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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놈의 MBTI!

영화 '리얼 페인'

by Ellie


“어휴, 그놈의 MBTI!”


얼마 전 저녁자리에서의 일이다. 저녁 자리에 함께한 일행 중 하나가 어딜 가나 MBTI부터 대뜸 물어대는 문화가 마뜩지 않다고 했다. 최근 몇 년간 MBTI는 그야말로 대유행이었다. 유행이란 늘 그렇듯 유행이 한 바퀴 돌고 나면 회의론도 고개를 들기 마련이다. 사람의 유형을 어떻게 열여섯 가지로만 나눌 수 있겠느냐는 정서가 가장 크다. 혈액형이나 별자리보다 가짓수가 늘어났을 뿐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MBTI와 혈액형을 동급으로 치부하기엔 좀 억울하지 싶다.


나 역시 그놈의 MBTI에 익숙해지기 위해 에너지를 쓰느라 한동안 비슷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나의 MBTI를 알기 위해 수십 개의 질문에 답하는 게 짜증이 났고, 답을 할 때마다 조금씩 다른 결과를 보이는 것도 영 믿음직스럽지 않았고, 내 MBTI를 말하면 ‘절대 그럴 리 없다거니’, ‘그럴 줄 알았다’ 거나 하는 식의 상대방의 반응이 썩 유쾌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날은 왠지 MBTI 편을 들고 싶었다. 생각해 보면 MBTI 덕분에 타인과의 관계를 맺는 데 있어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고나 할까. 나라는 사람을 좀 더 들여다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일종의 MBTI의 순기능이다.


교통사고가 났다는 사람한테 “그래서 보험은 불렀냐”는 말을 제일 먼저 꺼내는 사람에게 서운함을 느낄 필요도 없고, “저는 대문자 I라서”라는 사람한테 “원래 말수가 적으신가 봐요”라고 괜한 질문을 해 상대를 불편케 할 필요도 없다. 우울해서 빵을 샀다는 친구에게 “그래서 무슨 빵을 샀냐”는 질문을 하기보다 “왜 우울하냐”라고 물을 수 있을 만큼 MBTI 학습이 이뤄지기도 했다.


몇 살이에요? 애인 있어요? 주말에 뭐해요? 결혼했어요? 애 있어요? 결혼 왜 안 했어요? 결혼했는데 애는 왜 안 낳았어요? 비혼이에요? 결혼해도 애 안 낳을 거예요? 어디 살아요?라는 식의 질문이 금기시되는 시대에 ‘MBTI가 뭐예요’는 그나마 상대방에게 자유롭게 던질 수 있는 질문이기도 했다. 상대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으로 비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언젠가부터 MBTI를 묻고 MBTI를 기준으로 사람을 나누고 평하는 일이 자연스러워졌다. “쟤는 I라서 집에 가서 쉰 대”, “나는 T라서 공감이 안돼”, “나는 P라서 급 여행을 떠나”라는 식의 자기 어필과 상황 표현과 타인에 대한 이해 등 MBTI를 중심으로 사람을 구분하고, 이해하는 식이다. MBTI가 정답은 아니겠지만 사람을 이해함에 있어 최소한의 단서가 되어준다.



영화 ‘리얼 페인’은 사촌 형제인 데이비드(제시 아이젠버그)와 벤(키어런 컬킨)이 할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그녀를 기리기 위해 그녀가 홀로코스트를 겪었던 폴란드로 여행을 떠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영화다. 요즘 말로 대문자 I와 대문자 E, 극 J와 극 P가 만나서 여행을 떠나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을 만큼 양 극단의 캐릭터로 묘사된다. 둘의 여정을 쫓아가다 보면 감정 기복이 심하고 이른바 프로불편러인 벤지 때문에 여행 중 아슬아슬한 순간이 많다. 둘만의 여행이 아닌 역사 투어를 함께하는 다른 일행도 있기에 그 불편함은 더욱 극에 달하기도 하지만 불편하면서도 묘하게 납득이 되기도 한다. 같은 상황 속에서도 각자 다른 감정을 느끼고 각자의 느끼는 감정의 강도도 다르니까. 슬픔도 마찬가지. 같은 슬픔 앞에서도 각자가 느끼는 슬픔의 형태와 강도가 다르고 자신만의 ‘리얼 페인’ 그러니까 ‘진짜 고통’은 다르게 다가오니까.


‘그놈의 MBTI’ 덕분에 나에 대한 이해도 타인에 대한 이해도 조금은 깊고 넓어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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