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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Feb 06. 2020

결혼은 도피가 아니다

<풀잎은 노래한다>, 도리스 레싱

결혼 상대자를 고르는 기준,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지 살펴라. (생계, 재정적 책임감, 좋은 부모의 자질을) 상식적으로 검토하라. 가치관이 일치하는지,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라. 상대의 가족을 알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주변의 평판, 분노조절, 술을 절제할 수 있는지) 리스크를 검토하라. 이 외에도 외모와 신앙을 결혼의 중요한 기준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 사랑을 하면 그다음의 것들은 보이지 않는다. 그다음의 것들을 충분히 충족되었다면 이미 사랑이 전부가 될 수 없다. 모두 고려해 적합한 사람을 만났다면 인생의 절반은 이미 성공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책이 쉽게 읽히는 이유는 메리의 상황이 동시대의 우리 여인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당시 남녀가 사랑을 확인하고 결혼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었을까. 메리 또한 그러하다. 그녀는 사랑을 확인할 여유가 없고 이유도 없다. 그녀의 결혼은 해야 할 때가 되었으니 적당한 남자를 만났고 타협할 수 있는 조건에 부합한다고 느꼈기 때문에 급하게 결정된 것이다. 그녀는 상대자를 고르는 기준 중 어느 하나도 살피지 않았다.


당장의 필요에 의한 무책임한 결혼, 문제의 시작이다. 자신에게 향하는 조롱으로부터의 탈출로로 결혼을 선택한 그녀, 자신보다 강한 남자가 필요해 선택한 결혼의 결말은 자명하다. 스스로 삶을 만들어갈 수도, 이루어낼 수도 없다. 그녀는 결국 자신의 처지를 냉정하게 확인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고, 그때부터 메리는 스스로를 파괴한다. 살아보려고 노력했던 모든 것에서 손을 놓아 버린다. 무기력에 빠지게 되고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내린다. 그녀의 마지막 모습은 마치 다자이 오사무의 말대로다. "사람답게 살지 않으면 어때요. 우린 살아있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메리는 남편인 리처드 같은 남자와 결혼한 여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두 가지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즉, 정신이 어떻게 돼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이기지 못해 자신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거나, 아니면 이를 악물고서 쓰러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써 보는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모세가 등장한다. 메리의 병적인 신경질증과 무기력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을 붙잡고 조종하고 있는 듯한 모세. 일반적인 주종관계가 아닌 모세와 메리의 관계는 기형적이다. 식민지 시대의 노예는 인간이 아니었는데, 메리와의 관계에서 모세는 메리에게 둘 사이의 관계 결정권을 넘겨받는다. 선교사의 밑에서 있었다는 그의 이력에 비추어 볼 때, 그는 적어도 변화를 꿈꾸는, 인간이 되고자 하는 노예였던 것으로 보인다. 병증을 앓는 메리에게 모세는 노예가 아닌 당당한 인간의 모습으로 말하고 관계를 이끈다.


메리에게 맞닥뜨린 상황은 공포다. 그녀는 모세에 대해 안도하기도 하고 불안에 떨기도 하고, 피하기도 하고 찾기도 한다. 정체를 확인할 수 없는 혼란 그 자체다. 메리의 혼란을 남편인 리처드는 알았어야 했지만 그 또한 병든 사람일 뿐이다. 대지를 사랑하는 남자. 마치 흑인들과 같은 모습으로 일하고 생활하는 리처드는 땅을 사랑할 뿐, 돈을 버는 것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쌓인 빚에 대해서만 예민한 소심한 농장주다. 가난한 리처드는 가난한 생활을 천형으로 생각하는 인물 같다. 그의 이런 태도는 메리에게 정신적 혼란을 가중시킬 뿐이다.


메리가 모세에게 느끼는 감정의 정체는 “어머니로부터 경멸받았던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그리움의 혼합된 감정”이라고 진단한다. 부모의 부재 하에 20세에 이미 삶의 기반을 마련한 메리였지만, 농장의 노예들을 다루는 것, 농장의 삶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다. 그녀의 결혼으로의 도피는 무식하기 때문에 용감한 결정이었다. 여기에 리처드가 메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 리처드가 메리에게 느낀 감정은 순간의 착시에 의한 것이었으며 그로 인해 둘은 서로가 하는 말은 듣지 않는 결혼 생활을 시작한다. 메리 또한 리처드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결국 두 사람 모두 사랑 없이 시작된 결혼이다.


첫 페이지에 등장하는 시, 시의 한 구절이 소설의 제목이다.

산속의 이 황폐한 계곡
희미한 달빛에 싸여 예배당 주변의
나자빠진 무덤들 위에 풀잎은 노래한다
텅 빈 예배당, 다만 바람의 집이 있을 뿐,
마른 뼈들은 아무에게도 해를 주지 않는다
다만 한 마리 수탉이 지붕마루에 앉아
꼬 꼬 리꼬 꼬 꼬 리꼬
번갯불 번쩍이는 속에서, 그러자 비를 몰아오는
습기 찬 바람

갠지스 강은 바닥이 나고 축 늘어진 나뭇잎들이
비를 기다렸다, 멀리 히말라야 산 위에
먹구름이 몰렸다.
밀림은 말없이 허리를 굽혀 웅크리고 있다.  
그때 천둥이 말했다.
                                                  - T. S. 엘리엇, 「황무지」


결혼 직후 잠깐 환했다가 다시 사그라지는 두 부부의 지붕 없는 집. 아프리카의 열기를 감당하기에는 침략자인, 영국인이자 농장주인 리처드와 메리는 전혀 전투적이지 않다. 리처드가 농장, 땅을 사랑한다는 것 자체가 시대의 모순이다. 땅을 사랑하는 남자와 한 번도 나무숲과 풀숲에 나가본 적이 없는 메리에게 풀잎은 무어라 노래했을까. 어떤 사연을 노래했을까. 메리가 한 번도 사랑으로 들은 적 없는 주변의 것들의 소리, 풀잎의 노래. 습기, 더위, 열기……, 그것에 대항하지도 어우러지지도 못한 나약한 부부의 바람의 집.


이 작품은 2007년 '황금 노트북'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던 작가 도리스 레싱의 데뷔작이다. 백인 남성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메마른 남아프리카의 불모지에서 절망과 고독 속에 쇠잔해 가는 가난한 백인 여성의 분열을 그리고 있다. 또한 소설은 정체된 식민지인 남아프리카의 병리 현상을 신랄하게 고발하고 있다. 식민 사회의 부정과 병폐를 그저 감추려 하는 백인 남자들이 메리가 살해당한 사건을 미개한 원주민이 아무 동기 없이 저지른 살인 사건으로 묻어 버리려 하는 모습이 소설의 첫 장에 그려진다. 그러나 그다음부터 소설 전반에 걸쳐 메리가 죽음에 이른 것은 단지 흑인 하인의 우발적인 범행 탓이 아니라는 점을 설명한다.


메리는 죽는다. 그녀는 사람들의 비난을 듣는다. 리처드는 불쌍한 남자가 된다. 경찰은, 마을 사람들은, 영국인들은 모든 잘못은 메리에게 있는 것으로 살인 사건을 결론짓는다. 집안을 바로 세워야 하는 안주인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비난이다. 사건은 감춰지고 진실은 은폐된다. 


작품에서 모세는 메리에게 묻는다.

부인은 (전쟁이) 곧 끝날 거라고 보시나요?
예수는 사람들이 서로 죽이는 걸 옳다고 생각했나요?


지구상에서 전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종교는 사람들이 서로 죽이는 것에 대해 아직도 답하지 않고 있다. 인간은 실패한 문명을 반복하고 있다. 

하나의 문명이 지닌 약점은 그것이 저지른 실패와 부적합성으로 가장 잘 파악할 수 있다.
                                                                                                                                   - 작자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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