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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나와 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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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ley Jul 14. 2023

엄-마하고 부를 때


7개월에 접어든 아기는 이제 입이 트였다. 입에서 쉴 새 없이 소리가 흘러나오는데, 가끔은 사람의 말 같지만 또 가끔은 어느 행성에서 들을 법한 말이기도 하다. 아기는 '아- 아- 으아! 하아아!' 하는 소리들 가운데 '엄-마'라는 소리를 명확하게 내기 시작했다. 입이 트인 아기는 조금 과장해서 하루에 백번 넘게 엄-마 소리를 낸다. 처음에는 '엄-마' 소리가 전부 나를 부르는 것이라 여겨 귀엽고 기특하고 뿌듯하고 좋아서 어쩔 줄 몰랐으나 갈수록 의심이 생겼다. 그냥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낼 수 있는 게 엄마 소리 밖에서 없어서 저렇게 엄마를 불러대는 것 같은데? 몇 주 동안 지켜본 결과 의심은 사실이었다. 아기의 '엄-마'는 때로는 나를 부르는 소리가 맞고, 때로는 말을 하고 싶은데 할 수 있는 말이 그것뿐이라 내는 소리도 맞다.


갓 태어났던 아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엄마를 쳐다보기 시작했고, 다음으로 알아보기 시작했고, 이제는 찾기 시작했다. 낯을 가리는 시기에 접어든 아기는 낯선 사람들이 자신을 안으면 목청껏 운다. 그리고 딱 그만큼 일상에서 엄마를 찾는다. 그 유명한 '엄마 껌딱지'의 시기가 오고야 만 것이다.

'엄마 껌딱지'는 애착이 잘 형성되어 아기가 시기에 맞게 잘 발달하고 있다는 증거이니 참 기쁜 소식이지만, 엄마인 나의 입장에서는 한숨이 나오는 신호, 마음을 다잡아야 하는 신호다. 신생아 때는 아무것도 모른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여러 사람에게 척척 안겼던 아기가, 이제는 엄마를 찾으며 엄마에게만 붙어있으려고 하니 그만큼 나의 자유와 체력을 잃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아기는 양가 할아버지 할머니가 안았을 때도 얼굴이 빨개져라 울어 나를 퍽 난처하게 만들었다. 누군가 예쁘다며 가까이 와도, 이모와 삼촌이 귀여워서 쓰다듬어도 뿌엥하고 울며 나에게 안겼다. 잠을 자야 할 시기를 놓쳐 피곤하거나 배가 고파서 예민해졌을 때는 아빠가 달래도 소용이 없다. 한두 달 전만 해도 그냥 울다가 엄마가 안으면 그치는 상황이었으나, 이제는 울면서 엄마를 대놓고 찾으니 그 부름을 무시하며 다른 일을 하기가 상당히 어려워졌다.



아기가 '엄마 껌딱지'임을 느낄 때는 울 때뿐만이 아니다. 자유와 체력을 잃었으나 이 시기가 그다지 힘들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기가 다른 누구도 아닌 엄마를 보면서 가장 환하게 웃기 때문이다. 아침이 되어 잠에서 깨면 아기는 곧장 뒤집어서 이불과 장난감을 만지고 물고 빨며 논다. 그러다 엄마와 눈이 마주치면 눈이 휘어지게 웃는다. 찡얼거리다가도 엄마의 얼굴이 보이면 환하게 웃는다. 아기를 안고 화장대 앞에 서서 거울을 보여주면 그 속에 있는 엄마를 보고 또 웃는다. 아기의 웃음은 '엄마 껌딱지'의 긍정적인 측면이다. 아니, 긍정을 넘어서 육아의 순수한 에너지원이다. 엄마를 찾고, 이내 시야에 들어온 엄마를 향하는 아기의 웃음은 무엇보다도 값진 '아가페' 사랑이다.


흔히 부모의 사랑을 '조건 없는 사랑'이라고 표현한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낌없이 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기를 키우면서 깨달았다. 끊임없이 나를 찾고 나를 보고 환히 웃으며 엄-마하고 쉴 새 없이 불러대는 아기야말로 '조건 없는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기는 '조건'이라는 단어의 개념조차 모른다. 그냥 무작정 엄마가 좋다. 엄마의 표정을 보니 무언가 언짢은 것 같은데 그래도 좋다. 뭐라고 나한테 큰 소리를 내는 것 같은데 그래도 좋다. 갑자기 엄마가 나를 버리고 어디론가 사라져서 불안해 울며 찡얼거린다. 그러다 현관문을 열고 엄마가 나타나면 울고 찡얼거렸던 상황은 생각나지 않는다. 그냥 또 엄마가 좋다. 그냥 엄마랑 같이 놀고 싶고, 엄마가 활짝 웃어주면 좋다.

엄-마하고 부르며 마냥 나를 좋아해 주는 아기야 말로 '조건 없는 사랑'을 하는 게 아니고 무얼까? 육아에 지쳐 짜증이 불쑥불쑥 올라오고 내 삶, 내 커리어, 나에 대한 걱정이 끊이지 않는 내가 아기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오히려 임신과 출산, 육아의 과정에서 다치고 무너지고 힘든 나의 마음과 삶과 시간이 아기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통해 회복되고 있다.


7개월 차 엄마가 된 지금의 나는 부모의 사랑을 그저 아기의 '조건 없는 사랑'에 보답하고 은혜를 갚는 사랑이라고 정의한다. 이렇게 연약한 나를 엄-마라고 부르며 사랑해 주는 아기. '너'의 곁에 누워서도 '나'의 삶과 '나'의 미래를 걱정하는 '나'인데도 품속에서 얼굴을 비비며 꼭 붙어 잠이 드는 아기. 몸과 마음이 힘들고 지쳐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너 또한 저 구석에 미뤄두는 날에도 엄-마하고 부르며 환히 웃는 아기. 때로는 마음에 여유가 없어 사랑을 주기가 힘들어서 의무적으로 먹이고, 씻기고, 옷을 갈아입혀도 여전히 엄-마하고 부르며 나를 필요로 하고 사랑해 주는 아기.

다른 이들의 입에서 나온 말들, 어쩔 수 없는 사회적 분위기, 내 힘으로는 어찌할 수 있는 현실에 끙끙 앓는 나는 그렇게 아기의 무조건적인 사랑에 의해 회복되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기에게 갚아야 할 은혜는 점점 쌓여간다.



<오은영의 금쪽상담소>를 볼 때 가끔 엄마들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깜짝 놀란다. 모유를 먹어야 하는 시기가 훌쩍 지나 어린이가 된 자녀에게 여전히 모유를 먹이던 엄마나, 인형놀이하듯이 초등학생 자녀에게 '아가'라고 부르며 직접 세수를 시키는 등 과도한 정성을 쏟아붓는 엄마를 보면서 이해할 수 없고 비상식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기를 키우고 있는 지금, 그들 또한 나처럼 아기에게서 무언가 채워지는 경험을 했기에 그런 행동이 나오지 않았을까 곰곰이 생각해 본다. 마음에 상처와 우울이 가득한 상황에서 나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해 주고 나를 필요로 하는 아기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위로를 얻었다. 그런데 그 아기가 커버렸다. 이제 나를 사랑해 주던 그 작은 '아기'가 더 이상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그 사실이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 이전에는 비상식의 영역에 있었던 행동들이 이해의 영역으로 넘어온다. '그럴수도 있었겠구나' 하는 마음이든다. 나 또한 이렇게 아기를 통해 마음이 채워지다가 어느순간 아기의 성장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누군가가 비상식적이라 여길 행동을 할 수도 있으리라.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엄마가 된 나에게 '부모의 사랑'은 더 이상 무조건적인 사랑이 아니다. 아기가 나에게 준 무조건적인 사랑에 대한 '은혜를 갚는 사랑'이다. 지금 나는 작은 아기가 베푸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통해 위로를 받고 마음과 삶이 회복되고 있다. 그러나 언젠가 이 작은 아기가 더 이상 작지 않은 어린이가 되고, 학생이 되고, 성인이 될 것이다. 가까이는 '미운 네 살'을 앞두고 있고, 멀리는 '질풍노도'와 '완전한 독립'을 앞두고 있다. 아마 작은 아기가 더 이상 작지 않을 때, 밉고도 미운 밉상이 될 때, 도대체 어떻게 내가 이런 인간을 낳았나 속으로 화를 삭일 때, 그때가 은혜를 갚아야 할 때가 아닐까 어렴풋이 짐작만 하고 있다.


그러니 지금은 지겹도록 엄-마하고 부르는 아기의 목소리를 만끽하기로 했다. 오로지 '엄-마' 한 단어만 말할 수 있는 지금 이 시기에 아기를 통해 더욱 부지런히 나를 충전하기로 했다. 아기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고 또 받아서 자신감과 자존감을 쌓아나가기로 했다. 작은 아기가 한 명의 사람이 되어가는 쉽지 않은 과정을 함께할 용기와 힘을 잔뜩 모아두기로 했다. '엄-마'하고 부르는 아기를 더 많이 안아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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