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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Jan 16. 2020

고통을 나눌 수 있다는 희망에

<누가 뭐래도 하마>, 김선재(소설집)

누구나 한 번쯤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보지 않았을까. 나도 그랬던 것 같다. 어린 시절, 깊은 밤, 언니들과 나란히 누운 비좁은 방, 이어폰 없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소리는 최대로 줄이고, 그럼에도 소음이 이불 틈새로 나가 각각 한 마디씩 하는 꾸중을 듣고 그들의 몸을 뒤척이게 만들었던 날. 라디오를 통해 들려오던 나의 이름과 가공된 사연, 생소하고도 신기한 기억이다. 정작 어떤 사연이었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앙증맞은 방송 프로그램 로고가 포장지에 붙은 선물도 받았는데.


우리가 아는 굵직한 사건들은 기록이라는 이름으로 흔적이 남는다. 그럼에도 굵직한 그것들의 내밀한 사연을 우리는 다 밝힐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 사건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절망과 그들이 겪는 하루하루도 알지 못한다. 가늠하지도 못한다. 상처 받은 이들에게 희망은 라디오의 사연 같다. 꿈을 꾸던 것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 같기도 하면서 실재하지는 않는 것. 행복할 것 같은 삶을 이야기하지만, 삶은 막연하고 현실은 척박하다. 누구도 기억해주지 않고, 누군가가 알게 되면 시샘하고 재 뿌리는 일 투성이다.


가족에 의한 폭행 또는 성폭행은 드러나지 않는다. 세상을 흔들만한 굵직한 사건도 아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상처 받고 아프고 쓰러지는지 아무도 모른다. 더 들춰지지 않고 들출 수도 없다. 가까이 지켜보는 사람들도 외면하고 피할 뿐이다. 잊기에 급급하거나 저절로 잊히거나, 당사자만 제외하고 모두가 모르는 일이고 당사자만 제외하고 모두가 무죄다. 사람들은 남의 고통을 모른다. 늘 자신의 고통이 커서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큰 고통을 받으면 위로를 받으며 겉으로는 늘 힘들다고 하소연한다. 남의 고통에 진심이 담기기는 힘들다. 위선과 허위가 드러나지 않게 숨어 있으면 적당하다.


<아는 사람>의 지혜와 <한낮의 디지>의 디지는 친족 성폭행의 피해자다. 이들은 이유 없이 쫓겨나고, 잘못한 것이 없이 반성문을 쓴다. 성실하고 지속 가능한 삶은 이들에게는 사치다. 변화를 맞으려면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 디지는 남편과 헤어진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밤에 몰래 찾은 남편이 반갑고 안쓰럽지만 옆에 눕는 것이 너무 싫다고. 내가 필요할 땐 모른척하다가 지들이 필요할 때만 찾는구나 싶어  꼴도 보기 싫었다고.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의 근거는 디지만 안다. 25년 만에 그녀가 무덤을 찾은 이유다. 무덤의 주인에게, 그리고 방관자 혹은 고발자에게 사과를 받고 난 후 그녀는 할머니가 내다 버리고 싶은 심정으로 지은 이름인 디지를 버리고 해지의 삶을 살아가려고 한다.


<누가 뭐래도 하마>의 하마가 되고 싶은 양과 <아무도 모른다>의 어린아이는 친족 폭행의 피해자다.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이들은 처음부터 그런 모습은 아니었다. 단지 그들에 대해 돌보는 사람들의 이해가 없었을 뿐이다. 이해가 없다는 것은 참 무서운 것이다. 이해가 없기 때문에, 몰라서, 때리고 묶고 거꾸로 들어 올린다. 윽박지르고 경고하고 소리치고 내쫓고 매달고 외면하고 가둔다. 맞고 내쫓겨도 그 아이들은 아무 말을 할 수가 없다.


타인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람들도 자신의 삶은 잘 이해한다. 자신의 건강을 위해 필요한 것을 철저히 챙기고 일상을 조절한다. 그리고는 다른 사람에게 사람의 도리를 요구한다. 유조 씨는 양에 대한 이해가 없어 냉장고를 자물쇠로 채워 놓는 사람이고 씻으러 갈 때도 열쇠를 떼 놓지 않는다. 그의 식사 시간은 ’오전 8시, 오후 1시, 저녁 6시’, 이 규칙이 한 번도 바뀐 적 없다. 그는 ‘맑은 국, 흰 살 생선, 두부, 잡곡밥, 아몬드 스무 알, 제철 과일’을 먹는다. 다음 끼니를 위해 ‘호두 두 알’을 굴리며 외출하고 ‘흰 살 생선과 두부, 채소’ 등을 사서 귀가한다. 물론 냉장고 열쇠와 함께다.


양은 늘 주려 있다. “덜 슬프고 덜 굶을 수 있다면 개, 돼지가 낫다.”라고 말하는 양은 자신이 몇 살인지도 모른다. ”니 어미가 알겠지”, 유조 씨는 양의 물음에 늘 그렇게 무심하게 답한다. 허기진 양은 “허기를 수건 짜듯 짜낼 수 있다면 좀 가벼워질” 거라고 말한다. 양은 어느 날 라디오 방송에서 ‘삶에서 희망을 만들어 내는 것이 인간이 하는 일 중 가장 멋진 일’이라는 말을 듣고 희망을 만들어 낸다. 가장 멋진 일, 양의 희망은 ‘한 번밖에 못 먹어본 것, 두어 번 먹었으나 배불리 먹지 못한 것, 옛날에 먹었던 것, 자주 먹었지만 먹을 때마다 맛있는 것’ 등 먹을 것들을 떠올리는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사람들은 온통 상처 받은 사람들, 벼랑 끝에 간신히 매달린 사람들이다. 이들의 삶의 조건 자체가 의문이다. 자신들이 왜 상처를 받아야 하는지도, 왜 맞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세상은 지나치게 사소하고 아름다운데 이들은 이 세상의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은 채로 살아가고 있다. 이들이 살아가는 세상의 부당함은 셀 수 없이 많으나, 그런 이유로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많은 작가들이 상처를 말하는 것은 현실의 상처와 무관하지 않다. 고도로 발달하고 문명화되어 있어도 어느 건물 한쪽 귀퉁이에서는 지난한 삶이 재현된다. 참 징그러운 삶이다. 이렇게 살아도 살아진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삶은 희망이 있다고 말할 수 있나. 믿음만 가지면 행복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라고 말하기에는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서 버둥거리는 미물을 보는 것 같다. 다만, 이런 사실들이 드러남으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의 고통이 가시화되고, 공감되거나 혹은 분담될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는 것에 실낱같은 희망을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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