


당장 빈 통을 채워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자잘한 젓가락 반찬을 싫어하는 우리 집 식단에서 김치는 중요하다. 특히 요즘은 더 그렇다. 물가가 하루가 다르게 오르는 때, 시장에 나가면 이리저리 둘러보다 빈 손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하는 상황에서 오래 두고 마음껏 꺼내 먹을 수 있는 김치는 든든한 최후의 보루다. 청과물 시장으로 향한다.


싱싱한 배추도 있고 무도 있고 봄이 되어 열무도 지천이다. 다듬는 과정이 번거롭지만 쉽게 담글 수 있는 알타리도 적당한 크기와 모양으로 가게마다 산처럼 쌓여 있다. 하자 투성이인 몸이지만 체력이 허락하양만큼, 아니 그보다 조금 욕심을 냈다. 한동안 김치 걱정은 멀리 제쳐 놓아도 될 것 같다.




해마다 춘천을 거쳐 동해를 거쳐 남해로 두루두루 돌아다닌다. 몇 해 전 여행길에 만난 장칼국수의 맛은 우리 식탁과 입맛을 시골스럽게 바꿔놓았다. 장칼국수의 주 재료였던 것은 시래기였다. 적당히 먹기 좋게 썬 시래기가 가득 들어간 장칼국수. 우리는 시래기의 세상에 입문했다.


가정집을 개조한 허름한 가게. 입구에 낡은 입식 테이블 몇 개, 안쪽에 방을 터서 만든 좌식 테이블 몇 개. 가게 안에 듬성듬성 붙은 유명 인사들의 사인 종이. 장칼국수와 손만두만으로 이루어진 단출한 메뉴판. 직접 반죽을 하고 손으로 써는 두툼한 면발은 가늘었다가 굵었다가, 제대로 된 손칼국수였다. 다만 머리가 하얗게 센 주인아저씨의 앞치마에 뽀얗게 내려앉은 밀가루가 장인의 느낌을 주는 그야말로 노포였다.


속이 좋지 않아 음식을 먹는 데 부담을 느끼던 때였다. 아침을 굶고도 체기가 가시지 않아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하다 맛집이라고 뜨는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따라갔던 곳이었다. 다소 부담스러운 양이라고 생각하며 먹었는데 먹고 난 이후에 밀가루를 먹은 부대낌이 없었다. 소화가 잘 되는 깔끔한 음식을 먹은 편안함으로 저녁까지 내내 장칼국수를 떠올렸던 것 같다.


이후로 우리는 그곳을 지날 때마다, 아니 한참을 돌아서 가더라도 꼭 그곳에 들른다. 시래기 반, 칼국수 면발 반에 된장을 기본 베이스로 간을 잡은 장칼국수. 이후로 쿰쿰하면서도 구수한 냄새로 대표되는 시래기가 우리 집 밥상의 주재료가 됐다. 시래기 무침, 시래기 된장국, 시래기 된장찌개 등.


장칼국수를 만난 이후로 김치와 쌀을 준비하듯 최근에 미리, 넉넉히 준비하는 것이 시래기다. 처음엔 시장에서 데쳐서 파는 것을 조금씩 사서 먹었다. 김장철에는 일부러 무청이 잔뜩 달린 김장용 무를 사서 무청을 따로 분리해서 베란다에서 말렸다가 먹기도 했다. 배추의 겉잎까지 알뜰하게 재활용하며 데쳐서 시래기와 함께 넣었다. 지금도 나는 된장국이나 찌개의 재료로 무청 시래기와 배춧잎보다 좋은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사실 무청 시래기는 특별한 영양이 가득하다고 평가받는다. 잠시 검색하니 만병통치약이 따로 없다. 소화에도 면역력에도 혈압 관리에도 피부 탄력에도 뼈와 치아를 강화하는 데도 좋다고 한다. 사실 정도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겨울 김장철에는 본격적으로 시래기를 수거하러 지인을 물색해야 하나 고민 중이다.


최근엔 시래기를 박스로 주문해서 먹는다. 말린 시래기라 가볍지만 가격은 제법 나간다. 삶으면 양이 엄청나게 많아지니 시장에서 파는 것에 비하면 훨씬 경제적이다. 한 박스면 한 달은 너끈할 것 같다. 잠깐 삶는 수고로 양질의 부드러운 시래기가 준비된다. 게다가 쟁여놓으니 마음도 편안하다.




몇 가지 먹거리에 대한 나의 채움은 욕심과는 다르다. 일단 정도를 넘지 않는다. 재난에 대비해 창고에 그득 쌓아두겠다는 것도 아니다. 연속되는 삶에 수반되는 끼니를 조금은 안정적으로 가져가기 위한 최소한의 선택이다. 내일 당장 지구가 멸망할 것도 아니지만, 과도한 긴장감 없이 생활이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약간의 에너지라고 할 수 있다.


나의 어머니도 한 채움 하셨다. 그러나 그 마음은 가늠할 수 없다. 매달 따박따박 생활비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던 환경에서 가족을 살게 하기 위한 어머니 나름의 생존법은 아니었을까 생각할 뿐이다. 돈이 들어오면 우선 겨우내 써야 할 연탄을 창고에 들였고, 다음에 또 돈이 들어오면 가능한 많은 쌀을 팔았다. 김장이나, 장을 담그는 것도 적어도 이 정도는 채워야 한다는 우선순위의 생존 전략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나의 채움은 감정적 차원의 문제다. 늘 염두에 두어야 하는 먹거리의 부담에서 해방되기 위해, 마음의 여유를 위해 나는 채운다. 몸이 점점 귀찮아지는 요즘, 요란하지 않은 기본 먹거리는 밖을 나가지 않고도 언제든 적당히 때우기 위한 기본인 셈이다. 하루 치의 휴대폰 배터리를 충전하는 것처럼 한 달 치의 충전 정도라고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오늘 우리 집 배터리는 70퍼센트쯤 충전되어 있다. 한동안 잊고 살아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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