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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e Mar 01. 2021

남해에 왜가냐면요? 맥주마시러요!

남해여행 Day1

혼자 떠나는 뚜벅이 여행이기에 짐을 줄여 몸을 최대한 가볍게 했다. 트렁크도 사치다. 배낭을 멨다. 혼행은 얼마간 긴장이 된다. 한적한 시골길이 낭만으로만 다가오지 않는다. 나의 안전을 스스로 챙겨야 한다. 긴장과 설렘을 안고 출발했다. 남부터미널에 가서 버스를 탔다. 4시간 30분 만인 4시 즈음 남해터미널에 닿았다. 은점/미조행 버스를 찾아 물었더니 버스 티켓을 끊고 오라 한다. 매표소에 가서 4시 40분 은점/미조행 버스표(3300원)를 끊었다. 

남해터미널에서 운영하는 버스 운영시간표와 버스티켓. 코로나로 버스시간이 변경된 경우가 많아 꼭 확인해봐야 한다.

기사에게 버스표를 내보이며 은점마을 가는 버스가 맞느냐고 물었다. 농담이랍시고 “안 가리키줄랍리더”한다. 평소라면 '뭔 아재 개그'라고 했을 텐데 잔뜩 긴장한 터라 고개만 까딱하고 마는 것보다 이런 시답잖은 농담도 괜히 반갑다. 혹시나 내리는 곳을 놓칠까 싶어 운전기사께 물어볼 요량으로 맨 앞자리에 앉았다. 터미널에서 얻은 남해지도를 펼쳐 보고 있으니 뒤에 있는 할머니가 “아이고, 아가씨 멀리서 여행 왔는갑네”한다. 

“어디서 왔습니꺼” 묻기에 “서울이요” 답했다.

기사가 묻는다.

“서울 어디요?”

“아, 서울 어디냐면... 저기 그, 강서구 쪽이에요. 목동이라고 하면 더 잘 아실 텐데 목동은 아니고 목동 근처라고 하면 좀 아시려나.”

“강서구 어디요?”

“아, 등촌동이라고...”

“내가 옛날에 신정네거리 살았그든요.” 

“아!”

“옛날에 내가 서울서 한 10년 살았지. 80만 원 들고 서울 올라가서 서울역에서 일주일 동안 노숙하면서 용산에 일자리 구했다 아입니까. 그때는 방값이 왜 그리 아깝든지. 일 구하고 나서 그때 보증금도 없는 30만 원짜리 방에 처음에 살았는데 진짜 한 사람 딱 몸만 누블 수 있는데... 거기서 살면서 돈 벌고 집도 사고했지. 인터넷으로 사람들이 막 사기 시작하고 그라니까 장사도 예전 같지 않고, 또 혼자 계속 살다 보니까 외롭더라고. 그래서 10년 전에 다 정리하고 내려왔지요.”

“아... 그때 그 집 안 파셨으면 많이 올랐겠다.”

어휴, 나는 그 와중에 정말이지 세속적인 리액션을 취했다.

“그르켔네요.”     


5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나는 기사가 20년 전 서울에 80만 원을 들고 올라가 노숙까지 하며 일자리를 구했고, 신정네거리에 살았고, 돈 벌어서 서울에 집도 장만했는데, 장사도 시원찮고 외로운 나머지 10년 전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인 남해에 내려왔다는 TMI를 알게 됐다.        


“남해 몇 박 몇 일로 왔어요? 어데 가볼라꼬요?"

”아, 뭐 딱히 목적지는 없어요. 숙소는 독일마을 근처고요. 2박 3일 일정으로 왔어요(봐서 좋으면 더 있을 건데 아직은 모르겠어요). 일단 꼭 가보고 싶은 데는 독일마을이라서(딴 건 모르겠고 그냥 맥주 먹으려고요)...”

“그 뭐 짜달시리 볼 거도 없는데, 한 반나절이면 금방 볼낀데.”

“아...”

“그래도 뭐 독일마을 땜에 남해 땅값이 마이 오르긴 했지. 옛날에 그 땅값이 평당 500원, 1000원 막 그랬으요. 근데 거기에 독일마을 어쩌고 하더니 땅값이 마, 윽수로 올랐지. 평당 천만 원씩 한다카데요. 또 요새 그 박원숙이가 여기 살면서 방송 타고 이래가꼬 더 하지.”

“아... 저도 TV에서 본거 같아요.”

“그 누고, 류승룡이도 자주 와요. 즈그 와이프랑은 안 오고 친군지 후밴지랑 오드라고. 집은 없다 카든데 진짜 남해가 좋아서 오는 거라고 하던데 모르지요.”

“그렇구나...” 

“근데, 독일마을도 좋은데 남해에 왔으면 다른 덴 안 가도 보리암은 꼭 가야지.”

“아, 거기가 좋아요?”

“날씨 좋을 때 가면 마, 그서 남해가 싹 다 보이그든요. 뷰가 기가 맥히지.”

“보리암은 가야지.” 

뒤에 계신 할머니 두 분도 맞장구를 친다. 

“아, 근데 제가 운전이 안 돼서(그래서 지금 버스 타고 있...)...”

“아, 그라믄 그 뚜벅이 버스라꼬 있는데, 그거 타믄 보리암 가요.”

“네...”

(https://www.namhae.go.kr/tour/00012/00359/00377.web?pageCd=TS0103000000&siteGubun=transport : 대중교통을 이용할 계획이라면 참고하자. 대신 배차간격이 길고 치밀하게 잘 계획해야 한다는 점을 알아두자. 택시는 카카오 택시 같은 건 잡히지 않으니 숙소에 문의해서 번호를 알아두고 미리 예약하는 것이 좋다.) 

숙소 근처 버스터미널에 안내되어 있다

그러는 중에 버스는 계속 가고, 사람들이 자꾸 탄다. 할머니, 그야말로 꼬부랑 할머니가 타시는데 내가 눈치 없이 맨 앞자리에 타버린 바람에 뒷자리로 가야 했다. 내가 뒤로 옮겨야 하나 싶어 엉덩이를 들썩거리다 그냥 앉아있기를 택했다. 그래도 뭔가 가시방석 같은 기분이다.    

     

하나 둘 다 승객들이 내리기 시작하는데 이상한 게 다들 내릴 때 요금정산을 한다. 어디 어디서 탔다 이러면 기사가 “1600원” 답하고 카드나 현금을 내민다. 아니면 나처럼 타기 전 버스 티켓을 사고 버스에서 내릴 때 요금 정산 통에 버스 티켓을 넣으면 된다. 궁금해진 나는 물었다. 

“여기는 버스가 후불젠가 보네요?”

“아, 다들 어디서 어디까지 가는지가 다르니까.”

나는 속으로 버스기사 하기도 참 쉽지 않겠다 했다. 거리당 요금도 알아야 하고, 암산도 빨라야 하니까. 

승객들이 다 내리고 나와 웬 할머니뿐이다. 어느덧 목적지인 ‘은점마을’에 닿았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지도 앱을 켰다. 게스트하우스 이름을 넣고 도보로 가는 길을 파악했다. 그리 멀지는 않은 것 같다. 지독한 길치인 나는 또다시 긴장모드다. 5분 정도 걸었더니 리뷰에서 본 사진의 게스트하우스가 모습을 드러낸다. 리뷰에서 본 사진에서는 투박하고 촌스러운 간판이 번쩍이며 달려있지 않아서 좋아 보였는데, 막상 찾으려고 보니 큰 간판이 아쉽다. 사람 마음이란. 그래도 뭐 이 정도면 어렵지 않게 찾았다고 스스로 위안했다.       

똑똑똑

주인장이 나온다. 

“오늘 예약한 사람인데요.”

“아, 네 이쪽으로 들어가시면 돼요. 여기는 방이고, 저기는 공용 아지트예요. 방은 아마 오늘 혼자 쓰실 거예요. 1층 쓰시면(2층 침대를 쓰는 2인 룸이다) 되겠네요. 수건은 하루에 1장 제공됩니다. 여기는 화장실인데 공용이니까 씻는 건 저녁 11시 전에는 마무리해주세요. 온수는 8시부터 11시까지 나와요. 씻으실 때 참고하시고요.”

“네...”

아지트로 자리를 옮겼다.

“여기서 편하게 책도 보고 TV도 보시면 돼요. 내일 아침 조식도 여기서 제공됩니다. 8시 반부터 11시까지 가능한데, 혹시 몇 시쯤 드실 거예요?”

“아... 그럼 전 9시 정도요?”

“네, 알겠습니다. 그럼 궁금한 거 있으시면 연락 주세요.”

“저, 일단 배가 좀 고파서 뭐 좀 먹을까 하는데, 걸어서 갈만한 식당이 있을까요?”

“아, 버스 타고 오신 방향으로 독일마을 쪽으로 좀만 걸어가시다 보면 도로변에 멸치 보쌈하는 식당이 있고, 좀 더 가다 보면 김밥이랑 라면 파는 분식도 있어요. 아 거기는 매운탕도 하긴 하는데 혼자 드시기엔 좀 많을 거예요.”

“독일마을에는 어디가 맛있어요?”

“독일마을은 다 그럭저럭 한데 가격들이 좀 다 나가요. 평일에는 문도 좀 일찍 닿는 편이고요.”

“네, 근처에 뭐 좀 살만한 데는 있을까요?”

“아까 말씀드린 식당가는 길에 편의점이 있어요. 아니면 숙소 오다가 보셨을 텐데 작은 슈퍼가 있긴 한데 현금만 받아요.”     


일단 동네를 좀 파악할 요량으로 몸을 가볍게 한 뒤 숙소를 나섰다. 숙소를 고를 때 지도에서 보기에 근처에 ‘대형할인마트’라는 이름의 상점이 있기에 기대했는데 웬걸, 간판만 대형할인마트였다. 보기 좋게 차인 기분. 일단은 독일마을을 목표로 삼고 걷기 시작했다. 나는 일단 맥주를 한 잔 마셔야 했으니깐.     

독일마을은 멀리서 보기에도 환하게 ‘여기가 독일마을이오’ 한다. 초입부터 카페며 기념품숍 등 상점들이 늘어서 있다. 남해에서의 첫 끼를 어디서 해결하는 게 좋을 지라는 중차대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 일단 좀 둘러보기 시작했다.     

‘음, 여긴 독일식 소시지를 파네. 생맥주는 몇 개 없네. 독일가정식은 뭐지? 학센도 있네.’     

역시 독일마을답게 가게마다 독일소시지를 판다. 한 바퀴를 둘러본 뒤 내 발길이 향한 곳은 국내 브루어리에서 만든 생맥주가 있는 곳이다. 유명 음식 프로그램에도 나오고, 주말이면 길게는 2시간씩 대기를 타는 곳이라 한다.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좌석이 거의 비어있지 않을 걸 보니 주말이나 휴일에 얼마나 붐빌지 짐작이 된다.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대표 메뉴를 시켰다. 맥주는 한정판매란 딱지가 붙은 걸로 택했다. 종류별로 다 맛보고 싶지만 2잔 정도면 마지노선일 것 같은데, 다른 맥주들은 캔맥으로 유통하고 있기도 해서 여차하면 사 먹을 수 있으니까. 두 번째 잔은 시즈널 한 맥주다. 겨울용 음료이니 곧 메뉴판에서 사라질 테니까.        

검은색 통닭(이름하야 석탄치킨)과 맥주 2잔을 먹고 나니 어느덧 주변 좌석이 다 비었다. 시간은 겨우 8신데, 직원들은 마감 준비에 여념이 없다. 직원들의 퇴근시간에 폐를 끼치는 진상 손님이 되긴 싫으니까 나도 서둘러 자리를 정리했다. 이제 숙소로 돌아가야 한다. 낯선 길은 체감상 더 멀게 느껴지게 마련인데 밤이 깊어지니 한층 더하다.   

   

숙소에 돌아와 모자란 술과 배를 채웠다. 짐을 줄여야 했으므로 e북을 읽기로 하고 책은 최소한으로 챙겼는데 e북을 볼까 하다 아지트 책장이 눈에 들어온다. 사장님 취향이 더해진 책장 리스트가 관심이 간다. SNS에서 여러 번 본 듯한 제목의 책이 눈에 띄어 꺼내 읽었는데 기대 이상이다. 아지트에서 읽다가 책을 들고 방으로 갔다. 오늘은 이 책을 읽으며 잠들면 되겠다.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무루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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