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잘 쓰는 사람도 아니면서 글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하는 것이 조금은 부끄럽게 느껴진다. 글이 타인을 향해 대화를 건네는 것이라고 누군가 말하기도 하지만, 부끄러움에 대해 해명하자면 내 글은 나를 향해 건네는 대화다. 나는 오늘 이런 생각을 했다고. 나는 오늘 이렇게 애썼다고. 나는 나의 삶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고. 여러 면에서 부족함이 있겠지만 이 또한 책이 되지 못하는 이유인 것 같기도 하다.
글을 쓸 때 특별히 신경 쓰는 것이 있다. 타이틀은 감정사전이지만 감정의 넘칠까 염려하고 경계하는 편이다. 되도록이면 담백하게 수식은 간결하게 쓰려고 노력한다. 모호한 단어는 분명한 것으로 바꾸려고 하고 되도록 사실에 기반해 적으려고 애를 쓴다.
사실을 솔직하게 적으려고 하면서도 지나치게 뾰족한 감정은 조심하는 편이다. 말은 부지불식간에 날카롭게 튀어나올 때도 있지만 글은 특별히 조절하는 편이다. 그래서 말보다는 글이 나를 좀 더 부드럽게 만드는 것 같다. 내 글을 따뜻한 시선으로 읽어주는 딸은 엄마의 말은 감정이 쏟아지는데 글에는 타인에 대한 연민이 있어 온화하다고 말한다.
다른 이유도 있다. 날이 선 감정은 사람을 금방 지치게 만드는 것 같다. 감정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글의 방향을 잃고 만다. 억지로 글을 써서 마무리를 해도 결과적으로 두서가 없는 의미 없는 글이 되고 만다. 되도록 무디게 하는 것이 방향을 잃지 않도록 하는 방법이면서 스스로 상처 입지 않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살아가는 이야기를 쓰다 보면 늘 비슷하게 마무리가 된다. 잘 살아야지, 그러지 말아야지, 노력해야지 같은 막연한 응원이거나, 좋은 사회가 되었으면, 변화했으면, 관심을 가졌으면 같은 막연한 지향점이 된다. 그런데 서평은 조금 다르다. 저자의 결론을 따라가게 된다. 법이 아니어도 단죄가 가능하고 나름의 사적인 복수를 완성할 수 있다. 일탈도 가능하다. 낯선 거리에서 홀로 있어도 외롭지 않고 돈이 없어도 여행할 수 있다. 먼 나라에서 홀로여도 괜찮고 피부색이 다른 이와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쉽게 친구가 된다. 파괴적 일상도 나쁘지 않다. 괴팍한 무정부주의자도 술주정뱅이의 주사도 수용 가능하다.
이상적인 인간 사회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모르겠으나, 이상적이지 않아도 충분히 납득 가능하고 매력적인 것이 책의 세상이다. 엄청난 허구 거나 파격일수록 더 짜릿하다. 가끔 이해되지 않는 문장을 만날 때도 있다. 김봄 작가처럼 '이 난해한 독서가 과연 내게 얼마나 남을 것인가' 고민하게 하는 책의 구절들 같은. 명작의 문장이 따로 있나 의문을 품어보지만, 그럼에도 책을 읽고 감상하는 행위는 즐겁다.
아마도 거리 두기의 효과가 아닐까 싶다. 나는 안 되고 너는 되고, 나는 불가능하고 너는 가능하고, 나는 어렵고 너는 쉬운 그 거리 때문에 타인의 것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 같다.
글의 재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서평의 속성이 책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니 두말할 것도 없겠지만 사는 이야기도 들어온 것이 있어야 겨우 나갈 것을 끄집어낼 수 있다. 서평이든 사는 이야기 든 들어온 것 하나에 나가는 것 하나, 참으로 정직한 글쓰기가 아닐 수 없다.
그렇게 해서 한 문장을 짓고 다음 문장을 고민한다. 잇고 연결하고 다듬어 문단을 완성한다. 어찌어찌 한 편의 글이 된다. 이후에도 글을 들었다 엎었다 몇 번을 해야 미숙한대로 한 편의 글이 나온다. 그래서인지 짧은 에피소드를 세세하게 묘사하고 감정을 살리면서도 경쾌하게 쓰는 작가들은 늘 부럽고 경탄스럽다.
오늘도 하나의 서평을 정리했다. 개인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가족과 사회와 인간의 문제를 고려하는 작가의 글은 참으로 훌륭하다고 생각했고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감탄했다. 이번에 읽은 책은 전자도서관에서 빌린 책이었다. 보는 것이 익숙하지 않을 것 같아 막연히 기피하던 것이었는데, 결과적으로 새로운 시도가 나쁘지 않았다. 책갈피를 끼울 수도 없고 페이지 개념도 명확하지 않아서 어떻게 메모해야 하는지도 고민을 했는데, 그때는 몰랐던 것인지 모르겠으나 전자책의 기능이 꽤 다양했다. 책갈피는 물론 형광펜으로 밑줄을 그을 수 있고 나름의 메모도 가능했다.
지역 전자 도서관을 이용해도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많아서 앞으로 계속 이용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본격적으로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라면 도서 전용 구독 서비스를 이용하는 방법도 좋을 것 같지만.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않는 사람이라면 종이책보다는 전자책서비스가 오히려 더 맞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가독성 있도록 페이지 구성도 되어 있고 목차도 매 페이지마다 제시되어 있고, 급한 일이 있어서 휴대폰 창이 닫히더라도 다시 앱을 열면 자신이 읽던 페이지로 바로 연결된다는 점도 좋았던 것 같다.
독서율이나 출판 시장 규모는 줄고 있지만, 전자책 시장은 커지고 있다고 한다. 웹소설 인기가 높아지면서 스마트폰에 익숙한 20·30세대 사이에서 전자책 선호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고 하고. 이 웹소설이란 것이 한번 빠지면 나올 수 없다는 말도 있고. 100-200화 정도의 에피소드는 앉은자리에서 읽게 하는 매력이 있는 것 같고. 여하튼 전자책으로 한정하면 20·30세대의 독서율은 2019년 20대 39%, 30대 31.3%에서 지난해 각각 58.3%, 35%로 크게 늘었다고 하니 전자책이 시대의 흐름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지역 평생학습센터의 홈페이지에 접속하니 주로 60대 이상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스마트폰 사용이나 키오스크 사용에 대한 강의가 꽤 많았다. 연령을 다섯 살 내지 열 살 정도 낮추면 조금 더 범위가 확장되어 블로그 활용이나 개인 SNS 활용에 대한 강의가 진행됐다. 이제는 전자적 지식이 없으면 밥도, 물도, 커피도 사 먹을 수 없고 문화에서도 소외될 것 같다.
앞서 언급한 김봄 작가의 에세이에 '노인장애'라는 말이 나온다. '나이가 들면 그 자체로 장애를 가지게 된다는 말이다. 나이가 들면 눈이 침침해지고, 귀가 어두워지고, 행동이 둔해지고, 미각이 둔감해진다. 자주 사레에 들리다 삼킴 장애를 겪기도 하고, 배뇨장애도 나타난다. 수면장애는 너무 흔한 일이다. 언어장애와 인지장애가 차차 심해지고, 관절이나 척추, 근육이 서서히 제 기능을 못하게 되면서 거동장애를 겪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이런 세상에 사는 나는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나름 치열하게 한다. 내게 쓰는 일은 기어코 쓰고야 마는 것이다. 아주 작은 감각을 모아 모아 엮고 다듬는 일. 그렇게 해서 간신히 오늘의 과제를 채우면 마음은 가볍고 생각은 뿌듯하다. 차마 밥이 없어도 배부르다고 하지는 못하겠으나 하루치의 울적함에서 벗어날 수는 있는 것 같다.
감정사전 제작에 참여할 때 감정의 바닥에 웅크린 내면의 욕구까지 깊이 들여다보는 과정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내 감정을 찾되 내 감정에 매몰되지 않고, 욕구를 찾되 무조건 채우려고 성급하지 말 것. 내 글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감정에 매몰되지 않고 성급하게 채우려고 욕심부리지 않는 글쓰기, 소소하게 찾아오는 '노인장애'에도 불구하고 내가 오늘 미소 지을 수 있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