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남편은 때마다 선물을 잘 챙겼다. 늘 기쁘고 고맙고 감사하지만 그 이유가 가격이나 부피 때문은 절대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다. 결혼 전 서로 남이었던 사람이 가족으로 묶인다는 것에 대해 고민을 했었는데, 나의 가장 큰 결혼의 조건은 어떤 상황에서도 가족이 우선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남편의 꾸준한 챙김은 그런 마음의 표현이라고 생각했고 더불어 여전히 나는 존중받으며 살고 있다는 확신을 대신했던 것 같다.
남편은 선물을 고르는 안목도 있다. 반지나 목걸이 등의 보석이나 가방을 고를 때도 독특하지만 불편하지 않는 선택을 한다. 약간의 파격이 있으면서도 은근히 눈에 띄게 하는 것들을 눈썰미 있게 고른다. 나라면 선택하지 못했을 과감함에 대한 신선한 느낌이 선물을 받을 때의 기분이다. 착용하고 나가면 사람들은 귀신 같이 변화를 눈치챈다. 선물에 대한 질문과 부러움의 시선은 당연하다.
나이가 들어가며 가장 큰 아쉬움은 더는 그것들을 빛나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목걸이 귀걸이 팔찌 등의 액세서리를 전혀 하지 않은지도 꽤 된 것 같다. 어떻게 매일 바꿔가며 하고 다녔던가 싶게 어느 순간 그 모든 것들이 귀찮아졌다. 처음엔 팔찌를 내려놓았고, 다음엔 귀걸이를 뺐으며, 최근엔 목걸이를 벗었다.
어떤 것도 몸을 구속하지 않은, 거슬리지 않은 지금의 상태가 너무 좋다. 몸이 가벼워진 느낌도 좋다. 처음 하나를 덜어냈을 때는 뭔가 허전한 건 아닌가 싶었는데 모든 것을 없애니 세상의 욕심을 내려놓은 것처럼 편하다. 선물을 준 마음과 정성이 사장되는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은 있지만 다시 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다.
나이 들어 바뀐 것이 액세서리만은 아니다. 이제는 가끔도 구두를 신지 않는다. 물론 꼭 신어야 하는 격식을 차려야 할 자리가 없는 이유기도 했지만. 원래도 구두의 높은 굽은 넘기 어려운 장벽이었다. 기껏해야 4-5센티의 굽, 요즘은 남자들도 그 정도의 키높이 구두나 운동화가 흔하다고 하니 남들 눈에 특별하지 않은 적당한 높이의 구두만을 신었다. 늘 무난하고 둥글둥글한 모양에 발이 편한 것을 골랐는데 어느 순간 그것도 부담스러워졌다. 발에 특별한 질환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나이 들며 자연스럽게 운동화로 갈아타게 됐다.
그렇게 해서 정장에 운동화 차림, 처음엔 뭔가 실수한 것처럼 불안한 마음이 없지 않았다. 불안에 대한 대안으로 운동화도 종류별로 다양하게 많이 준비했던 것 같다. 정장을 입을 일이 없는 지금은 신경 쓸 일이 없다. 물론 운동화도 밝은 단색을 선호한다. 한번 신고 마음에 들면 같은 브랜드의 디자인을 이어서 사는 경우도 있다.
요즘 방송을 보면 유명 연예인들도 패션처럼 정장에 운동화를 착용하기도 한다. 내가 시대를 선도한 것인지 시대가 나를 허락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거리를 다녀봐도 구두보다는 운동화를 신은 사람이 훨씬 많은 것 같다. 아마도 시대의 흐름이 스스로를 존중하고 스스로 선택하는 분위기로 바뀐 때문은 아닐까.
화장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다. 엄마는 화장을 참 좋아하는 분이셨다. 환갑은 물론 칠순, 팔순을 넘기고도 잠시라도 외출할 때면 곱게 화장을 하고 옷매무새를 다듬으셨다. '화장은 우리 주여사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엄마가 떠나고 오래 지난 지금도 언니들과 자주 얘기할 정도다.
직장을 다니고부터 화장을 좋아하는 엄마를 위해 나는 색조화장품을 내 것보다 더 많이, 더 다양하게 샀던 것 같다. 엄마의 화장품을 고르며 생전 사용해 보지 않았던 것을 만지고 골라 담는 재미가 있었다. 나의 메이크업 화장이래야 여름엔 선크림과 선베이스, 겨울엔 영양크림을 자주 바르는 것과 파운데이션으로 바뀌는 것이 전부다. 립밤은 여기저기서 하나씩 들어오지만 다 써본 적이 없고, 립스틱은 유통기한을 넘겨서 버리는 경우가 많을 정도로 거의 바르지 않는다.
먹지 말고 피부에 양보하라는 화장품 카피는 내게는 통하는 말이 아니다. 아마도 엄마의 화장하는 모습을 보며 화장에 대한 대리만족 비슷한 것을 충분히 했던 것 같다. 내가 화장하는 것처럼 화장품을 골랐고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도록 엄마의 화장품을 준비했다. 화장품에 관한 한 충분히 만족스러웠던 쇼핑이 됐다. 다행인지 엄마의 고운 화장술은 언니들이 이어받았다.
엄마가 나이 드셨다는 생각을 나는 남들보다 이른 나이에 했다. 마흔 하나에 낳은 막내이니 내 나이 스무 살에 엄마는 환갑이었다. 엄마가 어느새 이렇게 나이가 들었나 하는 생각은 중학교 입학하고부터 늘 했던 것 같다. 엄마의 부재에 대한 불안한 상상이나 꿈도 그때부터 이어졌던 것 같고. 지금의 나는 엄마가 어느새 늙었나 싶었던 그때의 나이보다도 한참을 더 먹었다.
화장을 좋아하지도 않고 잘하지도 않는 나이 먹은 내가 화장품 구색을 갖출 일은 없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 따로 화장대가 필요하지도 않다. 현관 거울 앞에 놓인 몇 개의 화장품이 내가 사용하는 것의 전부다. 사용하는 화장품도 오래된 것이다. 화장품도 유통기한이 있다며 딸이 수시로 버리지만 않는다면 나는 무심하게 사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현재 사용하는 것들도 이미 유통기한이 간당간당할 것이 분명하다. 언제 딸에 의해 버려지게 될지 모르는.
남편이 선물로 준 것들은 집안 어딘가에 조용히 잠자고 있다. 아주 특별한 만남이 생겨 그것들을 뽐내는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잘 있는지 가끔 찾아 확인하던 그 짓도 이제는 하지 않는다. IMF 이후로 금붙이가 한두 개 다시 생겼고 금값이 올랐다니 유용하게 쓸 때가 있지 않을까 기대만 하고 있다.
오래 신지 않았던 구두는 신발장 정리할 때마다 한 번씩 신어보곤 한다. 신으면 키가 쑥 올라오는 것이 다리가 길어지는 것 같은 효과를 내니 거울 앞에서 잠시 미소 지을 수 있다. 하지만 역시나, 시간이 지났어도 굽높이는 여전히 감당하기 쉽지 않다. 언젠간 버려지겠지만, 가죽도 모양도 새것과 다름이 없는 것들은 버릴 생각을 하기가 쉽지 않다. 새 운동화가 한 켤레 들어오면 억지로 구두를 하나씩 정리하는 정도로 어렵게 처리하곤 한다.
내가 엄마에게 그랬던 것처럼 어느새 딸이 화장품을 챙겨주는 나이가 되었다. 매번 사용량을 확인하고 챙겨 주는 꼼꼼한 배려가 고맙기도 하고 조금은 거북하기도 하다. 딱히 선명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챙김을 받는다는 것이 여러모로 복잡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것 같다.
인터넷 뒤지다 이런 글을 발견했다. '배려란 내 마음과 상대방의 마음에 난 길을 건너는 것입니다. 내가 그 길을 자주 건너가고, 더욱 튼튼하게 다져 주어야 상대방도 나에게 더 쉽게 올 수 있습니다.' 상대의 마음에 난 길로 내 마음이 건넌다는 것, 부모와 자식 간에도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부모의 마음은 언제나 자식을 향해서 맹목적인 일방통행이다. 자식에게 다가가는 그 길이 어떤 모습이든 엄마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반면, 나이 든 엄마를 향한 딸의 길은 조금은 다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딸의 입장에서 해 보게 된다. 그리고 그 길이 나로 인해 활짝 열릴 수도, 닫힐 수도 있다는 생각을 뒤늦게 한다. 아마도 딸은 그 길을 따라 찾아와 주고 문을 두드리고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