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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ley Jun 18. 2019

우리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어머니와 아들,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어머니와 며느리 사이

    2018년 7월. 결혼식을 올리고 나서 두 달의 시간이 지났던 그때, 참 더웠다.



    신학대학원에 재학 중일 때 결혼을 했던 우리였다. 결혼 후에 당연하게 대학원생의 삶을 살고 있었다. 대학원의 마지막 학기가 시작되기 전 방학, 나는 논문 지도 교수님을 따라 보령까지 구약 성경을 공부하는 캠프에 다녀왔다.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2박 3일 동안 아침 7시부터 저녁 10시까지 강의를 듣고 밥을 먹고, 또 강의를 듣고 밥을 먹는 일정을 빠짐없이 소화했다. 마지막 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가고 있었다.


    갑자기 오빠에게서 문자가 왔다.


    "어머니가 오늘 서울에 올라오신대. 서울에 일정이 있으셔서 우리 집에서 하루 주무실 것 같아."


    문자를 받고 오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빠는 미안함이 가득 담긴 어투로 본인도 방금 연락을 받았다고 서울에 일정이 있어 벌써 올라오고 계신 것 같다고 말했다. 어머니 일정이 밤늦게 끝나셔서 아마 집에 도착하면 열 시가 넘을 것 같다고, 그러니 천천히 오라고 말했다. 나는 알겠다고 대답했고 서울에 올라왔다. 논문 동기와 함께 저녁까지 먹고 집에 도착하니 저녁 7시였다.


    식을 올린 후 얼마 되지 않아서 한 번 어머니가 집에 오신 적이 있었다. 오빠와 함께 축의금 명단과 방명록을 정리하기 위함이었다. 오빠는 수업이 없어 집에 있었고, 나는 수업과 조교일 때문에 오후 6시에 학교에서 나설 수 있었다. 내가 집에 도착했을 때 , 어머니와 오빠는 책상에 마주 앉아 축의 하신 분들의 이름을 정리하고 있었다.


   결혼식이 끝난 이후 두 달이 지나도록 집 안 곳곳에는 아직 정리하지 못한 짐이 쌓여 있었다. 평소 정리 정돈이 습관이 되지 않은 둘이라 논문을 핑계로 짐 정리를 미루고 있었다. 내가 오기 전, 어머니는 오빠와 함께 개판 오 분 전이었던 집을 정리하셨다. 나에게는 가볍게 '그냥 내가 조금 정리했다.'라고 말씀하셨다. 언성이 높지도 않았고 핀잔을 주지도 않으셨다. 그냥 사실을 전달하셨을 뿐이다. 그런데 나는 마음이 덜컹했다.


    그 날의 일이 떠올라서, 집에 도착하자마자 집 정리를 시작했다. 일단은 보이지 않는 곳에 다 때려 박고 청소기를 돌렸다. 침대도 정리했다. 손님용 침구가 전혀 없었던 터라 응당 어머니가 침대에서 주무셔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빠가 먼저 집에 도착했다. 캠프를 가 있는 동안 주변 사람과의 관계로 마음이 힘들었던 나는 오빠를 붙잡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사실은 내가 이런 일이 있었고 머리가 많이 복잡하다, 그래서 어머니가 갑자기 오셨다는 말을 들었을 때 기분이 유쾌하지 않았다, 내가 몸과 마음의 여유가 없을 때 어머니가 오신 것이 매우 안타깝다, 와 같은 말들을 내뱉었다. 오빠는 나의 상황과 마음을 이해했고 본인도 바쁜 와중에 갑작스럽게 받은 연락이라 어머니가 어떤 일로 오시는지, 어디서 오시는지와 같은 대화도 나누지 못했다고 했다. 그냥 '지금 서울에 가고 있다'는 문자를 받고 바쁜 와중에도 나한테는 빨리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아 연락했다고 했다.


    어머니가 오셨다. 우리는 거실에 둘러앉아 평화롭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낯설고 어색했지만 내가 모자의 대화에서 소외되지는 않았다. 어머니와 둘이 있을 땐 '요즘 오빠가 이런 일이 있어서 힘들어해요.'와 같은 보고 아닌 보고를 하기도 했다. 화목했다. 평화로웠다. 모두가 잠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몸이 고된 나는 정신없이 잠을 잤다.


    정신없이 잠을 잔 것이 화근이었나. 나는 아들과 며느리의 집에 오신 어머니를 위해 해야 할 것을 다 했다고 생각했다. 깊은 잠에 빠졌고 다음 날 학교로 출발하기 20분 전, 급박한 시간에 눈을 떴다. 달그락 거리는 소리에 일어나니 오빠가 가스레인지 앞에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그 주변을 왔다 갔다 하고 계셨다. 순간 불안한 기분에 휩싸였다. 오빠가 저기서 저러고 있어도 되나? 오빠는 왜 나를 안 깨웠지? 어머니 기분이 괜찮으실까? 머릿속으로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는데, 시간이 없었다. 나는 늦지 않기 위해 부랴부랴 준비를 했고 그동안 오빠가 아침을 차렸다. 우리는 마주 앉아 밥을 먹었고, 나는 학교로 출발했다. 마음 한 구석이 찜찜해 문을 나서기 전 "어머니 다음에 오셨을 때 된장찌개 끓여 드릴게요."라고 말을 했다. 차라리 그 말을 하지 말걸 그랬다.



    내가 먼저 학교로 가고, 오후에 수업이 있었던 오빠도 학교로 왔다. 원래의 계획은 저녁에 다시 어머니를 만나 맛있는 저녁을 먹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오빠에게 전화를 하셨다. 일이 취소되었다고 그냥 일찍 내려가시겠다고 말이다. 불안한 나는 오빠에게 어머니가 내가 아침을 차리지 않은 것에 대해 화가 나신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오빠는 말했다. 에이, 설마 그런 걸로 화가 나시겠어? 나도 살짝 고민은 했는데 그런 걸로 화가 나실 것 같지는 않아서 그냥 너는 더 자라고 안 깨웠어. 어머니가 원래 아침을 일찍 드시는데 우리 둘 다 정신 못 차리고 자니까 이른 시간부터 왔다 갔다 하시더라고. 그래서 내가 했어.


    오빠의 말에 나는 그런가, 싶었다. 그런데 아들은 어머니의 마음을 잘 모른다.


    다음 날 아침 여섯 시경 오빠의 전화벨이 울렸다. 아직 자고 있던 우리는 그 소리에 잠을 깼고 오빠는 전화를 받았다. 어머니였다. 전화를 받던 오빠의 말수가 줄어들었고, 통화 시간은 길어졌다. 나는 좋지 않은 예감이 현실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머니는 전날 기분이 좋지 않아 일찍 집으로 돌아가신 것이었다. 며느리는 자고 있고 아들이 아침을 차렸다는 사실에 화가 나셨다. 나중에 된장찌개를 해준다고 했는데, 나중이 어디 있냐고 지금 잘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통화는 길었지만 오빠는 명확한 통화 내용을 나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저 어머니가 화가 많이 나신 것 같다는 말을 했을 뿐이다. 나도 멘붕이었지만 오빠도 멘붕이었다. 어머니는 나에게 전화를 하지 않으시고 오빠에게 전화를 해서 많은 말을 하셨다. 그리고 오빠는 나에게 대략적인 상황과 내용을 이야기했을 뿐 그 말들을 그대로 옮기지 않았다. 내가 상처 받을까 봐 그랬다고 한다.


    이제와 서보니 오빠에게 전화를 하셨던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와의 대화를 있는 그대로 옮기지 않았던 오빠의 행동이 전부 본능적으로 나에게 큰 상처를 안기지 않기 위함이었다. 평소 화가 나면 세게 말을 하시는 어머니의 성격을 알고 있는 이 가족이 나에게는 큰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서로에게 쏟아부은 것이었다. 참 성숙한 모자가 아닌가.


 


    나는 나대로 힘들었고, 오빠는 오빠대로 힘들었고,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힘들었다. 오빠는 끊임없이 아버지, 어머니와 전화, 문자를 주고받았다. 나는 나대로 상처 받은 마음과 힘든 마음을 견뎌내려 애썼다. '어린 며느리를 들이는 게 아니었다'는 어머니의 말에 잠자코 있던 오빠가 화를 냈다. 이미 결혼을 했는데 어떡하라는 거냐고, 나보고 이혼을 하라는 거냐고 아니면 부모 자식 연을 끊자는 거냐고. 내가 도대체 어떻게 하기를 바라시냐고. 오빠는 어머니에게 화를 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신 어머니는 구약 성경 창세기의 말씀처럼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함께 살아야 하니, 부부의 연을 절대 가볍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너희들끼리 잘 살아라,라고 문자를 보내셨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세기 2장 24절)"
이는 교회 안에서 남자와 여자의 결혼에 근거가 되는 주요한 성서 구절 중 하나다.


    슬프게 울다가, 억울했다가, 화가 났다가, 답답했다가. 온갖 감정이 뒤섞인 채로 일주일이 지나고 나는 어머니께 전화를 했다. 오빠가 이미 아버지를 통해 나의 상황을 다 설명했던 터였지만 그래도 내 입으로 다시 한번 말했다. 죄송하다고 했다. 나는 내가 집안일을 안 하고 있는 게 아니라고 해명해야 했다. 나는 결단코 이기적이지 않다고, 내가 어떻게 노력하고 있는지 설명해야만 했다. 긴 통화를 하며 나는 울었고, 어머니는 화가 난 채 말씀을 이어가셨다. 나에게 상처가 된, 나를 고민에 휩싸이게 만들었던 모든 말을 옮길 수는 없지만 이 말들은 옮길 수 있다. 


'네 생각보다 내가 내 아들을 귀하게 키웠다고, 아무리 세상이 변했어도 남자와 여자가 하는 일은 정해져 있는 거라고, 내가 내 아들이 집안일하는 모습을 보려고 공부시킨 것이 아니라고.'


    전화를 하는 내내 죄송하다고 말했지만 사실 나는 억울했다. 우리 엄마도 나를 귀하게 키웠는데. 밥을 차리는 일이 도대체 왜, 언제부터, 무엇 때문에 여자들의 일이 되어 있는 걸까. 나도 집안일을 하려고 지금까지 공부한 것은 아닌데. 왜 내가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는 걸까. 평소 아침을 먹지 않는 게 습관이 되어 있어서, 타이트했던 캠프의 스케줄로 몸이 너무 고돼서, 푹 자버린 게 잘못이었을까. 나는 조교 일에 지각을 하더라도 오빠를 부엌에서 치워버리고 내가 식사 준비를 했어야 하는 걸까. 통화를 하는 내내 어른을 대하는 법을 미처 몰랐던 나의 잘못이라는 마음과 왜 내가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가에 관한 억울함이 공존했다.

    

    전화 통화 후 어머니의 기분은, 마음은 한결 누그러지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내일이나 모레쯤 한 번 더 전화를 하면 어머니의 화가 풀릴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긴 통화로 인해 내 마음에 생긴 상처는 두 번 다시 전화하고 싶지 않다고, 나는 할 일을 다 하지 않았냐고 주장했고, 결국 나는 전화를 하지 않았다. 두 분은 그 부분에서 서운해하셨다. 시간이 가고, 바쁘게 일상을 보내고 고민하고, 생각하고 무뎌지면서, 어쩔 수 없이 통화를 하고 만나면서 슬슬 어머니와 나는 조금씩 서로를 이해하고 알아가기 시작했다.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주변 사람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으신 것 같다. 요즘 아이들은 예전과 다르다고, 서로가 바쁘다고, 우리 때처럼 생각하면 안 된다고. 그리고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한 몸이 된다"는 그 말씀이 어머니에게 새롭게 다가온 듯하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는 것에는 남자와 부모 양쪽 다 마음의 준비와 그에 따른 시간이 필요한 법이니까. 물론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면서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도 알게 되셨다. 이기적이고 자기 이익만 챙기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셨을 것이다. 돈에도 가정에도 사람에도 별다른 악한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바쁘게 자기 삶을 살아가는 아이구나, 하고 느끼셨을 것이다.

   

    우리에게 너무 힘들었던 이 사건은 결국 어머니가 마음속에서 오빠를 독립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결혼식은 올렸지만 그때의 어머니는 아직 귀한 아들의 보호자였고, 어머니의 세상은 온통 오빠였다. 어머니에게는 천천히, 마음속에서 아들을 출가시킬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아들은 이 사건을 통해 자신의 어머니를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했다. 이제껏 주는 것이 당연했던, 자신의 보호자였던 어머니의 곁에서 한 사람의 성인으로 서기 위해 시간이 필요했다. 며느리에게는 사회적인 통념과 가부장제의 영향과는 별도로 '시어머니'라는 사람 자체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어머니와 아들이 결혼 후 각자의 역할을 깨닫고 홀로 서기 하는 시간임을 알아채고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처음부터 좋은 사람이었던 어머니와 아들이었기에 그 시간이 그토록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서는 서로의 삶을 '한 여자의 삶'으로 바라보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 우리는 굉장히 평화롭다. 사실 어느새 그때 어머니에게 들었던 말들이 기억 속으로 없어져 가고 있었다. 그 이후로 어머니는 우리 집에 오시는 일을 조심스러워하셨고, 서울에 오실 일이 있어도 미리 이야기를 해주셨다. 나는 나대로 자발적으로 한 주에 한 번 또는 열흘에 한 번 정도는 전화를 드리고 있다. 어떤 때는 어머니의 아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현장에 파견된 기자처럼 상세하게 말씀드리기도 한다. 어머니는 여자가 운전을 하는 것이 좋다고, 늘 남편이 운전을 해줘야 하는 상황이 매우 불편하다고 하시면서 생일 선물로 면허 학원에 등록할 돈을 주셨다. 여자로서 살아가는 삶 속에서 불편한 부분을 내가 겪지 않기를 바라시는 마음이었다.


    나는 시가에 가서 설거지를 도맡아 한다. 눈에 보이는 일들을 빼지 않고 한다. 눈치가 보여서가 아니다. 이제까지 어머니는 남편을 위해 아들을 위해 늘 요리를 하고 설거지를 했는데, 그렇다면 어머니를 위해서는 누가 그런 일들을 할 텐가? 나는 여자로서의 어머니의 삶을 존중해서, 여자로서의 어머니의 삶에 작은 위로를 드리고 싶어서 그런 일들을 한다. 생각해보면 이제까지 누가 어머니를 위해 밥을 하고, 설거지를 했을까?(물론 유일하게 아들이 그런 일을 해주었다고 한다.) 이제까지 어머니의 삶은 가족들을 위해 다 쏟아부었다. 나는 나의 시어머니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여자로서 그녀의 삶이 내 마음에 다가와서, 우리 엄마와 겹쳐 보여서 주저 없이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한다. 여자의 권리에 대해 내가 어머니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 어머니가 나에게 강압적이지 않아서, 강제로 시키지 않아서, 본인이 다 하려고 하셔서 내 마음이 더 움직이기도 한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를 배려하며 여자로서의 삶을 존중하고 있다.



    결혼 후 우리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이제까지는 몰랐던 서로의 삶을 이해할 시간. 두 여자가 사랑하는 한 남자에 대한 서로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확인할 시간. 서로가 생각하는 부모와 자녀의 역할에 관하여 알아가고 맞춰나갈 시간. 이제까지 익숙했던 식구가 아닌 새로운 식구를 맞이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적응해야 할 시간. 결혼을 한지 이제 일 년 하고도 한 달. 아직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만, 1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래도 우리는 한 사람으로서, 여자로서 서로가 어떤가에 관하여 관심을 기울였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결혼을 준비하면서 고부 갈등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듣고 본 경험들이 때로는 독이 되기도 한다. 시어머니와 며느리도 사람과 사람의 관계인데, 고부 갈등, 시월드 등의 단어들이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 '시어머니'이기 이전에, 가부장제의 중심에서 살 수밖에 없었던 한 사람의 '여자'로 바라보는 것. 나조차도 편견에 쌓여서, '시어머니'라는 단어에 두려움을 느껴서 그 사람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지 못한다면, 그래서 여자 대 여자로 관계를 맺어 나가지 못한다면, 그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나와는 다른 시대를 살아온, 다른 생각을 가진, 다른 일상을 꾸려온 "한 여자"의 삶을 듣고 보고 느끼게 될 소중한 기회를 영영 놓치게 되니까 말이다.


    만일 결혼을 준비하는 사람이 있다면 조심스레 묻고 싶다. 당신은 혹시 아직 경험하지 않았음에도 '시어머니'라는 말에 두려움과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가? 만일 그렇다면, 실제적인 근거가 없는 그 두려움이 자신을 더 힘들게 할 위험이 있다고 꼭 전해주고 싶다. 책 속에서 발견한, 내 속에 있는 마음을 그대로 옮겨준 누군가의 글로 이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나는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여자의 적은 가부장제다. 대부분의 여자는 누군가의 딸로, 아내로, 엄마로 살아오며 가부장제의 억압을 몸소 겪었기에, 그 누구보다 '여자의 입장'을 깊이 이해할 가능성을 지녔다. 며느리의 입장을 헤아리고 존중하고 배려하는 시어머니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앞으로는 '고부 갈등'보다 '고부 연대'가 더 많이 회자되길 기대한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함께 명절 파업을 하며 직접 문화를 바꿔가는 이야기들이 더 많이 알려지기를 바란다. p.204

 <페미니스트도 결혼하나요?(부너미 지음/민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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