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llie May 09. 2020

맨날 시작만 하면 어때

프로시작러의 변명

살면서 '취미가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을 받을 일이 있다. 한창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쓸 때 그랬고, 소개팅에 나갈 때도 그랬다. 뭐랄까, 나라는 사람을 파악하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진짜 궁금해서라기 보단 주어진 역할과 시간 안에 최소한의 대화를 이어나가기 위한 연결고리를 찾으려고 하는 의례적인 질문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당연한 질문이기도 하고, 뻔한 질문이기도 한데 막상 저 질문을 받으면 뭐라고 답해야 할지 막막하다. 자기소개서엔 독서와 수영 정도로 썼다. 소개팅에 나가선 상대방에 따라 적당히 둘러댔다. 


사실 내 진짜 취미는 '(뭐든) 시작하기'다. 


요즘 말로 나는 프로시작러다. 일종의 시작병에 걸린 것 같기도 하고, 뭐든 하고 싶은 게 많은 하고재비(무슨 일이든 하려고 덤비는 사람을 일컫는 경상도 말). 하고재비의 시작병은 대체로 운동할 때 폭발한다. 수영, 요가, 필라테스, 골프, 자전거, 크로스핏, 발레, 보드, 실내 클라이밍, 스쿠버다이빙, 복싱, 서핑, 러닝... 지금까지 해온 운동을 다 열거하자니 두 손가락이 모자랑 지경이다. 앞서 열거한 운동을 하겠다고 옷이며 장비를 사들이는데만 중고차 한 대 값은 족히 썼고, 다종다기한 장비들이 작은 방 하나를 가득 채울 지경이다. 


운동의 시작점은 대체로 작은 로망 혹은 어떤 한 장면이다. 물에서 멋지게 버터플라이(접영)를 해보고 싶고, 다리를 180도로 쭉 찢어 보고 싶기도 하고, 흐트러짐 없이 물구나무서기도 해보고 싶고, 팔당까지 자전거 타고 가서 초계국수도 먹고 싶고, 샤랄라 한 발레복도 입어 보고 싶고, 해녀처럼 물속에서 물고기를 만나 인사도 해보고 싶고, 이시영 배우처럼 복싱해서 챔피언 벨트도 차보고 싶고, 멋지게 파도도 타보고 싶고... 열거하자니 끝이 없다. 운동신경은 없지만 체력은 좋고, 순발력은 없지만 지구력은 있는 편이다. 그래서 어떤 운동이 너에게 잘 맞느냐 묻는다면? 여전히 하나를 꼽진 못하겠다. 지금까지 배워 온 운동을 리뷰해보면 이렇다. 


제일 안 맞았던 운동은 실내 클라이밍이었다. 실내 클라이밍을 하려면 전족처럼 발가락을 거의 구부리다 싶게 말아서 전용 신발을 신어야 하는데, 발가락이 손가락처럼 긴 나는 발가락을 접어  벽을 딛는 게 눈물을 쏙 뺄 만큼 아프고 힘들어서 2번 만에 포기했다. 다행히 전용 클라이밍 슈즈를 사기 전에 도망치듯 그만뒀다. 


복싱과 발레를 동시에 배우기도 했는데 함께 배우기에 적합하지 않은 조합이었다. 복싱은 몸을 한껏 움츠리고 방어하며 재빠르게 발을 움직이면서 잽과 훅을 날리는 유산소 운동이다. 그에 반해 발레는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몸을 늘리고 팔과 다리를 최대한 뻗어 내야 한다. 몸을 최대한 수축해 빠르게 움직이는 운동과 온몸을 뻗어 내며 천천히 선을 만들어 내는 운동을 번갈아 하는 셈이다.  복싱으로 체중감량을 하고, 발레로 몸의 라인을 다잡겠다는 다부진 목표를 세웠다. 회사 근처 발레학원을 끊어 점심시간을 이용해 발레를 배우고, 퇴근시간 이후엔 복싱장엔 들리는 무리한 스케줄을 짰다. 그 어느 것에도 적응을 못하고 당연한 수순처럼 둘 다 그만뒀다. 발레 슈즈와 복싱 글러브는 아직 훈장처럼 집에 남아 있다.  


지난여름엔 서핑을 배웠다. 왜, 그런 거 말이다. 적당히 까무잡잡한 건강한 몸매로 타이트한 서핑복을 입고 파도를 즐기는 모습을 꿈꿨다. 서핑 덕분에 남자 친구를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된 친구 이야기도 들었겠다 '이건 꼭 배워야 돼!' 마음먹고 국내 서핑의 성지 강원도로 향했다. 1시간가량 강습을 받은 뒤 서핑보드를 물에 띄우고 몸을 얹어 파도에 몸을 실었다. 3번 만에 보드 위에 서기 성공! '와, 나 천잰가 봐. 난 역시 물이랑 잘 맞아'라며 끝도 없는 자신감이 뿜뿜했다. 사실 그날은 파도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뭐랄까. 고요한 호수와 같았다. 파도 좀 탄다는 사람이라면 '이런 날은 파도가 없어서 서핑 못 해'라며 발걸음을 돌렸을 그런 날. 알고 보니 나는 그냥 가만히 있는 서핑보드에 몸을 얹었을 뿐, 파도를 탄 게 아니었다. 그것도 모르고 한 번 만에 대단한 서퍼가 된 냥 한 주 내내 들떠있다가 바로 다음 주에 또다시 강원도행을 계획했다. 웬걸, 파도는 친구가 아니었다. 파도에 한 방, 서핑보드에 한 방 크게 두 방 얻어 맞고 서퍼라는 꿈도 조용히 접었다. 수영은 수영장에서만, 파도는 튜브를 끼고 타야겠다고 다짐했다. 


다행히 요가와 자전거, 수영, 골프는 진행 중이다. 요가는 몸이 뻐근한 날 유튜브 채널을 틀어 놓고 요가매트 위에서 꼼지락 거리는 수준, 자전거는 '따릉이 만세'하며 서울시에 사는 즐거움을 누리는 정도, 수영은 일주일에 2번 강습받는 이용권을 끊어 놓고 한 달에 6번 정도 가는데 뻣뻣해 땅 위에서도 웨이브가 안 되는 내가 물속에서 접영을 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아가고 있는 단계, 골프는 억지로 배웠다가 참재미(!)를 알아가며 온갖 골프용품을 사들이고 있는 골린이(골프+어린이)다.  

 

이밖에도 집에 기타며 우쿨렐레가 인테리어 소품으로 자리 잡고 있고, 가죽공예를 해보겠다며 사들인 가죽 조각과 가죽공예 집안 어딘가에 잘 모셔져 있다. 이쯤 되면 취미 부자. 이걸 하다 보면 저게 궁금하고, 요걸 배우다 보면 저걸 하고 싶은데 어떡하랴. 뭐든 해보고자 덤비는 나란 사람은 평생 모든 취미에 입문만 하다 끝낼 작정인가 싶어 어쩔 땐 속상하기도 한데, 그래도 뭐 제대로 하는 건 없지만 뭐든 조금씩은 할 줄 아니 노후에 심심하진 않겠다 싶다. 


시작병 덕분에 인생이 다채롭다. 어쩌면 인생은 작은 시작의 조각들이 모여 이뤄지는 게 아닐까. 


맨날 시작만 하면 어때?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니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