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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광대 Dec 01. 2023

보호자가 되어주세요.

서울에서 고독사를 하지 않기 위해

서울에서 태어나 자란 이는 서울이 기준이기 때문에 일상 속 낯섦을 느끼지 못하겠지만

운이 좋게도 대구에서 태어나고 자랐기에

서울의 이상함을 탐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가령, 같은 색임에도 다른 방향으로 가는 지하철, 지하철이면 1시간 걸리는 거리가 차를 타면 1시간 30분 걸리는 꽉 막힌 도로, 기차도 아닌데 몇 분을 기다려 정시에 출발하는 지하철, 출퇴근길 지하철에 보이는 타인의 핸드폰 화면과 끊기는 블루투스 이어폰, 오전 7시부터 대기를 해야 하는 맛집, 주 5일 편도 2시간의 통근, 부와 빈이 공존하는 다양한 공간, 수많은 서울역의 노숙자, 예수와 정치를 향한 시끄러운 확성기, 내내 공사 중인 횡단보도, 한 끼 1.5만 원 이상의 점심, 6천 원 이상의 커피, 2.5만 원 이상의 술값 등등


이러한 이상함과 신기함은 해외 경험이 있음에도

생활 속 어드벤테이지로 작용하여 약속시간을 넉넉하게 잡아도 정시에 도착하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만들었고, 언제나 생활 예산을 빠듯하게 잡게 했다.


서울코마에 걸려 대구에서는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일을 당연히 여기게 되었을 때, '서울 사람이 다 되었나' 싶었지만 서울 토박이에겐 없는 단 하나,


서울 토박이를 향한 자격지심은

나의 정체성을 잃지 않게 할 것이다.


서울에서의 삶은 '군중 속의 고독'과 일맥상통했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있는데 마음 나눌 이가 하나 없다는 것이 독일에서 살 때보다 괴롭게 만들었다.


독일에서는 언어 장벽으로 인해 애초에 마음을 잇는 소통을 기대하지 않았던 탓도 있었겠지만(돌이켜보면 언어가 소통되지 않아도 깊은 유대관계를 쌓은 경우가 더러 있었다.) 서울은 같은 한국어를 쓰는데도 아는 사람이 없으니 그 고독함은 온전히 스스로 이겨낼 수밖에 없었다.(그렇다고 회사 동료를 주말까지 만날 수 없는 노릇 아닌가.)


일평생 대구에서 살면서 고독함과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이 아니라고 자만했었는데 서울에서는 그 누구보다 외로웠다.


특히 이러한 외로움은 "혼자 아플 때" 서글픔으로 성장한다.


오늘과도 비슷하게 그때 역시도 일상처럼 헬스장에 가서 운동을 하고 있었다.


주말에 가는 운동은 역시나 씻지 않고 모자를 눌러쓰고 가는 것이 국룰.


마스크를 쓰고 눈만 보이게끔 모자를 푹 눌러쓴 채, 마치 투명망토를 쓴 것 마냥 헬스장에서 나의 존재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으려고 했다.


그날 역시 운동을 하면서 삶의 생기를 더하고 있을 때,


스미스 머신의 무게를 올리며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을 올리고 있을 때,


나의 자만이 화를 불렀다.


깡!


아무도 나를 모를 수 없는 소리였다.


모자를 눌러쓴 탓에 시야를 확보하지 못했고 그 결과 스미스머신의 봉에 머리를 아주 크게 박았다.


머리가 너무 아파서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지만 그건 너무 부끄러우니 간신히 머리를 부여잡고 탈의실로 자리를 옮겼다.


푹 눌러쓴 모자를 벗어던지고 이마를 보았고 다행히 피가 나진 않았지만 약간 부어오른 상태였다.


아리고 아파 더 이상 운동은 하지 못하고, 그날 역시 주말임에도 회사에 가서 잔업을 처리했다.


(머리를 부딪혀도 잔업을 처리하는 이 죽일 놈의 책임감! 할렐루야!)


머리를 부딪힌 당시에는 아픈 마음보다 놀란 마음이 더 컸으며 '괜찮겠지'라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시간이 지나도 괜찮아지지 않는 물질적 아픔과 부어오르는 이마에 불안함이 파도처럼 밀려왔고,

이는 핸드폰에 '뇌진탕'을 검색하게 만듦으로써 크기를 키웠다.


하지만 오늘은 주말이었다.


그리고 저녁이었으며, 지금 가면 무조건 응급실행이다.


응급실!


돈이 무진장 많이 드는 그 응급실!


아픈 것도 서러운데 돈이 걱정되어서 병원을 갈지 말지 고민하는 처지가 더욱 서러웠고 눈물세포가 프라임세포인 나는 결국 눈물을 터뜨렸다.


하지만 운다고 상황이 달라지진 않는다. (나 T야?)


택시는 돈이 많이 드니 아픈 머리를 붙잡고 꾸역꾸역 버스를 올라타 홍대 근처 세브란스병원으로 이동했다.


주말 저녁 홍대.


버스 창문을 통해 보이는 유흥으로 미어터지는 홍대의 밤거리


마음속 끊임없이 반짝이고 일렁이는 열등감과 자기 연민.


'나는 이렇게 혼자 서럽게 아픈데, 저 사람들은 뭐가 저렇게도 좋을까'


늦은 밤 병원은 고요하면서도 엄숙했다.


그 분위기에 사뭇 어울리지 않았던 한 모녀.


여자 아이는 나와 비슷한 또래였으며 어머니가 보호자로 와서 그녀를 간호해주고 있었다.

하나하나 살뜰하게 어린 소녀를 사랑으로 보듬어주며, 어머니가 더 이상 걱정하지 않게끔 밝은 목소리로 대화를 이끌어가던,

걱정과 사랑을 만들어내던 모녀였다.


'아, 나도 엄마 있는데,


우리 엄마는 지금 오려면 4시간은 걸리겠지'


그렇다. 비록 걱정할까 봐 아픈 것을 숨겼을지라도 대구에 부모님은 있었다.


하지만 내가 그 무엇보다 자기 연민과 열등감에 빠졌던 것은 '지금 당장' 서울에 보호자가 없다는 것이었다.


보호자가 없는 서울에서 혼자 고독사를 하지 않으려면 욕실에서 미끄러워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며, 주기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아 부모님에게 생존신고를 해야 한다.


혼자서 생존해야 하기 때문에 부지런히 신체를 단련해야 하며, 조금이라도 아프면 병원과 약을 먹어 병을 키우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매달 시달리는 생리통을 견뎌내기 위해 혼자 온찜질을 하며, 어떻게든 활력을 만들기 위해 아득바득 노력해야 다.


혼자 사는 사람은 강해야 한다.


모녀를 보며 또다시 올라오는 서러움을 꾹 참고 진료와 MRI 검사를 끝내고, 검사 결과보다 무서웠던 응급실 진료비 정산까지 마치고 바라본 밤하늘.


낭만 없게도 별도 보이지 않는 서울의 밤.


그렇지만 휴대폰에는 하나의 별이 있었다.


'혹시 보호자 필요하면 나한테 전화해!'


서울에 살고 있는 대학교 친구의 노란색 메시지.


보호자가 없는 서울에서 그럼에도,

보호자를 자처하는 친구가 있다는 것.

생리통에 시달리는 나에게 좋은 약을 추천해 주는 동료들이 있다는 것.

혹시 경찰서나 큰 일 치르게 될 때 연락하라는 상사가 있다는 것.

언제든지 힘들 때 멀리서라도 연락하라는 가족들이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 반짝이는 일이었다.


비록 지금 당장 내 옆에 가족이 되어줄 보호자가 없고

서울에 가족이 있는 이에게 언제나 가질 열등감일테지만


이러한 감정이 미래의 앨리스와 이어주는 하나의 다리가 되지않을까? 생각해보며


세모난 열등감을 동그랗게 빚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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