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인생에 두 번의 절필 결심을 했다.
사실 글을 제대로 써 본 적도 없고 남들도 알지 못하니 절필이라는 거창한 말을 하기조차 민망하지만 글을 쓰지 않았던 시절이 있으니 그건 소소하지만 절필이 맞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는 열 다섯 겨울이었다.
- 시는 유행가 가사가 아니란다. 감정을 그냥 쓰는 것이 아니다.-
국어 선생님의 한마디에 커다란 돌더미가 나에게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다.
부끄러워서 쥐구멍을 찾고 싶었다.
나는 당시 아이 수가 많아서 한 학년에 오백 여 명 되는 여중학교에서 제법 글 좀 쓴다고 소문난 아이였다. 초등학교 4학년에 동시를 써서 학교 대표로 멀리에 있던 대도시에서 열리는 학생문예대전에 참가했었다. 나는 그때까지 동시가 뭔지도 잘 몰랐다. 교과서에 나와 있는 동시 말고는 읽어 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생애 처음 쓴 동시로 큰 대회에 나갔다.
초등학교 6학년 때는 수업 시간에 쓴 나무라는 산문을 담임선생님께서 전교생을 대상으로 하는 아침 조회 시간에 낭송해 주셨다.
부끄럼이 많아서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기도 힘들었고, 알 수 없는 허무함과 무기력에, 빠져 동네 소문나게 공부 잘하는 동생들에 치여 살아도 가슴속 깊숙한 자부심은 나는 글 좀 쓴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선생님의 이런 평가는 내 존재에 대한 무의미함을 느끼게 했다. 그 뒤로 알게 되었다. 선생님 말씀은 시적 기교도 없고 진실함도 없는 그냥 겉멋에 들린 유치한 사춘기 여학생의 시에 대한 평가였다.
하지만 진실은 모르고, 꺾여 내린 자존심에 나는 절필을 결심했다.
그리고 그 뒤로 쓰지 않았다. 아니 쓸 수가 없었다. 글을 쓰고 싶으면 어떻게 쓰는지에 대한 적절한 공부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방법을 전혀 모르고 그저 글 몇 편 시 몇 편에 받은 칭찬에 올라간 나는 진실 앞에서 가장 편하고 상처받지 않을 방법을 찾았다. 쓰지 않겠다고... 그리고 정말 쓰지 않았다. 그때까지의 삶의 시간만큼...
열다섯에 절필하고 다시 쓰기 시작한 것은 서른한 살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 사이에 국어 선생님이 되어 아이들의 글쓰기 지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쓰지 않았다. 쓸 수 없었다.
내가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해서 글쓰기 지도는 하지만 나는 작가의 능력은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서른한 살 봄
나는 학생들을 인솔하는 교사로 한 지역 백일장에 참가했다.
백일장에서는 교사들에게 학생들에게서 떨어져 있으라는 암묵의 지시를 했다.
그날도 나는 학생들에게 떨어져서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앉아 있는 곳에 앉았다.
잠깐 망상에 빠져 있는 나에게 누군가 종이와 볼펜을 주었다.
나는 학생들에게 여분의 종이와 펜을 주라고 교사에게 주는구나 싶어서 받아서 옆에 두고 있는데 종이와 펜을 받은 사람들이 모두가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뭘 적어야 되나 싶어서 종이를 보니 원고지 위에 일반부라고 쓰여 있고 제목이 쓰여 있었다.
갑자기 깨달았다.
나는 백일장 일반부 사람들이 글 쓰는 사이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민망해서 일어나려다 보니 제목이 참 맘에 들었다.
문득 내가 글을 써도 아무도 모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글을 써서 제출했다.
그리고 상도 받았다. 상은 사람을 춤추게 한다.
그 뒤 나는 아무도 모르게 백일장에 참여했고 가끔 독후감 쓰기에도 응모했다. 대체적으로 소소한 등수에 당선했다. 하지만 신춘문예나 자가 등용 대회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나는 전문 작가가 되기에는 일프로 부족한 뭔가가 있다고 생각했다. 변명 같지만 본격적으로 글을 쓸 시간도 부족했다. 솔직히 난 게으른 사람이다.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기에도 힘이 들어 다른 여력은 없었다. 그냥 남는 시간에 잡글을 쓰는 즐거움 정도로 만족했다.
그러다 뒤늦게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남편을 따라 외국에도 한두 번 다녀오고 하는 동안 그냥 글을 쓰지 못했다. 너무 바쁘고 정신없고 힘들어서 연명하며 한 이십여 년을 살았다.
몇 년 전 난 퇴직을 했다.
그리고 시간이 남았다. 물론 시간이 넉넉하지는 않았다. 어설픈 살림에 어린 딸아이 키우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젊은 시절에 비하면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나는 퇴직 후 브런치를 시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작년 여름 처음으로 제법 큰 응모 전 두어 곳에 응모했다. 난 자신감에 흥분이 될 정도였다. 난 당선이 될 거라는 알 수 없는 근자감에 설렘을 가졌다. 그러나 두 곳 모두 낙선했다. 열 다섯 살 때 들었던 국어선생님의 말씀보다 충격이 컸다.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그래서 글을 쓸 수가 없었다. 첫 번째 절필이 내가 선언한 것이라면 두 번째 절필은 선언은 아닌데 글을 쓸 수가 없었다.
한 달, 반년, 일 년이 다 되어 가는 얼마 전 딸아이가 물었다.
- 엄마 독후감 안 써?-
-응-
-왜?-
-그냥... 난 재능이 없나 봐...-
- 독후감이 재능이 필요해? 엄마 독후감은 계속 썼잖아-
독후감은 글쓰기와는 상관없이 십여 년 이상 계속해 오고 있다. 책 읽기와 연관해서 읽은 책에 대한 정리를 위해서 또 수업에 자료로 쓰려고 계속해 오던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작년 여름 이후 읽은 책들에 대한 독후감도 쓰지 않고 있었다. 아이는 자신이 읽고 있는 책에 대한 내 의견을 듣고 싶어서 물어본 것이었다.
딸의 말을 듣고 난 숙제하듯 노트북을 켜고 독후감을 쓰기 시작했는데 잘 써지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일 년 가깝게 나는 글을 쓰지 않았다. 새삼스러운 생각에 이것저것 보다가 브런치에 들어왔다. 거의 일 년 만이었다. 예전에 알던 작가들보다 새로운 작가들이 많았다. 나는 충동적으로 글을 한 편 썼다. 글을 쓰고 발행을 누르고 나자 갑자기 가슴이 설렜다.
이것으로 나의 두 번째 절필은 끝났다.
남들은 심지어 지인들조차 내가 글을 쓰는지도 모르는데 절필을 한 내가 우습기도 했다.
내 글쓰기는 내 마음을 치유하고 내 삶에 대한 기록이었다. 나 스스로에 대한 위안이었다. 난 작가를 꿈꾸었던 적은 없다. 글도 쓰는 내 삶이 좋았을 뿐이었다. 아니 지금도 좋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꼈다.
나는 글쓰기가 좋다.
나는 글쓰기를 하면서 나에게 말을 한다.
때로는 세상과 불화하는 나에게 위로도 하고,
외로운 나에게 친구처럼 말을 하고, 상처받은 내 마음을 치유해 준다.
아무도 모르는 글쓰기를 하면서 나는 스스로 성장해 가는 것이다.
나의 절필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