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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Nov 10. 2019

하루치의 갈망을 담아

<눈과 사람과 눈사람> , 임솔아

교과서에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학습활동으로 나왔을 때였다. 마침 200쇄 출간 소식이 뉴스를 타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집에 책을 가지고 있는지를 물었었다. 상당이 많은 수의 학생들이 손을 들었고, 어설픈 조사를 하면서도 그 숫자에 놀랐던 기억이 있다. 작가는 “200쇄 출간은 부끄러운 기록이지요. 억압의 시대를 기록한 이 소설이 아직도 이 땅에서 읽히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30여년 전의 불행이 끝나지 않았음을 증명합니다.”고 말했다. 이 땅에서 불행의 부끄러운 기록은 오늘도 더해지는 중이다.


한 달 후면 18세 생일을 맞는 유림(「병원」)은 엄마, 아빠라는 말을 배우기 이전부터 소년소녀가장이었고 기초생활수급자다. 베이커리 아카데미의 대표는 수료증을 빌미로 그녀를 수제 햄버거 숍에서 일하게 한다. 유림은 8시간을 쉬지 않고 6칸으로 나뉜 대형 튀김기의 12개의 타이머 다이얼을 돌려가며 프렌치프라이를 만든다. 유림의 실수로 튀김기에서 불길이 솟고, 몇천만원의 손해배상금이 청구된다. 대표는 수료증 나올 때까지 6개월을 무급으로 일하는 것으로 해결책을 제시한다.


유림은 124개의 알약을 삼켜 자살을 시도한다. 병원을 찾은 구청 생활환경과 직원은 자살시도는 질병이 아니라고 한다. 부정수급을 이야기하며 법대로 하면 처벌인데 넘어가 준다고 한다. 정신 병력이 인정될 경우의 보험 혜택을 덧붙인다. 잘 말하면 써 줄 거라고 하며. 유림은 정신과 의사에게 진단서를 부탁한다. 그러나 의사는 정상인 경우 보호자를 데려오면 발급해 주겠다고 한다. 보호자가 없는 유림은 미친 듯 웃으며 정신과 의사에게 쓸 말을 그럴듯하게 ‘플레이팅’ 한다. 편지를 읽고 정신과 의사는 ‘완전히 정상인 경우’에 발급 가능한 정신병 진단서를 발급한다. 의사의 ‘윤리적 거짓’에 따른 진단이다.


작가 한강은 "존엄과 폭력이 공존하는 모든 장소, 모든 시대가 광주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세상은 구석구석 존엄과 폭력이 공존하고 있고, 소년소녀가장인 유림이 살아내야만 하는 현실이다. 유림에게 다가온 현실은 아무도 다정한 풍경을 만들어주지 않는다. 그들은 성급하게 손을 내밀고 알 수 없는 눈빛을 보낼 뿐이다. 그러고는 이내 등을 보이고 돌아선다. 무엇이 존엄이고 어떤 것이 폭력인지도 모르게, 그들의 나라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당연하게 벌어진다.


삼백만원이 넘는 병원비는 정신질환자가 되니 19,170원이 된다. 구청 직원의 호의는 의사의 윤리적 거짓으로 이어진다. 정신과 의사의 윤리적 거짓은 유림에게 개인 보험도, 취업도, 결혼이나 이민도, 교통사고나 소송에서도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유림은 스스로는 단 한 번도 소년소녀가장이라고도 기초생활수급자라고도 말한 적이 없다. 그녀는 이제 스스로 정신질환자가 되었다.


유림은 출발을 망설인다. 이제 유림은 아무 것도 얘기하지 않고 병원을 퇴원한 사실 하나만을 가지고 베이커리 아카데미의 대표를 설득해야 한다. 이만 원을 내고 받은 거스름 돈 830원을 손에 쥐고 유림은 병원 문을 나선다. 쉬어가라는 달콤한 제안을 받은 것처럼 병원 정문의 벤치에 몸을 누인다. 그렇게 혼자 우울한 하루를 다시 시작하려 한다. 유림에게는 여전히 밥을 먹어야하고 버스를 타야하고 베이커리 아카데미 수료증이 필요하다. 그녀는 완벽히 정상인 정신질환자이므로.


유림과 마찬가지로 기열(「줄 게 있어」), 지은(「다시 하자고」), 정원(「추앙」), 기정(「뻔한 세상의 아주 평범한 말투」)은 모두 아프다.


아프다는 게 뭔지 아니. 정상이 아니라는 거야. 정상이 아니면 사람이 아프게 되는 거야. 정상이 되고 싶은 건 욕망이 아니라 균형 감각이야. 인간은 항상 회복을 지향하도록 되어 있어. 정상일 때에는 자기가 정상인 데 둔감하지만, 비정상이 되고 나서는 정상이 무엇인지를 뼛속 깊이 생각하고 갈망하게 되는 법이야. 갈망이 신호를 보내는 게 아픔인 거야.(「뻔한 세상의 아주 평범한 말투」,p.103)


삶의 균형감각을 지켜내려면 매일을 아무렇지 않은 듯 나아가야 한다. 균형을 잡기 위해 때론 벽에 기대어 걸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걸음걸이는 슬프다. 내일은 다른 슬픔이 그들을 찾을 것이다. 그렇게 아슬아슬하고 위태롭지만 마음을 부여잡으며 하루를 갈망하고 견뎌내고 있다. 살다보면……, 가능할지 모르는 이 말은, 갈망과 본능적 균형 감각이 어쩌면 그대들을 살릴 수 있을까 무심한 기대를 하고야 만다.


‘서울 성북구 네 모녀 사망’ 기사가 포털을 장식한다. ‘조손’ ‘세 가족’ ‘부부와 남매’ 등을 잇는 기사다. 당사자들은 이 세상에 없는데 사람들은 책임과 대책을 이야기한다. 그들의 존재가 누군가의 책임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그들의 부재가 누군가의 대책으로 위로받을 수 있을까. 뉴스는 경제적 빈곤이 관계의 빈곤을 초래했고 결국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진단했다. 사람은 누구나 외롭다, 세상은 혼자 사는 것이다,는 말들은 더는 위로가 되지 않는다. 누군가는 그들 편에 서야 하고, 그들의 손을 잡아 주어야 한다. 균형을 잡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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