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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자유리 Oct 04. 2019

행복하기때문에 불안한 당신에게 보내는 글

때론 철학이 나를 자유롭게 만든다.





도시는 매콤한매연을 내뿜고 있고,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는 뒤돌아보지 못하고 하늘 한번 올 곧게 바라보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매일을 바쁘게 살아갑니다. 지혜를 지식처럼 우려넣은 우를 범하듯, 우리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위해, 타인의 기대를 충족하는 실수를 반복합니다.


21세기는 인정욕구의 시대입니다.




우리는 ‘거대집단’이라는 곳에서 언제든 벗어나서는 안된다는 강박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가족, 지인의 범위를 벗어나는 적당한 선을 유지하는 타인의 집단 속에서 우리는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유튜브는 일종의 시선의 시스템이고 우리는 정교한 시선들 사이에서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과정은 필히 사람들로 하여금 타인과 나에 대한 구분을 어렵게 만들며, 그들이 보는 시선을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요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보다 쿨해보여야 하고, 그래서 행복해야만 합니다.

안타깝게도 ‘강박’은 ‘어둠’을 이끌어옵니다. 현대인은 그래서 원치않는 불안을 먹고 살아갑니다.





먹기만하는 방송이 뜨는 이유는 지금의 행복을 약속해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방송을 보면서, 나도 모르는 편안함을 느낍니다. 지금의 불안을 잠재우기위해서, 우리는 쉽게 쾌락을 허하고, 조금 더 쉬움을 택합니다. 자아의 소멸 방식은 나를 편안하게 합니다. 약속을 보증하고, 타인의 욕망에 충족하는 삶은 깊은 생각을 요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한나아렌트라는 사상가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사색하지 않음, 생각하지 않음이 바로 진정한 악의 실체이다.”





그렇다면, 생각해보겠습니다.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나. 정말 무탈하게 잘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그 대답을 올곧게 하기위해 우리는 한가지 우리 짚고 넘어가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여러분, 정말 잘 존재하고 있습니까?





질문이 조금 낯설게 느껴지실지 모릅니다. 지금 여기에, 나는 이미 글을 읽고, 느끼며 살아가는 것 아닌가요? 이 정도면 나, 정말 괜찮은 편 아닌가요? 존재가 뭐 대단한 것인가요?

여러가지 생각이 들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제가 드리는 질문은 조금만 더 깊게 생각해보신다면, 다양한 의미를 이해하시게 될 겁니다.

저는 이런 질문을 드리고 싶어요.



“타인의 기대를 모두 빼버렸을때, 당신에게 남는 그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존재에는 일종의 존재의 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바로 ‘표면의 층과 내면의 층’입니다. 표면의 층에는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쉬운 존재가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존재라기보다는 “역할과 지위”라고 정의하는 것이 더 맞을것 같습니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역할과 지위는 당신의 존재를 증명합니다. 변호사는 변호사의 존재에 맞게 자신의 의뢰인을 변호합니다. 건축가는 자신의 존재에 맞게 설계를 하고, 장비를 사용해 건축을 합니다. 그리고 그는 거기에 맞는 존재감을 느낍니다.




아버지라는, 혹은 어머니라는 역할, 누구의 딸이라는 의미, 역시 그저 표면에 존재하는 층이라 생각하시면 좋습니다.

이렇듯 표면의 존재층은 누구나 지니기 쉽습니다. 자본주의는 이 표면의 존재층을 자극하는 구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표면의 존재함을 얻기위해 노력을 하기 쉬운 것이지요.






반면 내면의 존재층은 전혀 다른 분야입니다.

사람마다 표면의 존재층은 비슷한 업무와 활동을 요합니다. 하지만 내면의 존재층은 같은 사람이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입니다. 비슷한 경험, 비슷한 환경, 심지어 비슷한 유전자를 가진 형제간에서도 다른 결과가 나오는 경우를 많이 보셨을 겁니다.




똑같은 직업군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도, 그들이 업무에 집중하는 방식이나 일에 대한 접근은 천차만별입니다. 그가 어떤 경험을 하고, 어떤과정으로 성장했는지에 따라 얻어진 그의 성숙도는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어내지요. 내면의 존재층은 성숙을 요하는 미지의 영역입니다. 우리가 명상을 하거나, 책에 깊게 빠지거나, 스승을 만날때 우리는 내면의 존재층을 얼핏 느낄 수 있습니다. 이는 사회적인 관계가 강한 자본주의에서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층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 내면의 존재층이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바로 타인의 모든 기대욕구를 제외한 나의 존재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내면과 외면의 일치가 진정한 존재이다.









진정한 존재함이란 표면의 존재와 내면의 존재의 일치를 의미합니다. 제가 아는 프로들의 대부분의 존재의 일치함 속에서 업을 그려나가는 분들입니다.

그러나 많은 분들이 표면에 표상된 존재를 보면서 그것이 그의 전부라는 생각을 해요. 표면에서 표상된 존재는 언제나 진실인척을 귀신같이 잘 하기 때문이지요.




간단하게 이렇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강남에 땅이 1000평이 있는 사람은 부자이다.”

 



이런식인것입니다. 누군가의 기대와 누군가의 잣대가 만들어낸 도식이 존재합니다. 사실 부자의 정의는 사람마다 다른 법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저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지 않습니까?




“벤츠의 차량이 다마스보다 좋은 차이다.”

마치 이런것처럼 누군가가 명확하게 알려준적은 없지만, (절대 그래서도 안되지만,) 우리는 이미 다 알아버린 통합된 각자의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것이 나의 모든 존재이유라고 착각하기 쉬운 것이지요.



내가 사용하는 나의 물건, 재산이 나를 대신합니다.

당연히 이런것들이 나의 존재를 더 불안하게 만드는 것인데도 말이지요.



그래서 진실된 존재를 가진 고수들은 내,외면의 일치를 가지게 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누가 누구보다 더 나은 것은 존재하지 않아요. 그저 다름만이 있을뿐이지요. 당연히 내면에는 판단과 평가가 아닌 ‘인문적 시선’이 존재합니다.

내면에서부터 존재가 올라오는 그들은 조급하지 않습니다. 조급할 필요가 없지요. 각자가 전혀 다른 세계를 살아가는데, 조급할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요.

이 모든 시작은 나의 기준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나의 기준을 정할때 당신이 반드시 꼭 기억해야 할 한가지가 있습니다.



오직 나에 대한 진실만이 ‘내면의 존재’를 증명합니다. 그리고 이때 우린 ‘만성적 불안감’을 잠재울 수 있습니다.








스스로에게 기준을 정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선 나에 대해서 진실할 수 있는 것이 시작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불안감을 가집니다. 내면으로부터 밀려오는 원하는 일을 하지 않는 현대인들, 존재의 일치감을 잘 느끼지 못하는 삶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늘도 소비와 소유를 통해 애써 자신의 불안감을 잠재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또 다른 강박과 중독증상을 불러옵니다. 물건을 소비해보신 분들은 전부 알거에요.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내가 가진 대부분의 것들이 소외되게만 느껴집니다.신발장에 구두는 쌓여갑니다. 그러나 계속 비슷한 하지만 약간 다른 구두를 구매하는 마음처럼 언제나 내게 돌아오는 것은 늘어나는 택배상자뿐입니다. 변화되는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바쁘게 살아가지만 나는 언제나 그 자리에 그대로 서있는 기분이 듭니다. 묘합니다. 다시 나는 또 불안감을 느낍니다. 이렇게 우리의 자본주의 패턴은 비슷하게 작동이 되지요. 문제는 당신은 이 진실을 계속해서 외면한다는 것입니다. 이 고리를 끊지 않는 한 당신이 세운 기준은 내면의 가치에 부합될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불편한 진실을 마주해야 합니다.








이제 나를 진지하게 돌아봐야 합니다.

당신이 살고 있는 어떤 부분부터 타인의 기대와 욕망이 채워졌는지를 냉철하게 지켜봐야합니다.

이게 왜 중요하냐면요. 당신 내면에 있는 타인이 만든 성탑을 무너트릴때에만, 당신은 기꺼이 타인앞에서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저는 지금 몹시 불안합니다.

그래서 지금 옷을사고, 조금 더 나은커피숍을 가서 사진을 찍으며,

조금 더 고급스러운 차를 비싼 할부로 삽니다. 왜냐면 나는 행복해보이고 싶다는 강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강박때문에, 쓸데없는 영상을 보다가 잠을 잘 못이룹니다.

맞아요.

나는 불안합니다. 나는 타인이 나를 평가하는게 두렵습니다.

믿을 수있는 사람이 적고,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없어질까봐 나는 정말 무섭습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옷을 삽니다.






제가 감정코치의 일을 할때 저는 그들이 진실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줍니다. 자신이 타인으로부터 받아온 적지않은 영향들을 토해내고, 바라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줍니다. 이때 정말 많은 분들이 참회의 눈물을 흘립니다. 그(녀)가 흘린 눈물은 진실의 눈물입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닦아줄 수 없는 빛나는 눈물은 바로 내면의 존재를 알아차려준 것에 대한 고마운 눈물이지요. 그 눈물이 저는 정말로 감사합니다. 진실은 말이죠. 그 어떤 인간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진실은 침묵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진실은 말이죠. 언제나 나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순간에 반드시 고개를 쳐내밀고 나를 응시하게 됩니다. 표면의 존재만을 따라온 나의 삶에 불현듯 찾아온 내면의 진실 한조각을 나는 견뎌 낼 항체가 없습니다. 작게 시작한 나에 대한 불편한 진실을 지금이라도 마주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바로 나의 절대존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두려움을 떨쳐낼때에 오는 진짜 행복감을 느껴라.




자신의 진짜 업을 오랫동안 고민하신 분이라면, 내면의 존재가치를 바라봐야합니다. 그래야 내가 하는 일에 대한 재정의를 내릴 수 있지요. 같은 영어강사를 하더라고, 누구는 다른 가치를 만들어냅니다. 내면으로 부터 밀려오는 철학이 탄탄한 스승은 제자를 옥죄려 하지 않습니다. 조급하지 않기 때문이죠. 그가 스스로 세운 자신만의 기준을 타인에게 강요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아이들이 스스로 자신의 기준을 세울 수 있게 조력할뿐입니다.





이는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밀려오는 두려움을 이겨내는 자만이 얻을 수 있는 달콤한 전리품입니다. 그는 스스로가 만든 기준에 부합된 직업의 이름을 정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자신만의 기준을 세우는 사람들의 직업은 노동이 아닙니다. 자기실현의 흐름속에서 단순히 모방과 기대충족으로 시작된 노동과는 전혀 다른 일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도 불안감은 밀려옵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미완성의 미학을 지녔기에, 그들도 때론 불안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그들은 불안은 소비의 불안이 아닙니다. 건전한 생산을 만들어내는 건강한 불안감은 그들을 적절하게 행동으로 이끌어줍니다.




이 글을 읽는 소중한 나의 그대가 내외의 일치를 갖는 건강한 사람이 되기위해 생각해볼 질문을 드리며 오늘의 글을 마무리 해봅니다.




오늘 하루 그대 정말 괜찮으셨나요? 오늘 정말 잘 존재하셨습니까?

내면으로 부터 밀려오는 소리, 외면하지 않은 하루 잘 보내셨나요?

나로부터 시작해야 할 작은 진실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잊으려고 애쓰는 마음의 숨김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존재함을 방해하는 내면의 진실을 생각해보는 오늘 하루가 되시길 바라며 글을 마무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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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진짜 존재를 찾고 싶다면,

www.soonganla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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