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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자헌 May 25. 2019

봄비

봄이 왔으나 날이 춥다. 주말에 온다던 봄비는 오늘에서야 내렸다. 그 사이 벚꽃은 얼굴을 내밀어 하루가 다르게 피어났다. 하루 이틀 미뤄지는 비소식에 룸메이트와 나는 매일 벚꽃길 지나며 오늘 밤이면 저 꽃이 지려나, 아님 하루를 벌어 내일에야 지려나 했다. 우리는 그리 어설프게 군대에서의 마지막 봄을 맞았다. 모두 애석한 날씨 탓이리라.


얼마 전 면접을 보다 ‘지금껏 가장 외로웠던 순간은 언제인가’ 하는 질문을 받았다. 글쎄요, 내가 외로웠던 적은 언제일까요. 힘들었던 기억만 많은데요. 잠시 멍해졌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장면이 하나 있었다.


오늘만치 쌀쌀하고 어둑어둑했다. 나는 잔뜩 긴장한 채 아스팔트로 된 연병장에 서있었다. 2015년 3월 둘째 주의 장교교육대대. 12주간의 훈련의 시작된 특내기간이었다. 이 기간에는 눈만 굴려도 얼차려를 받았다. 살아남으려면 교관들의 눈에 띄면 안 되었다. 안타깝게도 나는 정반대였다. 정말 많이도 헤맸다. 앞사람의 머리를 쳐다보며 사회에 두고 온 고민들을 떠올렸다. 교관들의 눈은 정확했고 나는 이삼 일만에 여러 차례 단독 얼차려를 받았다.  


그 날도 그랬다. 집합 방송이 울리고 전 후보생은 허겁지겁 연병장으로 달려 나갔다. 안타깝게도 나는 눈에 잘 띄는 맨 앞줄에 섰다. 교관은 단상에 서서 인상을 쓰고 우리를 내려다봤다. 아차, 그 순간 내가 견장을 차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망했다. 걸리면 또 굴러야 한다. 그렇다고 움직일 수도 없다. 어쩌지, 어쩌지. 나는 떨리는 손으로 야상 앞주머니에서 견장 두 개를 꺼냈다. 서둘러 어깨끈 단추를 풀었고 견장을 끼우려 애썼다. 하, 그런다고 될 리가 있나. 손은 더욱 떨려갔고 교관의 매서운 눈길은 나를 향했다.


그 때였다. 오른편에 섰던 키 큰 동기 후보생 하나가 내 손에 든 견장을 가져가더니 빠른 속도로 끼우고 단추를 채웠다. 반대편 견장까지 해결한 뒤 그는 본래 자리로 돌아갔고 우리는 떨리는 숨을 고르며 다시 시선을 전방에 맞췄다. 됐다. 됐어. 나는 연신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작은 목소리로 외쳤다. 그리고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마 교관이 우리 모습을 곱게 보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참 멋있는 사람이다. 지금도 놀랍다. 움직이면 본인까지 위험해지는 상황에서 그는 어설픈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짧은 순간이 나는 두고두고 고맙다. 그 순간 이후 나도 기회가 될 때면 곁에 있는 이들에게 손을 내밀려 노력했다. 그리고 훈련에 집중했다. ‘서자헌병’이라는 돌아보면 기분 좋은 별명도 얻고 소대장 근무도 하며 나름 좋은 성적으로 훈련을 마쳤는데, 그건 나의 가장 외로웠던 순간 먼저 손을 내밀어준 동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오늘은 봄비가 내렸다. 서늘했고 안개로 가득했다. 봄비는 기어이 못다 핀 꽃잎을 찾았다. 그 동기와는 이후에도 같은 생활관에서 지낼 기회가 있었다. 그는 조종 장학생이었다. 취침 방송 이후에도 어둑어둑한 생활관 가운데로 나와 스트레칭 하며 몸을 가다듬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임관한 이후 지난 삼 년간 한 번도 그를 만나지 못했지만 분명 그 모습 그대로일 것이라 생각한다. 오늘은 봄비가 내렸다. 그도 오늘 많이 외롭지 않을까. 혹 두렵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 속 담아두었던 이야기를 두서없이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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