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세상의 전부였던 시절이 있었다. 늘 친구와 일상을 나눴다. 친구는 시시콜콜 재잘대고 나는 대체로 듣는 사람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학교에 가면 친구를 찾고 수업이 끝나고 10분이라는 짧은 쉬는 시간에도 친구를 보기 위해 기꺼이 뛰어갔다. 화장실에도 같이 가고 점심도 같이 먹고 매점도 함께 들렀다. 하굣길도 함께였다. 친구는 학원에 가고 나는 집에 그냥 왔는데, 나도 그 학원을 다니고 싶어 기웃대기도 했다. 공부를 위해서가 아니라 친구랑 함께 있고 싶어서. 그 와중에 쪽지며 편지를 써대기도 했다. 학교에서도, 집에 오는 길에도, 서로의 집으로 가서 내내 붙어있다가도 잠시 떨어지면 서로의 집에 전화를 걸어서 또 친구를 찾았다. 어느 날엔가 서로에게 사소한 오해가 쌓여 싸우기도 했다. 아마 작은 섭섭함과 다른 친구와도 친하게 지내는 친구에 대한 질투, 정도의 마음이었던 것 같다. 대체 옛날엔 뭐가 그렇게 서로가 궁금하고 섭섭하고 늘 할 말이 많았던 걸까.
늘 함께일 것만 같았던 친구의 존재가 언제부턴가 서서히 멀어졌다. 반이 달라지고, 학교가 달라지고, 대학이며 취직이며 결혼을 이유로 물리적 거리감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언젠가부터 서로의 인생의 방향이 너무나 달라졌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이미 낯선 존재가 되었다. 서로의 생활 반경에서 달라지면서 관심사도 달리지고 대화의 주제도 줄었다. 매일 만나도 그렇게 할 얘기가 많던 친구였는데, 이젠 만나봐야 그저 옛날 얘기밖에 할 게 없다. 아니면 뻔한 주식이며 부동산 등 재테크 얘기다. 내가 산 oo주식이 올랐네, oo이가 산 무슨 아파트는 2배로 뛰었네… 아이를 키우는 친구라면 아이의 교육에 초점이 맞춰있다. 영유(영어유치원)에 보내려고 한다거나 요즘은 무슨 사교육을 시킨다거나 하는 식. 아니면 연예인이나 정치인이나 유명인 얘기로 시간을 때운다. 대화거리가 없으니 자연스럽게 연락하는 횟수가 줄고, 그저 이따금씩 문자로 안부를 묻거나 건너 건너 소식을 듣는 사이가 되기도 했다. 지금은 어느덧 인스타로만 서로의 일상을 알고 이따금 좋아요와 댓글을 남기는 사이가 되었거나, 연락이 끊겼거나.
영화 ‘프란시스 하’는 뉴욕 브루클린의 작은 아파트에서 친구 소피와 살고 있는 27살 뉴요커 프란시스의 이야기다. 좁고 낡으면 어떠랴. 내가 ‘쿵’하면 ‘짝’하는 죽이 잘 맞는 친구와 함께 하는, 힘들지만 어떻게든 되어가겠지 싶은 뭘 해도 빛나는 20대 청춘의 날들. 프린시스는 뉴욕에서 보란 듯이 무용수로 성공하겠다는 야심 찬 꿈을 꾸고 있고 친구는 작가를 꿈꾼다. 비록 몇 년째 평범한 연습생 신세일 뿐이지만. 사소한 말다툼 끝에 애인과 헤어지고, 믿었던 소피마저 독립을 선언하면서 그녀의 일상은 꼬이기 시작한다. 일도, 사랑도, 우정도 무엇하나 쉽게 되는 일이 없다. 혼자서는 방세를 감당하기도 힘든 뉴욕에서 홀로서기에 성공하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 방세를 셰어 할, 일상을 나눌 소피의 대체할 친구를 찾아 나서지만 이도 쉽지 만은 않다. 무용수가 되기 위해 방세를 벌어야 하고 방세를 벌기 위해 또 다른 일을 해야만 하고 그럼에도 방세하나 내기 쉽지 않고 방세를 내기 위해 새롭게 사귄 친구와도 어긋나고. 그 와중에 왜 파리로 떠나는지, 거기서 시차 적응에 실패해 그저 잠만 자다 친구와의 만찬이라도 할라 치지만 일정은 꼬이고. 한없이 가벼워 보이고 너무나 즉흥적으로 보여 답답하다가도 어느 날의 내 모습 같아 위로해주고 싶은 프란시스.
늘 함께일 것만 같았던 친구가 내 곁을 떠나갈 때, 친구는 저 멀리 앞으로 나아가는데 나만 제자리인 것 같은 기분일 때, 일도 사랑도 우정도 무엇하나 제대로 되는 일이 없을 때. 친구의 성공을 기꺼이 박수쳐주지 못하는 옹종한 내 마음일 들킬 까봐 자꾸만 더 움츠러들기만 한다. 생각해 보면 청춘은 부모의 그늘을 벗어나고 친구와의 관계에서 조금씩 비껴서 커나가는 시절이다. 뭐든 할 수 있다고, 그 자체만으로 빛난다고, 뭐든 도전하고 부딪히며 배우라고 옆에서 부추기지만 실상을 엉성하고 깨지기 쉽고 유치하고 치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