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짓기의 중요성2

장학금은 누구를 위한 것

by 생각의 해우소

모교에 '미생 장학금'이라는 교통비 지원 제도가 있었다. 사건의 발단은 새 학기 들어 장학생 선정 기준에서 '소득 분위' 기준이 "아예" 빠져버린 것이었다.


장학금

1. 주로 성적은 우수하지만 경제적인 이유로 학업에 어려움을 겪는 학생에게 보조해주는 돈.

2. 학문 연구를 돕기 위해 연구자에게 주는 장려금.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장학금은 1) 경제적으로 어려운 학생을 지원하는 것이고, 2) 학문 연구를 돕는 것이다.


1.에서 보듯 장학 제도는 본질적으로 복지 제도다.


복지 제도

국민의 복지 증진을 목표로 한 사회 보장 제도


사회 보장 제도

출산, 양육, 실업, 은퇴, 장애, 질병, 빈곤, 사망 따위의 어려움에 처한 사회 성원들의 생활을 국가 및 지방 자치 단체가 일련의 사회 정책을 통하여 해결해 주는 제도


정리하면 장학금의 대상은 '어려움에 처한 사회 성원'이고, 장학금의 목적은 '학문의 장려'이다.



대표적으로 국가 장학금 제도는 소득 분위에 따라 장학금을 차등 지급한다. 형편이 어려운 만큼 더 지원해주는 것이다.


한국 장학재단의 설립목적은 '경제적 여건과 관계없이 의지와 능력만 있으면 누구나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것'이다.


예외로 '성적 장학금'은 경제적 형편과 무관하게 성적이 가장 우수한 학생에게 돌아간다. 학문을 장려한다는 취지로 볼 때 이상하지 않다.


그렇다면 바뀐 미생 장학금은,


1. 성적을 반영하지 않는다.

2. 소득 분위를 반영하지 않는다.

3. 오직 통학 거리만 기준으로 삼는다.


1.과 2.과 빠진 미생 장학금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학생을 위함도 아니고 학문을 장려함도 아니었다. 한 마디로 장학금이 아니었다.


통학 거리가 멀다고 주는 돈은 격려금 정도로나 부를 수 있을지 몰라도 장학금이라 부를 수 없다. 그렇다면 총학생회가 '학생들이 낸 회비'로 '격려금' 따위를 줄 권리가 있을까. 장학금의 이름에는 그 속에 '복지의 필요성'과 관련된 성원들의 오랜 합의와 배려의 역사가 담겨있지만 '격려금'도 그러할까? '소득 분위' 가 빠진 이상 미생 장학금은 그 존재와 집행의 정당성이 없어진 것이었다.


이 일이 20살, 21살 철부지들끼리 과방에서 하는 숙덕 공론(투정)에서 비롯했을 것이라는 걸 상상하니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그래도 대학생들이 하는 일이니 백번 양보해 철학적 정당성까지 깊이 고려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이들이 절차적 정당성마저 어겼다는 것이었다.


역사를 찾아보니 당연하게도 '미생 장학금'은 전체 학생 대표자 회의에서 표결을 통해 인준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선정 기준을 바꾸는 일도 당연히 공론화 했어야 하는 일 아닌가. 심지어 장학금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일인데 말이다(아니 장학 제도를 격려 제도로 바꾸는 일이다.) 총학생회는 최소한의 의견 수렴도 없이 어느 날 자기들 멋대로 제도를 바꿔 갖고 나타났다. 민주적이지 못했다.


나는 총학생회 홈페이지에 문의 글을 남겼고 공론화를 위해 에브리타임에도 글을 올렸다. 에타에서는 인신공격성 댓글도 받았고, 예상한대로 "국장도 다 가져가더니 '이것마저도' 가져가려는 건 욕심이 아니냐"는 댓글도 받았다. 그들의 몰이해가 안쓰러웠지만 무시하고 넘기기엔 솔직히 좀 마음이 두근거렸다ㅠ 물론 지지의 댓글도 받았다. 결과적으로 총학은 페이스북 설문인지를 통해 장학금 선정 기준에 대한 의견 수렴을 하였고, 전보다 완화된 형태로 소득 분위 기준이 일부 복구되었다. 대자보를 써야하나까지 고민하다가 이 정도로 사태가 수습된 것에 동의했고, 너무 지친 나는 정작 그해 미생 장학금을 신청하지 않았다.


이 일을 겪으면서 나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복지 제도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걸 깨달았다. 이해하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모르겠다. 모교가 지성인들이 모인 곳이라 자부했었는데 장학금을 그저 꽁짜로 주는 돈으로, 수혜자들을 개꿀 빠는 사람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아 충격적이었다.


국가 장학 제도에 맹점이 있다는 것도 알고, 억울함을 겪는 학생이 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건 집행의 문제이지 장학 제도 자체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 사회가 당장의 손해나 불공평함에도 불구하고 왜 사회적 약자에게 복지를 제공하기로 합의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빈곤을 느끼는 건 상대적이어서 강남에 자가가 있는데도 가난하다고 징징대는 사람이 있고, 사글세를 살아도 풍족함을 느끼고 기부하는 사람이 있다. 부자는 빈자였던 적이 없고, 빈자는 부자였던 적이 없어서 서로를 이해하는 게 정말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이해해보려고, 상상해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미생 장학금 50만 원은 누구에게나 다 같은 50만 원이 아니다. 꼬박꼬박 용돈 받아 가면서 다니는 학생에게 50만 원은 그야말로 꽁돈이지만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살 수 있는 학생에게 50만 원은 몇 달 숨통이 트이는 돈이다. 누군가에게 50만 원은 아이패드나 명품을 지를 수 있었던 돈이겠지만, 누군가에게 50만 원은 매일 3000원 한플 학식 대신 3500원 사랑방 학식을 사먹을 수 있는 돈이다. 누군가에게 50만 원은 사치를 할 수 있는 돈이지만 누군가에게 50만 원은 좀더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해주는 돈이다. 우리 집은 잘 살지만 부모님이 용돈을 적게 주셔서 힘들다면? 그렇게 부모가 아낀 돈이 장차 누구에게 돌아가겠는가.


이름은 그것의 존재 이유와 목적을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장치이다. 어떤 이름 하에 진행되는 것들은 그 이름이 곧 그것의 정당함이다. 우리는 중요한 사회적 결정에 앞서 이름에 대해 먼저 생각해야 한다. 왜 그 이름을 붙였는지, 그 이름이 가진 무게가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뭔가 헷갈린다면 이름(본질)으로 돌아가자. 이름대로 하건 이름을 바꾸건 둘 중 하나를 하자. 그러니 한 번 정하면 바꾸기 힘든 사람의 이름은 부모가 애초에 잘 지어주는 게 맞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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