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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ley May 25. 2020

페미니즘을, 더 나아가 젠더 이슈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

동역자들에게 보내는 글: '각자의 입장'이 필요하다


1. 청년 A는 시험을 앞두고 있었다. 시험공부를 하러 가던 A는 편의점에 들러 공부할 때 먹을 간식거리들을 골랐다. 물건을 계산대에 올린 A에게, 사장인지 직원인지 모를 중년 남성이 말했다. "그렇게 먹으니까 살이 찌지." A는 당황했고 제대로 된 답변도 하지 못한 채 서둘러 편의점에서 나왔다. 중년 남성은 난생처음 보는, 그저 처음 간 편의점에서 일하는 사람이었다.


2. SNS로 알게 된 청년 B는 신앙생활을 하며 마음에 부딪힌 여성 혐오적 성경 본문에 대해 청년 담당 사역자에게 묻고자 했다. 약속을 잡고 몇 달이 지난 후에야 간신히 만날 수 있었던 그 사역자는 이와 같은 고민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들은 B는 자신의 SNS에 21세기의 중요한 담론인 젠더 이슈에 관해 고민조차 하지 않은, 무지한 교회와 사역자에게 자신은 지쳤으며, 이제 그들을 믿지 않을 것이라는 글을 남겼다. 여성의 입장에서 성경을 해석해본 일도 없는 그들에게 반기를 들어 자신이 더욱 공부하겠다는, 나보다 공부하지 않은 그들에게 더 이상 상처 받지 않겠다는 B의 말에 사역자인 나는 조용히 공감의 하트를 누를 수밖에 없었다.


3. 청소년 C와 오디션 프로그램에 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그 친구가 마음에 들더라'라는 말에 C가 말했다. "전도사님 그 사람 여혐 발언했잖아요. 모르세요? 정말 싫어요." 청소년 C에게 '여혐'이라는 단어는 일상 용어이다. 좋아하는 연예인을 선택하는 데 있어 C에게는 '여혐인가 아닌가'가 중요한 기준이다.


4. D는 남사친의 연락을 받았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으므로 아무런 의심 없이 약속 장소에 나갔다. 누군가 D를 때렸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남자 무리가 어두운 곳에서 자신의 옷을 벗기고 있었다. 놀라 소리를 지르는 D의 모습에 무리는 달아났다. 그때 D가 전화해 도움을 청할 곳은 부모님도, 선생님도, 교회 전도사님과 목사님도 아닌 또래 남자 친구였다. 결국 D는 끝까지 이 일을 부모님에게 알리지 않았다. 아니, 알리지 못했다.


5. E는 어릴 때 동네 아저씨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범인은 검거되었으나 E는 성장하는 동안 동네에서 범인의 가족들과 무수히 마주쳐야 했다. 그날 이후, E는 제대로 된 상담 한 번 받아본 적이 없으며 여전히 범인의 가족들과 한 동네에 살았다. 범인의 출소 소식도 들어야 했다. 지금도 동네에서 범인을 마주칠까 두려워하는 E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트라우마를 가진 채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 밝게 지내고 있다.


6. 대학교 신입생이었던 청년 F는 여름방학을 맞아 동기들과 약속을 잡고 만났다. 점심을 먹기 위해 예닐곱 명이 식당 앞에 우르르 모여있었다. 친구들에게 밀려 뒷걸음질 치던 F는 누군가와 부딪혔다. 뒤를 돌아 '죄송합니다.'하고 사과를 했다. F와 부딪힌 중년 남성은 살벌한 눈으로 F를 훑어보며 말했다. "씨발 다리도 두꺼운 게" 청치마를 입고 있던 F는 하루 종일 아무것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저 중년 남성의 한 마디만 계속 생각났다.


7. 청소년 G는 사귀던 남자 친구와 관계를 맺었다. G가 싫다는 의사를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남자 친구는 계속 관계를 요구했다. 원하지 않았지만 남자 친구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던 G는 관계 이후 혹시나 임신이 되지 않을까 걱정했다.




     앞선 일곱 명의 사례가 당신에겐 어떻게 다가오는가? 픽션으로 다가오는가? 온라인 사이트에서 돌아다니는 글을 긁은 것처럼 보이는가? 아니면 자신과 주변 이들의 이야기로 다가오는가? 누군가는 '이런 일이 있다고?'라는 반응을, 누군가는 '이런 일이 뭐? 이렇게 흔한 걸?'이라는 반응을 보일 거라 생각한다.

    위 일곱 명의 여자들은 지금까지 내가 다양한 곳에서 만난 크리스천 청년, 청소년들이다. 이들은 모두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이들이다. 그리고 저 가운데 청년 F는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이다. 살면서 딱 한 번 마주친 중년 남성에게 들은 욕설 때문에, 대학 생활 내내 나는 다리를 가리는 긴치마와 치마 레깅스만 입고 다녔다. 그리고 페미니즘을 접한 지금에 와서야 당시의 청년 F가 '여성 혐오'의 피해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청년, 청소년들이 마음 깊숙한 곳에 숨기고 있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야 했다. 우리 교회에는, 우리 공동체에는, 우리 부서에는 위와 비슷한 일들을 겪은 이가 하나도 없을까? 말 못 하고 감추고 있는 이가 정말 더 없을까? 부끄럽게도 2018년을 기점으로 그 이전의 나에게는 앞서 언급한 여성 혐오의 사례들이 전부 남의 이야기였다. 물론 나조차도 알지 못하는 사람의 언어에 상처 받고 무너지고 있었으면서도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했다.

    정말 마음 아프게도 나를 포함한 위의 일곱 명의 여자들은 지금도 교회 공동체 안에 있다. 주어진 일상을 살아내고 그 가운데 신앙을 지키려 애쓴다. 그리고 그와 함께 '여자이기 때문에' 자신이 맞닥뜨리는 위험과 절망, 분노의 상황을 누구에게도 섣불리 공유하지 못한 채 끙끙대고 있다.



    수영을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물에 빠진 사람은 본능적으로 팔과 다리를 휘젓는다. 살기 위해서 움직인다. 내 앞에 놓인 위기의 상황을 빠져나가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위에서 이야기한 청년, 청소년들이 물에 빠진 사람과 진배없다고 생각한다. 체감하는 깊이만 다를 뿐, 이들은 자신의 삶에서 '여자'이기 때문에 만날 수 있는 위기 상황을 만난 것이다. '여자'로서의 삶과 일상이 잔잔한 물이든 큰 물이든 '위기의 물’에 잠겨가고 있다. 얕은 물속에서 발목까지만 잠긴 이들도 이와 같은 경험이 쌓이고 쌓이면 큰 물에 빠져 허우적 댈 것이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팔과 다리를 휘젓듯이 페미니즘에 관하여 검색할 것이다. 책을 찾아보고, 커뮤티니에 접속하고, 영상들과 기사를 정독할 것이다. 바로 나처럼 말이다.


    정확히 2018년 1월부터 결혼을 준비하기 시작한 나는, 그 시간 이후로 발목부터 서서히 잠겨갔다. 청첩장을 전해 드리러 찾아간 목사님에게 '목사가 되려는 여자와 결혼하면 피곤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의 상황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웨딩드레스 입을 사람이 다이어트를 안 하냐며 눈살 찌푸리는 사람들을 보았을 때, 결혼을 결심한 이후에 나는 사역을 하는 교회에서 조차 '사모님'으로 불리지만 남편은 어느 곳에서나 똑같이 '전도사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깨달았을 때, 주변에서 경중에 관계없이 언어와 행동으로 성적인 폭력을 당한 이들을 발견했을 때, 그리고 어렸을 때의 나 자신 또한 피해자임을 발견했을 때. 구체적으로 옮기지 않아도 많은 경험들이 나를 머리 끝까지 잠기게 했다. 나는 살기 위해서, 나에게 벌어진 일들과 내 눈에 보이는 일들에 관해 스스로 답을 내리기 위해서 페미니즘에 관한 책들을 구매하기 시작했다.

    물에 잠긴 나는 본능적으로 팔과 다리를 휘저었다. 그러다 마주한 것은 나와 똑같이 위기 속에서 팔과 다리를 휘젓고 있는 다양한 나이,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서점에 있었고, 도서관에 있었고, 온라인 커뮤니티 안에 있었고, 동영상 플랫폼 안에 있었고, 뉴스 기사 속에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내가 만지고 손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참 이기적 이게도 '전도사'였던 내가, 영적 양육의 책임이 있었던 내가, '체감하지 못했다'는 변명과 함께 그들이 물에 잠겨 허우적거리도록 내버려 뒀던 것이다. 그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을 때마다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에 관한 무기력이 함께 찾아왔다.



        민음사에서 <한편>이라는 인문 잡지를 창간했다. 첫 호의 주제는 '세대'였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이들이 말하는 '세대'에 관해 담은 이 잡지에서 눈에 들어왔던 것은 열 편의 글 중 세 편의 젠더 관련 글, 그리고 그중 박동수의 <페미니즘 세대 선언>과 이민경의 <1020 탈코르셋 세대>이다. 이 인문 잡지의 목차에서 알 수 있었던 것은 세대를 논할 때 더 이상 젠더 이슈를 간과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두 편의 글에서는 각각 2030 세대를 페미니즘 세대로, 1020 세대를 탈코르셋 세대로 선언하고, 칭한다. 나는 이 글들을 통하여 교회 안에서 말하는 다음 세대와 페미니즘이, 더 폭넓게는 다음 시대와 젠더 이슈가 어떤 형태로든 서로 관계 맺을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다(여기서 젠더 이슈는 페미니즘과 함께 퀴어, 트랜스젠더 등 성소수자들에 대한 이슈도 포함한다. 고로 '페미니즘 <젠더 이슈').


 그러나 우리가 목격하고 있듯이 새로운 세대는 자신들만의 고유한 의제를 가진 능동적 행위자로 부상하고 있다. 세대적 행위자를 사회 구조의 희생양이 아니라 그러한 구조에 개입하는 당사자로 보려면 새로운 명명이 필요하다. p.30
나는 이들을 '페미니즘 세대'라고 명명하고자 한다.(왜 안 되겠는가?) 이 말은 오늘날의 청년세대 모두가 페미니스트라는 것이 아니라, 청년세대가 페미니즘과의 긍정적 또는 부정적 관계 설정 없이는 자신의 정치적 주체성을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이 '대중적 페미니즘'이라는 비가역적 사건을 경험하고 그 사건을 주체화한 세대라는 뜻이다. p.30-31


    박동수는 2030 세대를 페미니즘 세대라고 선언한 이유를 그들이 도마 위에 오르는 다양한 페미니즘 이슈들에 대해 어떤 모습으로든 받아들이고 있으며, 이에 관한 이슈가 없이는 정치적 주체성을 확보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나 또한 다수의 청년들이 다양한 이슈에 대해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어떤 의견을 취하고 있는 것을 주변에서 쉽사리 볼 수 있었다(대표적으로 작년에 개봉한 <82년생 김지영> 영화에 대한 반응을 생각해볼 수 있겠다). 이들이 자신의 정치적 주체성을 세워가는 데 있어 페미니즘과 관계한다는 사실에 비추어본다면, 과연 이들이 신앙의 주체성을 세우는 일은 해당 이슈와 관련 없이도 가능할까? 이에 대한 대답으로 나는 이 글의 앞으로 돌아가, 청년 B의 사례를 다시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우리는 여성성을 수행하기 위해 일상에서 필요한 행위를 일절 거부하는 탈코르셋 운동을 통해, 여성이 저마다의 이유로 꾸밈을 통한 긍정적인 자아상을 실현하던 시대로부터 일상에서 외모가 아무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 여성이 출현한 시대로 이동하는 광경을 목격하고 있다. p.56


    이민경은 "일상에서 외모가 아무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 여성"의 출현이 1020 세대 안에서 두드러진다고 말한다. 참 재밌게도 누군가는 이들에게 앞선 세대와 다르게 지나치게 꾸민다고 눈살을 찌푸리고, 다른 누군가는 이들의 일상에서 외모가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앞서 박동수가 표현한 "긍정적 또는 부정적 관계 설정"이 이 경우에도 해당하고 있다. '여성의 외모', '꾸밈', '탈코르셋' 등의 이슈에 관해 1020 세대는 자신에 대하여, 그들을 바라보는 기성세대는 그들에 대하여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부지런히 관계를 설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1020 세대는 교회에서 말하는 다음 세대이다. 그리고 기성세대는 그들을 양육하는 세대이다. 이미 교회 안의 기성세대 또한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해당 이슈에 관계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전도사'다. 교회 안에 속해 있으며 이제 '목사'가 되기 위해 정식 과정을 밟을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는 많은 선배들이 있다. 목사님이든 전도사님이든, 그들은 이제 막 시작하는 나를 위해 따듯한 격려와 아낌없는 조언을 건넨다. 그들은 다가오는 세대, 즉 '다음 세대'를 위해 사역을 해야 하는 나에게 현실적인 조언과 다양한 경험을 들려준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의 삶에 적용하는 것이 좋다. 더 깊은 공부와 묵상을 권면하고, 경제생활에 대해 구체적으로 조언을 하고, 성도들과의 관계에 관하여,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는 법에 관하여, 사역의 세세한 기술들에 관하여 말하는 그들이 나는 대단히 멋진 선배라고 생각한다. 나는 절대 그들처럼 할 수 없다는 마음과 함께 존경을 담아 보낸다.

    그리고 나와 같은 세대로서 현재 열심히 사역을 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 열심히 지금의 1020, 2030 세대를 위해 노력하고 헌신하는 이들이 있다. 아직도 아날로그 감성을 가지고 있는 나는, 가끔 그들이 발 빠르게 시대에 맞춰 다양한 도구로 말씀을 전하고 양육하고 청년, 청소년들과 소통하는 모습을 보면서 감히 내가 따라갈 수 없음을 느끼고 혀를 내두른다. 정말 마음을 다해서, 시간과 힘과 돈을 아낌없이 투자해 사역하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다.


    글을 마무리하며 믿음의 선배들보다, 활력 넘치는 동역자들보다 한참 부족한 내가 더 부족한 글로 그들에게 감히 이야기하고 싶은 한 가지는 페미니즘을, 더 나아가 젠더 이슈를 함께 공부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청소년들 중에, 우리 청년들 중에 '위기의 물'에 잠겨 허우적거리고 있는 이가 없는지 한 번만 돌아봐 달라는 것이다. 기분 나쁜 말을 듣고도 자신이 왜 기분 나쁜지 알지 못하는 이들과 여자로서 수치스러운 일을 당했음에도 사회적 편견으로 인해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이들, 자연스럽게 페미니즘 용어를 사용하는 아이들과 더 나아가 일상에서 트랜스젠더 BJ의 영상을 보고 퀴어 축제에 관한 기사를 쉽게 접하고 있는 아이들. 이들이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와 환경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정체성을 세워나가고 있는지에 관하여 우리는 관심을 가져야 한다. 더 좋은 사역을 위해, 나에게 맡겨진 사랑하는 한 영혼을 위해 그들이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빠질 수 없는 페미니즘과 젠더 이슈에 조금의 관심이라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교회 공동체 안에서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할 수 없고, 모두가 같은 입장을 가질 수는 없지만 동일한 주제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하며 각자의 입장은 가질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생겨난 '각자의 입장'은 감정적인 대처나 무분별한 비난, 극도의 무관심을 예방할 수 있다. 서로의 입장이 달라 얼굴을 붉히게 되더라도, 그것을 나누는 대화가 오고 가는 것이 자연스러워진다면 어느새 함께 답을 찾아나가는 동역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인터넷 기사를 볼 때면 종종 사회면을 가득 채우는 페미니즘과 젠더 관련 이슈에 관하여 '사랑하는 한 영혼이 가진 입장'에 소통조차 하지 못하는 사역자는 되지 말자고 나 자신에게 간절히 부탁한다. 잘하자, 김전도사.



*2019년 말에 쓰기 시작해서 2020년 초에 완성했던 이 글을, 5월 말이 다 되어서야 발행한다. 처음에는 너무 감정적으로 쓴 것 같아 망설였고, 다음으로는 중요한 주제를 부족한 말솜씨로 풀어내는 것이 두려워 망설였다. 지난 다섯 달 내내 마음 한편에서 썼다가 지웠다가 했던 이 글이 결국에는 어느새 느슨해진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글이 되었다. 처음 이 글을 써 내려가던 마음이 지금은 있는가? '한 영혼의 입장'에 소통하기 위한 노력을 스스로 하고 있는가? 오늘도 망설이다가, 스스로에게 채찍질하기 위해 결국 발행한다. 지금의 나는 누군가에게 함께 공부하자, 고 권할 상황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나 스스로에게 함께 공부하자, 고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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