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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Sep 26. 2024

명랑한 차이(差異)

한 달 전부터 독서 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2주에 한 번 줌으로 만나 비경쟁 독서토론 방식으로 진행하는데, 내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듣는 재미가 쏠쏠하다. 내 이야기도 다른 사람에게 새로운 느낌이나 즐거움을 줄 수 있을까 생각해 보지만 아무래도 자신이 없다. 나는 즉각적인 생각이나 반응을 표현하는 것보다는 생각을 곱씹어 정리하고 정돈해서 말하는 것이 편한 사람이라 여럿이 모이는 자리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가볍게 말하는 것은 불편함을 느낀다.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도 내가 생각하는 불편함을 알아채지 않았을까.


첫 시간에는 헤밍웨이 명작 <노인과 바다>를 가지고 토론을 진행했다. 별점을 나누는 것으로 시작했는데 넘치게 후한 점수부터 테러 수준의 별점까지 다양했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하는데 양 극단의 생각들은 모두 신선하다. 나는 튀지 않게 중간 정도의 별점을 주었다.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명작을 보는 눈이 없는 건지 재미있게 읽지 못했다. 대놓고 명작에 악평을 할 용기는 없었기에 중간 정도의 별점으로 나름의 타협을 시도했다. 


소설을 읽을 때 인물에 깊이 교감하는 편이다. 그러나 <노인과 바다>에서는 어부 노인의 생각을 따라가는 것에 실패한 것이 그 이유라고 생각했다. 노인에게 지극한 소년의 생각을 따라가는 것에도 마찬가지였다. 가족도 아니고 이웃의 아이라고 칭하기에는 지나치게 어른스럽고 내밀한 것까지 속속들이 신경 쓰는 아이의 생각과 행동, 노인에 대한 돌봄의 마음이 이해되지 않았다, 거기에 배경, 문화가 주는 이질감이 영 와닿지 않았다. 작가의 필력, 문체, 스타일에 대해 감히 논할 것도 없이 우선 인물들에 대해 공감하지 못하니 마음을 다잡고 두 번째 읽는 것이었어도 명작의 포인트를 찾기 어려웠다. 



두 번째 시간은 조해진 작가의 <로기완을 만났다>였다. 역시 우리 것이 좋은 것 같았다. 첫 작품보다 인물과 상황에 깊이 몰입할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토론을 진행했던 두 작품만을 비교한다면 내가 느끼는 작품에 대한 이해의 차이가 우리말로 쓰인 것과 번역된 것의 차이일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작품은 이야기가 진행되는 상황마다의 미묘한 감정의 파도가 단계를 밟는 것처럼 깊고 진하게 다가왔다. 내가 살아온 경험의 구석구석에서 인물과의 접점이 만들어지는 것 같았고 위로받는 듯한 카타르시스도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나와 좀 달랐다. 우선 세 인물(주인공, 로, 박)의 아픔을 연결시키고자 하는 작가의 시도가 억지 같다는 평가였다. 주인공이 로의 외로움과 고통을 대신 분노하여 외치는 장면에서는 '미친*'이라거나 정신 나간 것 같다거나 지나친 감정의 과잉이라는 말까지 나왔고, 토론에 참여한 다른 사람도 그에 공감하는 듯한 말도 나왔다. 내가 절실하고 가슴 아프게 받아들였던 상황에 대한 냉정한 평가가 마치 나를 향하는 것 같아 당황스러웠다. 내가 느끼는 감정이 착오였나 되짚었던 순간이었다.


결국 그에 해당하는 논제에 대해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다음 논제에 대해 말하게 되었을 때 앞부분을 연결 지어 내가 생각한 바의 느낌을 보충해서 어렵게 얘기했지만 아무래도 독자에 따라 생각의 괴리가 컸던 작품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소설이라면 무조건 읽는 편이다. 많이 읽었고 무수한 인물들의 생애를 만났다. 인물들에게서 영감도 받았고 이를 바탕으로 삶의 방향을 설정하기도 했다. 충분히 감동적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시간이 지나면 쉬이 잊혔다. 순간의 감동에서 그치는 독서가, 짧은 기억이 얼마나 의미가 없는지 깨달았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기록해 두자고 마음먹었다. 기억을 붙잡기 위해 하는 기록하는 독서는 좀 더 꼼꼼해야 했다. 인상적인 구절을 메모하며 읽었고 메모 밑에 나름의 생각들을 적어 두었다. 정성스럽게 읽었다는 말을 할 수 있을 만큼 읽는 행위에 진심을 보였다. 당연히 읽는 속도는 느려졌다.


다행인 것은 예전처럼 책을 두고 마음이 급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여러 권 책을 빌리고 사서 쌓아놓지만 더 이상 마음을 조급하게 재촉하지 않는다. 시력도, 몸도, 사고도 나이의 속도에 맞춰 미세하게 조율하고 있고 적응하는 중이다. 느리게 읽어도 괜찮다는 생각을 요즘 가장 많이 하고 있다. 


독서의 효과를 높이는 깨달음도 얻었다. 방법은 깨달은 바를 삶에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의 관점에서 깨달은 바를 적용해서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하되 적용은 구체적일수록 내 것이 된다고 했다. 더도 말고 책 하나에 감동 하나 적용 하나면 나름 성공적인 독서가 될 듯싶다.




독서토론 이야기로 돌아가서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주춤해서 말문을 닫는 것은 유쾌한 반응은 아니다. 아쉽지만 완벽한 해법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서 토론은 계속될 것이다. 여전히 생각의 차이를 넘어서는 독서 토론은 즐겁다. 앞으로도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열심히 귀를 기울일 것이고 그들과 나의 차이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나름의 궁리도 할 것이다. 다만, 내 이야기도 다른 이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도록 마음을 여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독서 모임에 '나'를 강조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이런 사람이고 이렇게 생활을 해 왔고 이런 사고방식을 고수하다 보니 내가 이렇다고 말하는 사람. 이야기 하나를 꺼내도 삶의 경험을 시시콜콜 이야기하며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펼치는 사람. 논제 하나에 자신의 에피소드가 하나 이상은 꼭 들어가는 사람. 당연히 서론도 길고 본론은 더 길고 결론은 마침표를 찍지 못하다 밝은 웃음으로 마무리한다. 재미없으면 지루하고 따분할 텐데 다행히 목소리가 좋다. 그리고 명랑하다. 전달력은 부족하지만 느긋하게 미소 지으며 이야기의 마무리를 기다릴 수 있었다. 


여유와 관조가 나이 든 사람의 최고의 덕목이라고 생각했다. 김상용 시 <남으로 창을 내겠소>의 한 구절처럼 ‘왜 사냐건 웃지요’라고 말하는 차분한 태도. 내키는 대로 하는 것 같아도 섣부르지 않아 보이고 상대와 뜻이 맞지 않으면 내색하지 않고 적당히 물러서도 괜찮은 달관의 태도. 그러나 독서 활동을 하며 나는 나이 든 사람의 태도가 밝고 명랑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생각을 전달할 때 숨김없는 투명한 태도와 밝은 목소리로 모임의 분위기를 흔들어도 좋겠다는, 나도 그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점잖고 고요한 노년만 생각했는데 명랑한 노년도 괜찮지 않을까. 그동안 '유쾌하고 활발하다'는 의미의 명랑함을 '생각이 모자라고 어리석은'의 푼수와 동의어로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가벼운 태도로 보이지 않기 위해 말을 아끼다 보니 푼수가 되지는 않았지만 명랑함을 잃었던 것은 아닐까. 

아쉬운 대로 다음 독서토론은 명랑한 모습의 가면이라도 써 볼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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