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려드는 숙취를 마주할 때마다 죽도록 마시는 건 자제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와 술을 마실 때면 새해 목표마냥 비장하게 결심하지만, 어겨야 제 맛인 새해 목표답게 자연히 잊혀지고 만다. 몇 달 전 술에 거나하게 취한 채 H와 버스에서 갖은 진상을 떤 이후론 내가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만 마시기로 했는데, 마시고 마시다 보니 빈 병이 늘었다. 어제의 나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주량을 훌쩍 넘겼고, 쓰라린 숙취를 느끼는 오늘의 나는 어제의 기억을 뒤적이며 뼈아픈 후회를 반복했다. 다음 날이면 백이면 백, 후회할 걸 왜 그렇게 마셔댔는지 몰라. 후회하는 동물인 인간다운 생각이었다. 술을 과하게 마신 뒤에 으레 치르는 의식이었지만 이번엔 사안의 심각성이란 것이 덧붙여졌다. 기억이 없었다. 한 번씩 지나가는 숙취로 여기기엔 도가 지나쳤다.
3차를 위해 술집 입구에 들어선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뒤의 기록이 모조리 소실된 채였다. H와(또 H다.) 어떤 이야기를 나눴고, 어떻게 그곳을 빠져나왔으며, 어떤 교통수단으로 어떻게 집까지 왔는지 수십 번을 되짚어봐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 험한 세상에서 간 크게 굴었구나 싶었다. 그 와중에 옷도 갈아입고 화장도 말끔히 지워져 있었다. 할 건 다 하고 잔 셈이었다. 이건 대단하다 싶었다. 잃어버린 내 행보의 흔적이라곤 앉을 때마다 고통이 스며드는 엉덩이와, 가방 한 구석에 있는 담배 한 갑이 전부였다. 엉덩이는 왜 아프며 피지도 않는 담배는 왜 샀는지, 기억이 날 리가 만무했다. 기억이 떠올라도 문제였다. 또 하나의 흑역사로 추정되는 이 기억을 품고 있다 어느 날의 새벽에 들춰내선 한껏 부끄러워할 생각을 하니 수치스럽기 그지없었다. 힘껏 기억을 더듬어보며 가방을 뒤지자 담배를 사고 남은 영수증이 튀어나왔다. 집 앞 편의점이었다. 술에 떡이 된 사람이 참 야무지게도 다녔다.
하루 반나절을 숙취와 떠오르지 않는 어제의 조각들로 끙끙대다 H에게 연락했다. 어젠 정말 미안했어. 혹시 실수한 건 없었어? 떨리는 마음을 안은 채 카톡을 했다. 답장을 기다리는 1분 1초가 천 년 같았다. 떠오르지 않는 술주정도 술주정이었지만, 혹여나 말실수를 한 건 아닐까 두려웠다.
-미안할 건 없어… 다만… 네가 계속 테이블에… 엎드려서… 내가 계속 일으켜 세움… 기억 안 나?
그랬던가?
-계단에서도 넘어지고. 알지? 그건.
아니. 전혀 모르겠는데. 그래서 엉덩이가 아팠구나.
-아… H, 진짜 미안. 담에 만나면 무릎 꿇을게, 진짜.
-그래!
혹시 나가 역시나였다. 몸으로 진상 떠는 와중에 입방정은 떨지 않은 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토요일의 마지막을 나의 진상으로 마무리했을 H가 가여웠다. 그저 미안할 따름이다.
주량을 훌쩍 넘겼을 때 찾아오는 것은 쓰라린 숙취와 진상으로 얼룩진 흔적, 또는 기억이다. 술에 절은 나의 진상을 물어물어 겨우 까 보면 술에 패배해 실수를 저질렀다는 수치심과, 나와 술을 마신 사람, 혹은 주변인에게 폐를 끼쳤다는 진상이 펼쳐진다. 숙취보다 유효기간이 긴 그 진상은 부정기적으로 사고 회로에 끼어들어 밤이 되면 수치심에 젖게 만든다. 짧은 세월 살아왔지만 이 법칙은 거의 틀린 적이 없다.
뜯지도 않은 담배를 공중화장실 쓰레기통에 버리며 또 주량을 넘긴다면 그때야말로 나는 개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번 ‘술에 뻗어버리면 나는 짐승이다’라고 다짐하면서도. 소주 한 잔이 세 잔이 되고, 한 병이 되고, 세 병이 될 것이다. 몸에 익은 습관은 쉽게 지워지지 않으며 인간은 실수와 후회를 반복하는 생물이랬다.
어쩌면 필연적인 것이다.
2017.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