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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ley Aug 20. 2020

꿈이냐 남편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헤어지지 않으면서 "여러 갈래의 삶"을 살기 위한 혼잣말


    북클럽에 가입한 마음산책 출판사에서 <수전 손택의 말> 경쾌한 에디션을 보내줬다. 조너선 콧(롤링스톤지 창립 공신 에디터)이 수전 손택을 인터뷰한 내용의 이 책을 지난여름 휴가 때 들고 갔다. 이른 저녁, 혼자, 해운대의 전망 좋은 호텔에서 꼼꼼히 읽었다. 밑줄을 제법 많이 쳤는데 유독 눈에 밟히는 페이지가 있었다. 결혼에 대한, 관계에 대한, 여성에 대한 대화를 나누며 손택이 했던 말을 그대로 옮겨본다.


하지만 여러 갈래의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은 확실히 했는데, 그렇게 여러 삶을 살면서 남편을 두는 건 아주 어려워요. 적어도 제 결혼은 그랬죠. 말도 못 하게 치열한 관계였으니까. 우리는 항상 함께 있었어요. 하루 24시간 내내 어떤 사람과 함께 살면서 오랜 세월 절대 헤어지지 않으면서 동시에 성장하고 변화하고 마음 내키면 훌쩍 홍콩으로 날아가는 그런 자유를 누릴 수는 없는 법이에요……. 그건 무책임한 거잖아요. 그래서 어느 시점이 되면, 삶과 기획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말하는 거예요.

<수전 손택의 말> 경쾌한 에디션 p.147


    "여러 갈래의 삶"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었다. 나 또한 "여러 갈래의 삶"을 꿈꾸는 사람이다. 관심 있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도전하고 싶은 것도 많은. 이미 "여러 갈래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글을 읽고 강연을 들으며 그런 생활을 꿈꾸고 있는 나이기에 다음 문장이 눈에 밟혔다. "그렇게 여러 삶을 살면서 남편을 두는 건 아주 어려워요." 적어도 자신의 결혼 생활이 그랬다며 일반화하지 않는 수전 손택이지만, 나는 다양한 사례를 통해 "여러 갈래의 삶"을 원하는 사람들이 주변 사람들과의 갈등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바로 어제, 정여울 작가의 강연을 듣고 왔다. <헤세로 가는 길>, 클래식 클라우드 <헤르만 헤세>를 쓴 정여울 작가는 독일과 스위스로 직접 떠나 헤세의 삶 하나하나를 사진으로 담고 글로 써서 책을 냈다. 정여울 작가가 헤세의 삶을 담기 위해 출국을 결심했을 때 주변 사람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도대체 왜 안정적으로 정착하지 못하며, 왜 이렇게 돈이 안 되는 글을 쓰느냐고. 정여울 작가는 고등학교 때부터 자신이 글 쓰는 것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던 엄마가 이제는 자신의 책을 즐겁게 읽고 있다며 "여러 갈래의 삶"을 살고자 하는, 또 살고 있는 자신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반응과 시선을 들려줬다. 정여울 작가의 강연을 듣는 내내 수전 손택의 인터뷰에서 읽은 문장들이 생각났다.


    강연 말미에 자유롭게 질문하는 시간이 있었다. 한 분이 이런 류의 질문을 했다. (자세한 문장이 기억나지 않아 내 언어로 바꾸어 말하자면) 나만의 시간과 공간을 갖기 위해, 개성화를 위해, 글을 쓰기 위해 소위 '동굴'에 들어가거나 훌쩍 떠나버리는 등의 행동들을 가족들이 이해하지 못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질문을 들으면서 또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표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수전 손택이나 정여울 작가와 같이 이미 '작가'라고 불리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일상에서 글을 읽고 쓰며 "여러 갈래의 삶"을 꿈꾸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가까운 이들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구나.

    정여울 작가는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자신의 내면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야 하므로 주변 사람들과 떨어져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자신은 혼자 여행을 가는 것을 너무 좋아한다고. 의존적인 관계일수록 더 떠나는 게 개성화로 향하는 길이라고. 역시나 오고 가는 이야기를 듣는 내내 나는 속으로 조용히 수전 손택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수전 손택의 표현을 빌려 표현하자면 나는 "성장하고 변화하고 마음 내키면 훌쩍 홍콩으로 날아가는 그런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이다. ENFP 중에서도 N, F, P가 극단적으로 높은 나를 ESTJ인 남편이 많은 부분 참아주고 맞춰주고 있다. "머리가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자겠어!"라며 밤 12시에 노트북 앞에 앉아 새벽 7시까지 키보드를 두들겨대고, 가고 싶은 곳과 먹고 싶은 것이 늘 바뀌고, 머릿속에 있는 온갖 "기획"을 이상적으로 떠들어대는 사람. 그게 나다. 반대로 남편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계획이 틀어지면 예민해지는 사람이다. 이런 우리의 차이가 유독 도드라질 때는 '우리 두 사람'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다.


    나는 '기획'이 참 많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구상하는 것도 많고 쏟아내는 아이디어도 많다. 다만 아직 행동으로 옮기지 않고 있을 뿐이다. 사실은 겁이 난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전부 무모한 일이고, 돈이 되지 않는 일이고, 어쩌면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득이 되지 않는 일들일 텐데. 과연 남편은 이것을 이해할 수 있을까? 24시간 내내 어떤 사람과 함께 살면서, 절대 헤어지지 않으면서 동시에 성장과 변화, 자유를 누리고자 하는 것은 무책임한 거라는 수전 손택의 말에 마음이 많이 불편하다. "결국 넌 앞으로 삶과 기획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게 될 거야"라고 말하는 것 같다. 악담을 들은 기분이다. 삶과 기획 둘 다 만족하리만큼 잘해나갈 수 있는 사람은 정말 없는 걸까?

    

    페미니즘을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내가 가졌던 큰 꿈 중 하나는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결혼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이었다. 비혼을 말하는 사람에게 결혼을 강요하기 위함이 아니다. 단지 '내 결혼'에 대해 부정당하지 않기 위함이다. 나는 나의 기독교적 가치관에 따라 결혼을 '선택'했고, 내 선택에 후회는 없다. 축복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결혼'을 통해 내가 여자로서 온갖 부당하고 불쾌한 일상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페미니즘을 받아들였다. 다양한 결의 페미니즘을 접하면서 나는 나를 위해 나의 '결혼'과 '페미니즘'을 연결해야만 한다는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이에 대해 독학하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앞으로 하고 싶은 일들이 늘어났다. 처음에는 남편의 작은 사고 하나라도 깨 보리라는 일념으로 다양한 페미니즘 이슈에 대한 대화를 나눴는데, 이제는 그것을 토대로 우리의 앞날을 논하고 있다. 나보다 앞선 페미니스트, 그녀들의 삶을 보면서 스스로 묻는다. 우리 부부는 삶과 기획 둘 다 잘해나갈 수 있을까? 서로에게 죄책감이 들지 않고, 미안해하지 않고, 서로를 품으면서 서로의 기획을 뒷받침해주는 그런 관계를 평생 유지할 수 있을까?



    이미 알고 있듯 정답은 없다. 내가 책에서 보는 수많은 여성들의 삶은 나와 같은 듯하면서도 전혀 다르다. 수전 손택도 정여울 작가도 나와는 다른 사람들이다. 결국 나와 남편, 두 사람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지만 누군가 한 사람에게 삶과 기획 중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하는 때가 온다면(십 중 팔구 아마 그건 나일 것이다. 여기는 대한민국이니까.) 부디 우리가 지혜롭길 바란다. 둘 중 한 가지를 선택하는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이 있다면 부단히 노력해 개척하기를 바란다.


    아직 철이 없는 나는 "여러 갈래의 삶"을 살고 싶고, 남편과도 평생 함께 하고 싶다. 그리고 그것은 남편도 마찬가지다. 우리에게는 각자의 기획이 있고, 공동의 삶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서로에게 열심히 공유하고 있다. 지나치게 이상적인 사람과 지나치게 현실적인 사람이 대화를 나누면 때때로 언성이 높아진다. 한두 시간 감정 상하며 씨름하다 보면 결국 서로 하고자 하는 말이 같은 말인 경우가 있다. 같은 생각을 하면서도 이렇게 감정이 격해지는데 다른 생각을 할 때는 오죽할까. 그래도 한바탕 한 뒤에 "뭐야! 같은 말이잖아!"라고 외치고는 낄낄대며 사이좋게 배달 음식을 시키는 우리의 모습에 희망을 걸어본다. 그리고 그 희망이 ‘꿈이냐, 남편이냐’의 이중 답안을 부수고 새로운 답을 가져다 줄거라 믿는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를, 또 우리를  믿는 것 밖에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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