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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을나무 Nov 15. 2021

떠돌며 살다 보니

중학교 2학년 때 내 친구는 상당한 신기가 있었다.

평범한 시골 중학교 학생으로 역동의 80년대를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던 나에게 한마디 했다.


- 니 외국 나가서 살겠다 -

- 왜? -

- 손등에 파란 점이 있으면 외국에서 산대. -

- 나 영어도 잘 못하는데? -

- 우리 위집 언니도 손에 파란 점이 있었는데 서울 공장에 갔다가 미국 사람이랑 결혼해서 미국에서 산대.--


그때는 내가 이렇게 떠돌며 살 줄은 몰랐다.

친구의 말이 다시 떠오른 것은 몇 나라를 떠돌다 돌아와 헉헉거리며 직장생활을 하던 어느 날 동네 목욕탕 욕조에 앉아서였다.  


바쁜 일상을 쪼개 들른 동네 목욕탕 욕조에 수증기가 뿌옇게 차오를 때 아무 생각 없이 손등 바라보던 나는 문득 신의 계시처럼 친구의 말이 들리는 듯했다. 어려서부터 있던 점이라 손등 봐도 인지 하던 못하던 때가 많았는데 그날은 물에 불어서인지 유독 또렷하게 보였고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무려 삼십 년도 전 일이고 그 말을 했던 친구가 누구였는지도 생각이 나지 않았지만 외국에서 살 거라던 그 말이 떠올랐다.


그 말을 계속 생각하고 살았으면 내 삶이 좀 더 나았을까

운명은 존재하는가

수증기 피어오르는 탕 속에서 오랜만에 참 철학적인 생각을 했고 그 덕에 딸아이 픽업이 늦어져서 성깔 있는 우리 딸 길거리에서 늦게 온 나보고 울고 불고 한바탕 했다.


나는 고등학교 과학선생님이던 아버지의 발령으로 전라도 보성군 벌교면 어느 동네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이 년 뒤 아버지의 발령으로 그곳을 떠난 뒤 다시는 가본 적이 없으니 잘 모른다. 그다음엔 아버지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여중학교를 졸업했다.


그 사이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나 탁월한 교육열을 지닌 어머니는 딸아이 많이 배워보았자 팔자 사납다는 주변 어른들의 충고를 가볍게 무시하고 나를 데리고 광주로 이사하셨다. 그곳에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졸업했다.


그때는 제법 인지가 발달할 만한 시기였지만 어머니의 강력한 보호 아래서 나는 그저 별생각 없었다. 멀리 떠날 수 있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 전라도를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었다. 수학여행 빼고는 말이다.  


그런데 졸업과 동시에 우연히 친구가 전한 교사 모집에 응시했다가 덜컥 붙었다.

나는 수학여행 말고는 처음으로 전라도를 벗어나 섬진강을 넘어 거제도에 첫 발령을 받았다.

거제도는 집이 너무 멀었다.

가까운 하동으로 옮겼다가 너무 시골 학교라 오후 여섯 시면 나 혼자 남고 모든 동료들은 다 옆 도시로 돌아가는 것이 싫어서 나도 나름 도시로 옮겼다.

마산으로 옮겼다. 마산에서 두 학교를 거치며 팔 년을 있었는데 지역 임기가 끝나서 김해로 옮겼다.


경상도를 하동 거제도 진주 마산 김해까지 횡으로 이동하며 살았다.


사람들은 물었다.

왜 전라도 여자가 경상도에서 혼자 교사를 하며 사는지?

외롭지는 않은지?

집으로 옮기려 했지만 광주에는 자리가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무 연고도 없는 지역으로 옮기고 싶지도 않았다.

또 살다 보니 친구도 생기고 익숙해지니 나는 고향을 점점 잊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십오 년을 고향을 떠나 살던 나는 이번에는 좀 멀리 떠날 기회가 생겼다.


뒤늦은 결혼으로 나는 유럽으로 가게 되었다.

학교 생활이 좀 지쳐 갈 때였다.

돌아와서 주말 부부를 하며 늦둥이 딸을 키우다가 드디어 나도 경기도 안산시 주민이 되었다.


남편이 또 베트남으로 가자고 꼬드겼다.

아이 키우며 학교생활이 힘들어서 남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짐을 싸고 딸아이를 업고 베트남으로 갔다.

이 년 만에 두바이를 찍었다.

돌아오니 오랜 휴직으로 학교가 멀리 발령이 났다.

고양시였다.


태어나서 바람소리 나게 움직이는 엄마를 따라다니던 딸아이는 이곳이 고향인 줄 안다

칠 년을 살았다.

그리고 온갖 핑계를 대며 삼십 년 교직 생활을 끝냈다.

내가 퇴직 신청서를 제출했다고 하기가 무섭게 남편은 해외 파견을 원했고 이번엔 중국 칭다오에서 한자와 싸우며 살고 있다.


문득 거실에서 바라보이는 바다를  보다가

센 물결에 도가 흘러가는 것이 마치 내 인생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론 원해서, 때론 어쩌다 보니


한때 시골 기차역에서 표를 팔며 평생을 살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삶이 참 그리웠다.

어제의 친구와 오늘도 같이하고 내일도 같이 있을 수 있다는 약속과 계획이 가능항 삶이 그리웠다.


항상 새로운 곳에서 항상 새로운 사람들과 살아온 반 백 년이 참 숨이 차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소박한 나의 꿈을 친구가 깨 주었다.

근데 왜 기차역이야?

넌 떠나는 것이 좋은 거 아냐?


손등의 푸른 점이 역마의 삶을 예견해 주었는지

역마의 삶을 살다 보니 손등의 점에 위안을 삼았는지 알 수가 없다.


한 가지

 내 삶은 항상 기대되는 삶이었다.

새로움이 주는 변화와 대를 꿈꾸는 삶이 아니었나 싶다.

나이 들 수록 가끔 그 기대가 버거워지기도 한다.

언젠가 어디엔가 정착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있는 한 떠도는 삶도 꼭 비극적이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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