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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자헌 Nov 14. 2017

휴가

휴가를 냈다. 마루에서 자다 깨 몽롱하게 어머니가 틀어놓은 뉴스를 봤다. 중년의 아나운서는 참 차분했다. 테니스 대회에서 누군가 우승했다는 소식을 재치 있게 전했다. 아침마다 뉴스를 보면 이 세상 살아가는 느낌이 들겠구나, 생각했다. 그러다 도로교통정보가 출근길 상황을 일러주기에 오늘이 월요일인줄 알았다. 고작 주말 며칠 쉬고 이제 막 휴가 하루 시작하는데 이리 잊어버려도 되나 싶었다.

 

느지막이 집을 나섰다. "너 왜 요즘은 공부 안 하냐? 맨날 공부할 시간 없다고 옆에 있는 사람까지 들들 볶더니." 누나의 말에 웃었다. 하여 오늘은 책과 연습장, 노트북, 충전기까지 가방에 욱여넣었다. 누나가 커피와 샌드위치를 쥐어줬다. 껴입은 코트 주머니에도 누나의 핫팩과 초콜릿이 들었다. 누나 말대로 엄한 짓 말고 이제 취직 준비를 해야 할 텐데,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나. 한동안 컴퓨터 공부에 열을 내왔으나 부대 아덱스 행사를 마친 이후로 넋 빠진 사람처럼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날이 흐렸다. 어디로 갈까. 몸이 무거웠다. 군대에서 남는 시간 열심히 활용하여 고시패스를 했다는 이야기는 대체 어느 세상 이야기일까. '토익스피킹 시도하기'라 포스트잇에 적어 부대 달력에 붙여놓았으나 달 바뀔 때마다 뗐다붙였다만 반복했다. 그 아래는 '국세청에 문의하기'라고도 적어 두었는데, 지난 6월부터 국세청에서 학자금 대출 상환 목적으로 월급의 일부를 차감해갔기 때문이다. 적잖은 돈이라 전역을 하고도 빚이 남는데 전역 이후 바로 취직을 못했을 때는 어떻게 되는지 궁금했다. 지난 군생활을 수치화하자니 내 자신이 어설퍼보였다. 열심히 살았는데 그간의 일들이 영어 성적 하나만 못할까. 나는 몇 점짜리 군생활을 했나. 얼마의 빚을 갚았나. "단기장교 분들, 괜찮은 분들은 다들 소모만 되다 나갔어요." 언젠가 같이 근무하는 부사관 한 분이 던진 말이 가슴에 박혀 떠나질 않았다.

 

경복궁 향하는 버스를 탔다. 자리가 넉넉했다. 뒤로 가 바퀴 위 얹어 놓은 자리에 앉았다. 앞에는 꼬마 여자아이가 창가에 앉아 옆자리의 엄마에게 재잘댔다. 해가 될까 싶어 가방과 샌드위치를 다리 사이로 넣어 쪼그렸다. 책을 꺼내 아무 곳이나 펼쳤다. 책은 미래에 대한 온갖 불안들로 가득했다. "아이스크림 가게다!" 아이가 가리켰다.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 근데 콜록거리니까 안 돼~" 엄마가 달랬다. 아이와 엄마는 같은 단어를 반복하며 장난쳤다. 아이는 알아듣지 못하는 양 갸웃대며 엄마가 다시 말해줄 때마다 까르르 댔다. 엄마는 웃다가도 이따금 아이의 콜록콜록 소리에 근심했다.

 

지난 금요일에는 부대서 돌아오는 길에 친구의 일터를 찾았다. 그는 얼마 전 어머니가 쓰러지신 이후로 이미 모자랐던 하루를 반으로 나눴고 일자리 하나를 더 채워 넣었다. 그의 반가운 표정 위로 피곤한 일상이 보였다. "아, 너한테 이 말도 했었나?" 그는 지난 통화에 전해주었던 소식들을 되풀이하며 멋쩍어했다. 그는 잠이 부족했다. "요새는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벌까, 하는 생각도 안 나." 그가 웃었다. 나는 하루하루 내일을 두려워하며 사는데 너는 내일을 두려워할 겨를마저 없구나. 나는 별 수 없어 같이 웃었다.

 

버스가 막혔다. "여기도 저기도 한복 입은 언니들이네~" 아이는 창 밖의 사람들을 보며 예쁘다 예쁘다 연신 칭찬했다. 아이는 단 것이 먹고 싶었다. 엄마 손에 든 사탕을 보며 주문을 걸었다. "나 이거 먹으면 안 아플 것 같아~" 그 신통함에 깜빡 속은 나머지 아이 엄마는 걱정을 거두고 사탕을 건냈다. 아이는 껍질 벗은 사탕을 빛에도 비춰보고 크기도 재어보며 또 한참 주문을 걸었다. 뒤에 앉았던 사람도 그 모습에 깜빡 넘어가 책을 덮고 누나가 쥐어준 초콜릿을 꺼내 만지작댔다.


2017. 1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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