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aley Sep 11. 2019

어디에서도 나는 남편 다음이다

친정에서도 시댁에서도 ‘나’와 ‘나의 사역’은 남편 다음이다



    진로에 대한 고민은 나이를 불문하고 반복적으로 찾아온다. 어딘가 몸 담았던 곳을 떠날 때에도, 너무 안정적이어서 무료하게 느껴질 때에도. 나에게도 이 고민은 정기적으로 찾아온다. 나는 찾아오는 고민을 마다하지 않고 성실하게 맞이하는 편이다. 끌어안고 잠을 못 잘 정도로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올해 내내 나를 괴롭힌 고민은 '앞으로 사역자로 살 것이냐, 다른 직업을 택할 것이냐'였다. 나는 결혼을 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에게 다양한 언어로 '여자 사역자', 특히 '결혼한 여자 사역자'로서 들을 수 있는 실례되는 말들을 들었다. 그들이 나에게 실례를 범할 때마다 내 안에는 '내가 이런 소리를 들으면서 굳이 사역자로 살아야 하나?'라는 마음이 굴뚝같았다.


    소명은 '직'이 아니라 '업'으로 주어진다고 했다. 장래희망은 '어떤 직업을 갖고 싶은가'가 아니라 '무슨 일을 하고 싶은가'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이 나의 삶에 주시는 소명은 구체적인 직업으로 오지 않는다. 많은 기독교 서적들이 이에 관하여 정리하고 있겠지만 나의 말로 정리하자면 이렇다. 그리스도인에게 진로와 장래희망에 대한 고민은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신 모습을 잃어버린 이 세상에서, 나에게 도드라지는 분야를 찾고, 그 분야에서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갈 것인가에 관한 답을 찾는 것'이다. 여기서 '도드라지는 분야'를 자세히 해야 한다. 기독교학교교육연구소에서 집필한 <스윗스팟>이라는 진로탐색 교재에서는 이를 '애통함'이라고 표현한다. 즉, 나는 도대체 이 세상의 어떤 부분에 애통함을 느끼고 있냐는 것이다.


    나는 내가 무엇을 애통해하는지 잘 알고 있다. 나는 마땅히 사랑받아야 하지만 사랑받지 못하는, 마땅히 돌봄을 받아야 하지만 돌봄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애통함을 가지고 있다. 더불어 사람이 사람답게 대접받지 못하고 살아가지 못하는 수많은 모습에 애통해한다. 또 가부장적인 사고로 인해 왜곡된 것들-예를 들자면 가족 간의 관계, 섹스와 젠더의 문제 등-과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그로 인해 상처 받고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 대한 애통함이 있다. 그렇기에 내가 브런치에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것 또한 나에게 주신 소명에 따라 충실히 살아내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어쨌든 나는 이 글을 통해 가부장 제도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어느 누군가의 삶에 사고의 돌멩이를 던질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의 고민은 나에게 확실하게 주신 '업'이 아니라, 그것을 풀어낼 도구인 '직'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은 나에게 확실한 '업'을 주셨다. 하지만 어떤 '직'으로 내가 그 일을 해 나가야 하냐는 기도에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시다. 조용하신 하나님 덕에 나는 매일 밤 다양한 직업을 머릿속에 그려나가고 있다. 나에게 주신 업은 결국 사람과 사회에 대한 것이다. 사실 모든 업이 그렇다. 그래서 나의 앞에는 다양한 선택지가 놓여있다.



        이런 고민을 하다가 문득 남편이 얄미울 때가 있다. 나는 구체적이지도 않은 출산 계획 때문에 무엇 하나 결정하는 것이 쉽지 않은데, 어떠한 방해도 없이 꿋꿋하게 수련 목회자의 길에 들어서고 사역을 해나가는 남편을 보면 얄밉고, 부럽고, 만감이 교차한다. 둘 다 교회 안에서 전도사로 살아가는 것을 좋아하고, 사역을 하면서 보람과 기쁨을 느끼고,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영혼들을 돌보고 사랑하고 양육하는 것이 좋다. 그런데 망설임 없이 정식 과정에 들어서서 목사 안수를 받고 목회를 하고자 하는 남편과 아직 막연하기만 한 출산과 육아를 걱정하며 구체적인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기웃거리기만 하는 나의 모습이 너무 대조된다. 물론 줄곧 신학교만 다니고 말씀 사역의 은사가 있는 남편이기 때문에, 학부에서는 사회복지를 공부했으며 글 쓰는 일을 좋아하고 관심사가 많아 좀 더 다양한 선택의 폭을 가진 나이기 때문에, 한 명은 망설임 없이 사역을 하고, 한 명은 구체적인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도 맞다. 그러나 똑같은 '사역자'이지만 성별로 인하여 서로 다른 경험을 했다는 것 자체도 여기에 상당수 영향을 주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한창 이와 같은 문제로 마음이 어려울 때, 엄마에게 전화를 한 적이 있다. 내가 너무 힘들다고, 생각이 너무 많고 걱정이 많다고, 밤마다 잠이 안 온다고 나의 진로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은 열변을 토했다. 나는 도대체 왜 언제가 될지도 모를 출산과 육아 때문에 이렇게 수도 없는 고민을 해야 하며, 교회는 도대체 왜 육아휴직의 개념조차 없냐고. 그럼 나는 무조건 애를 낳아 키우기 전까지 전전긍긍하며 사역을 해야 하거나 사역을 포기해야 하는 거냐고. 이럴 바에는 차라리 육아휴직이 있는 직장에 가는 것이 나은 것 아니겠냐고. 지금도 가뜩이나 불쾌한 상황과 말이 많은데 도대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냐고.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지만 결국 사역을 계속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를 엄마에게 털어놓았을 , 엄마의 대답은 ' 말이 뭔지는 충분히 알겠는데 남편이 먼저 사역자로 세워지고 그다음에 네가 세워지면 되지 않냐' 것이었다. 어쨌든 남편이 사역자로 든든히 세워져야 너한테도 좋은 거라고, 성경에서도 하와가 돕는 필이 아니냐고, 너는 원래 어디서든 지지 않으려는 성격이 있지 않냐고, 남편을 먼저 세워줘야 한다고. 나를 달래듯 다정한 목소리로 이런 말을 하는 엄마에게 창세기의  말씀을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건지를 한참 떠들어대려다가, 나는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엄마의 생각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남편이 먼저 서야 한다고, 어쨌든 남편의 사역을  세워야 한다고, 어쨌든 그렇다고 어쨌든  얘기만 계속 되풀이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울면서 '나의 사역' 관하여 이야기하는 나에게, 엄마는 '남편의 사역' 대한 이야기를 했다. 내가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라 그런 것이라고, 남편의 사역이 먼저인 것이 맞다고 하는 엄마의 말에 나는  이상 '' 이야기하기를 포기했다.



    생각해보면 시댁에서나 친정에서나 대화의 주제는, 대화의 첫 시작은 늘 남편의 사역에 관한 것이다. 시댁에서는 이게 이상하지 않다. 남편의 집이고 남편의 부모님이니까 말이다. 간간히 나에게 수련회는 잘 다녀왔냐고 물으시는, 한 두 가지 질문을 제외하고는 전부 남편의 사역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물론 아들이 엄마 아빠에게 자신의 사역에 관하여 적극적으로 말씀드리고 대화를 나누기 때문에 당연하다. 이에 대하여 나는 불만이 없다.


    다만 친정에서, 나의 부모님이 나보다도 남편이 먼저일 때는 마음이 좋지 않다. 엄마와 통화를 할 때면 엄마는 나에게 남편의 사역과 건강과 상태를 묻는다. 힘들 거라고, 스트레스 안 받게 해줘야 한다고, 잘 챙겨줘야 한다고, 요즘 교회는 괜찮냐고, 사역하는데 문제는 없냐고, 집에 오면 푹 쉬게 해 주라고. 그런 얘기를 잔뜩 듣고 난 후 전화를 끊고 나는 가끔 생각한다. 왜 시댁에서도 친정에서도 내가 어떻게 사역을 하고 있는지는 관심이 없는 거지? 시댁은 그렇다고 해도 우리 엄마인데 왜 우리 교회보다 남편의 교회를 더 묻고, 나의 사역보다 남편의 사역을 더 묻는 거지? 왜 나는 남편을 챙겨야 한다는 말을 저렇게 잔뜩 들어야 하는 거지? 왜, 시댁에서도 친정에서도 '나'와 '나의 사역'을 위해주는 사람은 없는 거지?


    교회뿐만이 아니다. 가정에서도, 시댁과 친정에서도 나는 자연스레 남편의 조력자다. 과연 양가 부모님 중 한 분이라도 남편에게 전화해서 '지은이 사역하는데 힘들지 않도록 네가 잘 도와줘'라고 말한 적이 있을까? 여기까지 생각하니 울컥하다. 사역자인 ‘나’를 생각하고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나뿐이라고 느껴진다. 물론 양가 부모님 모두 내가 사역을 하는 것에 대해 좋아하신다. 하나님의 일을 하니 참 귀하다고 생각하신다. 그런데 늘 나는 그분들에게 있어서 남편의 사역을 가정에서 돕는 사람이고, 그와 함께 사역‘도’ 하는 사람이다.


    물론 양가 부모님들께서 사역자로서 남편과 나 두 사람을 위해 늘 애써 기도하고 계신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나도 남편의 사역을 위해 기도하고, 그의 사역을 응원한다. 나는 진심으로 남편이 좋은 사역자라고 생각한다. 그가 하나님 앞에 더 좋은 사역자가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종종 현실적으로 가정 내에서 나의 사역을 우선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고 느낄 때는 너무 외롭다. 정말 내가 지기 싫어서 그런 것인지, 이렇게 생각하는 나의 잘못인지, 내가 철이 없는 건지, 이제는 나도 헷갈린다. 내 성격에 문제가 있는 걸까? 내 태도에 문제가 있는 걸까?


    생각보다 명확하게 나의 소명을 알고 있음과 동시에, 나는 나의 직을 '사역자'로 갖는 것에 고민한다. 그리고 그에 관한 수많은 이유들 안에는 '남편의 사역이 먼저'라는 엄마의 말이 자리 잡고 있다. 그 말을 못 들은 체하고 싶어도 어느새 머릿속에 각인되어 지워지지 않는다. 정말 남편의 사역이 먼저일까? 나는 잠자코 남편의 사역이 세워지기까지 기다린 후에 나의 방향을 찾아 나가야 하는 걸까? 남편이 사역자로 세워질 동안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집안일을 하다가 40대가 되어서야 지금의 남편처럼 사역할 수 있을까? 두 사람 모두의 사역이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똑같이, 멈춤 없이 존중받을 수는 없는 걸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너무 뼈저리게 느끼고, 알고 있는 나라서 오늘도 또 새벽까지 잠을 자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는 ‘사역자로서의 나’와 ‘나의 사역’이 가장 우선순위라고, 아무도 나의 사역에 관해 묻지 않아도 사역자로서 맡겨진 교회와 영혼을 향한 나의 질문과 고민들에 귀를 기울이시고 대견해하시는 분이 계시다고, 나 스스로를 다독인다.

이전 04화 지금껏 우리는 노동을 차별하고 있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