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부부, '집 밖'에서의 일과 '집 안'에서의 일을 동시에 인정하기
인스타그램을 통해 연재되는 만화를 인스타툰이라고 한다. 내가 챙겨보는 인스타툰 중 하나는 이혼 전문 최유나 변호사의 <메리지 레드>다. <우리 이만 헤어져요>라는 제목으로 단행본도 나왔다. 이혼 전문 변호사로서 의뢰인들을 만나고 재판을 준비하며 느끼는 것들을 만화로 그려내는데 현실적이기도 하고 생각할 거리가 많아 정기적으로 보고 있다. 지난 10월 업로드된 140화 <가정법원띵언편(2)>에서 피고와 원고가 서로 자신은 잘못이 없다고, 상대방에게 잘못이 있지 않느냐고 우긴다. 그것을 들은 조정 위원이 하는 말이 참 묵직해 기억에 남는다.
"여기 오시는 분들이 가장 많이 하시는 말씀이.. '객관적으로 누가 잘못이냐', '누가 정상이냐', '길가는 사람 막고 물어봐라'인데요.. 부부관계의 본질은 상호작용 그 자체예요."
해가 바뀌기 얼마 전, 우리 부부가 크게 다퉜다. 다툼의 이유는 흔하게도 집안일이었다.
작년 한 해 파트타임 사역자였던 나는 평일 내 집에 상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풀타임 사역자인 남편은 귀가 시간이 기본 열 시였다. 아무리 집안일과 친하지 않은 나라지만 양심상 집에 있는 시간이 더 많은 내가, 더 많은 몫을 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다른 이들처럼 부지런히 쓸고 닦고 정리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때가 됐다고 생각하면 으-쌰하고 일어나 밀려있는 집안일들을 처리하곤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마음속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나 혼자 하는 거 아니야?'라는 말들이 조용히 쌓여가기 시작했다.
야근이 잦은 남편은 집에 들어와서 씻고 쉬기 바빴다. 물론 교회 일이 바쁜 것도 잘 알고 몸이 피곤하고 힘든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가끔은 둘 모두 바쁜 주말조차 내 머릿속에만 집안일이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아 서운할 때가 있었다. 나는 남편의 흰 티셔츠나 와이셔츠가 떨어지면 겪게 될 상황을 생각해서 금요일 밤, 예배가 끝난 후에도 세탁기를 돌리고 있는데 남편은 대체 무얼 하지? 나는 쓰레기를 정리해 내놓아야 하는 주일마다 아침부터 언제 정리해야 하는지 시간을 계산하고 있는데, 왜 남편은 집에 와서도 쓰레기를 정리할 생각조차 안 하지? 이런 생각이 쌓이던 중 베란다에 아무렇게나 쌓여있는 옷 정리함이 내 감정의 트리거 역할을 했다.
쌀쌀함이 지나가고 여름이 오던 지난 계절에는 바쁜 남편 대신 나 혼자 두꺼운 옷을 정리했다. 함께 정리하고 싶었지만 남편은 시간이 나지 않았고 옷을 사방에 그냥 방치해둘 수도 없었다. 혼자서 옷을 개고 천으로 만든 정리함에 차곡차곡 넣었다. 겨울 옷이라 꽤나 무게가 나갔다. 끙끙대며 베란다로 옮기다가 결국 힘이 부족해 정리함이 찢어졌다. 어찌할 도리가 없어 제습제만 가득 넣어둔 채 비가 오는 여름 내내 옷 정리함을 베란다에 뒀다. 여름이 가고 다시 두터운 옷을 꺼내야 할 때, 나는 지난 경험을 떠올렸다. 분명 내가 혼자 옮기다가는 정리함이 남아나질 않을 것이다. 그래서 정리함을 베란다로 옮기는 일을 남편에게 부탁했다.
세제인지 주방 용품인지 무언인가를 찾으러 베란다에 갔을 때, 나는 옷이 적게 들어간 정리함이 제일 밑에 박혀 있는 모습을 봤다. '상식적으로 천으로 만들어진 정리함은 모양이 고정되지 않기 때문에, 옷이 가득 든 상자를 바닥에 깔고 옷이 반쯤 든 상자를 그 위에 올려야 제대로 정리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남편은 도대체 왜 옷상자를 이렇게 정리해놓은 걸까? 집안일을 너무 대충 하는 것은 아닌가? 너무 신경 쓰지 않는 것 아닌가? 아니 교회에서 이런 방식으로 일을 하고 있나? 만일 그렇다면 큰일이고, 그렇지 않다면 나에게는 너무 상처가 될 것 같은데? 감정이 마구잡이로 솟구쳐 올랐다.
결국 며칠 뒤 저녁, 정말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정색을 했다. 그리고 그동안 못한 말들을 쏟아냈다. 도대체 왜 설거지를 한 후에 음식물을 배수구에 그대로 방치해두며, 왜 옷상자를 저렇게 정리해뒀냐고. 혹시 밖에서도 일을 이런 식으로 하냐고, 집이라서 대충 하는 거냐고. 마구잡이로 잔소리 공격을 퍼부었다. 내 얘기를 듣던 남편도 기분이 나빠졌고 우리는 아주 오랜만에 큰 소리로 싸웠다.
남편의 입장은 그랬다. 솔직히 지금 우리의 상황이, 너는 집에 있고 나는 밖에서 늦게 까지 일을 하고 있지 않냐고. 내가 밖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다 우리 가정을 위한 건데 너는 왜 너만 가정을 위해 일하고 있는 것처럼 말하냐고. 내가 쩨쩨해 보여서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사실 네가 집안일을 한다고 얘기는 하는데 내 눈에는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고. 나도 너만큼은 한다고. 네가 한 번 대청소를 하고 나면 얼마나 생색을 내는 줄 아냐고. 너도 미뤘다가 하지 않냐고 왜 나한테만 뭐라고 하냐고. 우리는 '네가 더 이기적이야!'라는 말을 여러 형태로 바꿔서 서로에게 내뱉었다. 누가 더 이기적인지 논해보자고 달려들면서 서로에게 서로를 깎아내렸다.
앞서 이야기했듯 부부관계의 본질은 상호작용 그 자체이다. 갈등의 책임은 둘 모두에게 있었다. 나는 실제로 집안을 청소하느라 하루를 다 쓴 날이면 남편에게 엄청난 생색을 부렸다. 집이 좀 깨끗해진 것 같지 않아?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 줄 알아? 시간을 얼마나 쓴 줄 알아? 남편은 말 그대로 집안일에 소홀했다. 몸이 힘들고 피곤하다는 이유로 '시켜야만 하는' 소극적인 태도로 가정의 일에 임했다. 그런 태도는 처음 우리가 결혼을 했을 때 나눴던 대화들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구시렁거렸고 감정이 쌓여갔다. 결국 그런 우리의 상호작용이 갈등을 낳은 것이다. 어찌어찌 화해를 했다. 그리고 다시 비슷한 일상이 반복되었다. 싸움 후에, 남편은 '시켜서 하는' 집안일이 되지 않도록 노력했고 나는 생색을 내지 않도록 노력했다. 그렇게 한 해가 마무리되었다.
12월 31일, 전부터 읽고 싶었으나 미뤄두었던 책을 읽기 시작했다. <단 하나의 문장(구병모, 문학동네)>이라는 소설집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 수록된 <한 아이에게 온 마을이>라는 단편을 읽으며 나는 얼마 전에 있었던 우리 부부의 싸움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한 아이에게 온 마을이>의 주인공 정주는 임산부이다. 교직에 있는 남편 이완이 '전교생이 스물다섯 명인 시골 분교'로 발령이 나는 바람에, '산골'이라서 이삿짐센터에서도 짐을 옮기는데 일박 이일 견적을 내는, 그런 곳으로 이사를 간다. 그리고 정주의 뱃속에 있는 한 아이에게, 어르신이 가득한 그 온 마을이 소위 고나리질을 한다. 이 단편을 읽으면서 나는 자본주의 사회가 돈이 되지 않는 가사 노동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에 관하여 생각하게 되었다. 다음은 해당 단편의 일부 문장들이다.
그가 그런 중대한 바깥일을 수행하는 동안 정주는 퇴직으로 수입 절반이 잘려나간 만큼, 암만 해도 빛 안 나고 안 하면 대책 없는 자잘한 노동을 전담해서 이완의 짐을 덜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p.50
물론 밥과 빨래와 청소를 했고 자신은 목둘레가 늘어난 임부복만 걸친 채 이완이 밖에 입고 나갈 셔츠와 바지를 다리는 한편 부족하거나 소진된 살림을 살펴 채웠으며, 서울에 돌아가서 살 집을 마련하기 위해 십원 단위까지 가계의 모난 부분을 두드려 맞추는 데 촉을 세웠다. 그러나 그중 어떤 것도 노동이 아니었다. p.77
아이를 가졌기 때문에 해야만 했던 퇴직임에도 가정의 수입이 줄었으니 가사를 전담해서 남편의 짐을 덜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고, 하루 종일 암만 해도 빛 안 나고 안 하면 대책 없는 자잘한 노동을 했건만 그중 어떤 것도 노동이 아닌 현실에 대하여, 나는 이 단편을 통해 생각하게 되었다. 나 또한 수입이 적다는 이유로 '양심상' 내가 가사를 더 맡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남편으로부터 '너 하는 만큼은 나도 한다'는 말을 들은 후였다. 물론 나는 임산부가 아니기 때문에 가사에 투입할 에너지를 더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은 인정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위의 구절들을 곱씹어 읽으며 단순히 나의 상황에 대한 공감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앞서 언급한 우리 부부의 상호작용과 그로 인한 갈등 상황에 있어서 우리에게 근본적인 문제가 하나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가 가진 가장 큰 문제는 두 사람 다 가사노동을 노동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더 쉽게 말하면 돈이 되는 노동을 우위에 두는, 지극히 자본주의에 입각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다. 지금껏 우리는 노동을 차별하고 있었다. 내가 대청소를 하고 나서 남편에게 생색을 냈던 행동의 이면에는 나의 귀한 하루를 고작 집 청소를 하는데에 써버렸다는 생각이 있었고, 남편이 집안일을 설렁설렁 대충대충 했던 것의 이면에는 돈을 받는 직장에서 하는 업무보다 집안에서 해야 하는 일들이 하찮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생각과 삶의 태도를 가지고 서로 상호작용했으므로 당연하게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이전에 <페미니스트도 결혼하나요?(부너미 지음, 민들레)>라는 책을 읽고 남편에게 권했었다. 남편도 밑줄을 쳐가며 열심히 읽었다. 책을 쓴 기혼 페미니스트들의 글에 분명히 임금노동에 밀린 가사노동, 돌봄 노동에 대한 주제들이 있었다. 여러 글 중에서 가사노동, 가족들을 향한 돌봄 노동도 엄연한 노동이라며, 사회가 인정하지 않아도 스스로 노동자가 되겠다며 국민연금 지역가입자로 등록했다는 글을 정말 인상 깊게 읽었다. 그때 나는 분명히 집 안에서 필요한 노동도 노동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1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임금노동을 가사노동보다 우월하게 생각하며, 서로에게 하찮은 노동을 하지 않는다고 핏대를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구병모 작가의 단편을 읽고, 결혼한 페미니스트들의 글도 다시 찾아 읽고, 남편에게 넌지시 말을 걸었다. 나의 생각에는 우리가 집안일을 돈을 받고 하는 노동보다 가볍게 생각하고 하찮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오빠의 생각은 어떠냐고. 남편에게서 동의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우리가 너무 가볍게 여기고 있었다고,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고.
구병모 작가의 탁월한 표현처럼, 집안일은 "암만 해도 빛 안 나고 안 하면 대책 없는 자잘한 노동"이다. 그러니 누군가는 꼭 해야 한다. 그래야 한 가정과 가족 구성원의 일상이 문제없이 돌아갈 수 있다. 어찌 보면 가장 필수적이고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중요한 일이,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가장 냉대받고 기피하는 일이 된 것이다. 물론 일반화할 생각은 없다. 우리 가정에서 그랬다는 말이다.
물론 우리가 집안일, 즉 가사노동을 냉대한 데에는 여러 복합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살아가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이 일을, 지금껏 각자의 어머니가 해주셨기에 깨닫지 못했던 탓도 있을 것이고, 돈 되는 노동이 최고라는 가치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레 학습되기도 했을 것이고, 가정을 이루기 전 임금 노동에 전념했기 때문에 그것을 이어가고자 하는 관성이 존재하기도 했을 것이다. 덧붙여 두 사람 다 감사하게도 지금 하고 있는 사역이 몸은 힘들어도 즐겁고 행복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유가 어찌 됐든 지금 우리 부부에게 중요한 것은 근본적인 생각을 바꾸는 것이다. 가사노동이 쓸모없고 하찮은 일이 아니라 우리 두 사람이 앞으로 살아가는데 매우 중요한, 어쩌면 없어서는 안 될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것. 그러니 우리가 밖에 나가서 즐겁게 일하는 것처럼, 집 안에서도 즐겁게 일하는 것이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는 것. 돈을 받는 일에 대한 책임만큼 나의 삶을 운영해 나가는 것에 대한 책임이 이 노동 안에 있다는 것. 어쨌든 가사노동도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노동이라는 것.
'신혼부부'로 불리는 것이 좋은 점 중 하나는, 우리가 아직 결혼 생활에 있어 초보라는 점을 인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초보임을 인정하는 것은 앞으로 더 좋은 방향으로 상호작용하며 발전해나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니까 말이다. 우리는 아직 결혼한 지 2년도 되지 않은 신혼부부이다.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상호작용해온 것 이상으로, 앞으로 더 많은 것들을 나눠야 한다. 이제라도 깨닫게 된, 우리 안에 있는 잘못된 생각과 가치들을 뒤엎고 각자의 삶과 우리 가정을 위해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집안일'을 더 사랑할 것. 서로의 '집 밖'에서의 노동과 '집 안'에서의 노동을 동시에 인정해줄 것. 그리고 배려해줄 것. 그래서 두 사람 모두가 진짜 노동과 진짜 쉼을 누릴 것. 이것이 아직 두 돌이 되지 않은 우리 가정에게 주어진 숙제이다. 숙제 해결을 위해 아마 우리는 매일 끊임없이 상호작용을 해나갈 것이다. 그 상호작용의 결과가 더 이상 갈등이 아닌 성숙한 관계가 되기를 꿈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