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적인 사람입니다.
어릴 때부터 자주 듣던 말이 있다.
너 그렇게 울어서 해결하려 하지 마.
난 화가 나도 울고, 슬퍼도 운다. 감정의 기복을 눈물로 표현하는 셈이다. 그런 내게 쭉 따라오는 수식어가 있다. "눈물이 많은 아이" 그런데 어느 순간 이렇게 변했다. "울어서 해결하려는 아이"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감정의 변화를 표현하는 눈물을 쏟던 와중에도 황당해서 눈물이 쏙 들어가더라. 내가 언제 울어서 해결하려 했다는 것일까. 그런데 타이밍 맞게 나를 당황하게 하거나 화나게 하거나 슬프게 만드는 상황, 난처하게 만드는 상황에서 나는 울고 있더라. 그래서 그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나는 울어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이라고.
그래서 울지 않기 위해 애썼다. 눈물이 벅차오르는 순간에도 또박또박 말하고자 노력했다. 그런데 쉽지 않더라. 화가 나지만 눈물이 차올라서 눈물을 삼키다가 시간이 지나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못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억울했다. '나는 뭐 이러고 싶은 줄 아나.' 그렇게 살던 중에 최근 sns에서 어떤 글을 봤다.
A : 야 너 같으면 혼자 하는데 28잔 들어오면 얼마나 걸리냐
B : 눈물 닦는데 5분은 걸리겠는데
처음에는 이 대화의 B의 해결 방식이 좋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혼자 일하는데 28잔이 들어왔다면 얼른 음료를 만들기 시작해야 하지 않나?"라고 생각했다. 조금만 더 생각해보니, 28잔이 들어오자마자 음료를 만들다가 다른 손님들이 몰려오면 주문이 밀릴 것이 분명하다. '이런 상황에서 주문을 받다 보면 음료가 나갈 수 없고, 손님에게 주문이 밀려있어 시간이 걸린다고 말하면 손님이 나갈 것이다. 그러면, 손님이 가버리시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들어온 손님이 나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사장님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그 순간에 일하는 내가 그렇게까지 신경 쓰다 보면 나를 잊게 된다. 나를 챙겨야 할 시기를 놓친다. 이 글을 통해서 '당장의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 나를 먼저 생각해도 됨'을 느꼈다.
아버지와 다툼이 있을 때마다 언제나 반복되는 대화가 있다.
나 : 말할 기분이 아니야.
아버지 : 기분이 뭐가 중요해.
기분이 뭘까. 언어학자 에리카 오크런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기분'은 다른 언어로 번역될 수 없는, 언어와 문화가 강력하게 결합한 한국만의 무엇이라고 말하며, (중략) 'mood'뿐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인간관계와 밀접한 무언가를 뜻하는 단어다. (중략) 그래서 '내 기분 상하게 하지 마'라는 문장은 예의를 지켜달라는 뜻만도 아니고, 자기를 사랑해달라는 뜻만도 아니며, 자기가 누군지 알아달라는 것만 의미하지도 않는다.
이 내용을 소개해준 계정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기도 하더라. "K-기분(KIBUN)" - @shakshak01
이 처럼 기분은 사실 소중하다. 최근에 내가 좋아하는 말이 있다.
뭘 어떡해? 울어야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더 이상 없을 때도 분명 있다. 잘하고 싶었는데, 잘 되고 싶었는데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은 없는 일. 그런 일을 만날 때마다 이런 말이 들려온다. "뭘 어떡해? 그냥 울어야지." 아버지는 기분이 뭐가 중요하냐고 하셨지만, 내가 보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의 내 기분"이다. 기분이 우울하고 속상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반면, 펑펑 울고 난 뒤 기분이 한결 나아지면 다른 해결책을 제시할 수도 있다. 눈물을 흘리는 행위를 통해서 기분을 표출하고 새로운 관점을 보게 해 준다. 이래도 기분이 안 중요한가? 누가 뭐래도 기분이 최고로 중요하다.
그때의 선생님이나 아버지께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었다.
저는 이성적 해결 방식이 아닌 감정적 해결 방식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제가 눈물을 흘리며 감정을 해소할 시간을 주세요. 그 후에 이성적인 해결 방법을 제안하겠습니다.
일단 울고 나면, 감정을 모두 해소하고 나면 하고 싶은 말이나, 해야 할 일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된다. 감정은 지나가고 이성이 찾아와 최대한 빠르게 처리할 테니, 부디 눈물을 흘릴 때만큼은 조금 기다려주기를 바란다. 우리 '서로 기분 좀 지키며 살자.'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