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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rry Mar 11. 2020

(2) 귀빈 순회 일정

현지인 프리미엄

2019년 1월 15일


 Rosenhöhe 공원으로 향했다. 서늘한 기온에 아무도 없는 광활한 대지를 볼 수 있다. 현지인의 추천 하리보 골든베어 Saft를 하나씩 먹다 보니 어느새 공원 끄트머리에 다다랐다.



 다음 일정은 대학 스포츠센터에서 하는 피구 수업에 참여하는 것이다. 옷을 갈아입으려 기숙사 문 앞에 섰는데 열쇠가 없다. 방 안에 두고 나온 것이다. 그냥 피구 수업에 가도 문제 될 건 없다. 그저 두터운 외투를 벗으면 김정수와 내가 같은 옷을 입고 있기에 오해의 소지가 있을 뿐이다. 그릇이 연속으로 깨지는 듯한 듣기 싫은 초인종을 누른다. 무수한 독일인들 사이에 혜성처럼 등장한 것까진 좋았으나 어느새 공을 든 자들의 표적이 되어버리고 마는 정수다.



 현지인이 사랑한 맛집, 다름슈타트 명물 랏츠켈러(Ratskellr)에서 저녁을 먹는다. 독일 음식인 학세(Haxe)와 슈니첼(Schnitzel), 그리고 흑맥주를 먹고 마신다. 그리고 현지인이 사랑한 술집 호빗(Hobbit)에서 달콤한 체리와인 한 잔이 들어간 맥주 1L, 시그니처 메뉴인 랜턴주(Laternchen)을 마셨다.





2019년 1월 16일


 사실 정수도 한국을 떠나 잠시 중국에서 지내고 있고, 그 와중에 시간을 내 독일에 온 것이다. 그는 한국을 떠나면서 과감한 헤어스타일 변신을 꿈꿨으나 변화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나의 도움을 받아 머리를 탈색해보기로 했다.


 시내에 나간 김에 극장 건물도 보고, 성당도 보고, 가장 중요한 탈색약도 사서 돌아왔다.  

 햇살이 잠시 앉았다간 듯한 부드러운 부분 탈색을 시도했다. 감고 나온 머리는 내 설계와는 영 달랐다. 드라이기로 말려도 나아지지 않는다.


2019년 1월 17일


 김정수의 일정은 내 맘대로다. 그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이 동네에서 2주 동안 지내게 할 수도, 더 넓은 세상을 보여줄 수도 있다. 다행히 그는 책임감 있고 양심 있는 사람에게 걸렸고, 나는 하이델베르크행을 계획해뒀다. 그는 출발 당일에도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잘 모르고 있다.



 일부러 데이터를 충전했지만 인터넷 연결이 안 된다. 지도에 의지하며 하이델베르크 대학교를 찾아갔다.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교인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휘몰아치는 바람을 이겨가며 우리가 찾아간 곳은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의 뉴캠퍼스였다.



 현실을 부정하며 길을 물어 여행객들에게 값싸고 맛있는 학식을 제공하기로 유명한 그 학생식당이라고 굳게 믿으며 들어갔다. 학생카드가 없으면 밥을 먹을 수 없다는 표시를 확인하고서야 인정할 수 있다. 바람은 거세졌지만, 가방 속 킨더 초콜릿과 음악이 있어 크게 좌절하지 않는다.



 다시 온 길을 돌아갈 것을 생각하니 눈앞이 깜깜하지만 한 걸음씩 떼어본다. 하이델베르크 성으로 가는 길을 물으니 꽤 멀다는 달갑지 않은 답변을 들었다. 성으로 올라가기 전 거리를 구경하고, 서브웨이 샌드위치로 배도 채우고, 드디어 성으로 오른다.



 하이델베르크 성에서 바라보는 마을 풍경은 질리지가 않는다. 성 곳곳을 돌아다니고 나니 해가 져버렸다. 추워서 미쳐 버릴 지경이지만 가방에 넣어둔 슈니발렌을 갉아먹으며 참아본다.


 성에서 내려오니 비가 내린다. 젖은 생쥐꼴을 하고 투어리스트 센터에 들어가 벽에 붙은 지도만 뚫어져라보고 있으니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길을 알려준다. 문을 열자 밖에는 재앙처럼 비가 쏟아지고 있다.


 덩그러니 서있는 버스 정류장 표시에 서서 온다는 보장도 없는 버스를 기다렸다. 다행히 무사히 기차역에 도착했다. 기차역은 춥고, 축축하고, 행패 부리는 사람, 그 사람을 제압하는 경찰들로 난장판이다. 자리를 떠나 플릭스버스를 타러 정류장에 도착했다. 플릭스버스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연착됐고, 마지막까지 완벽하게 험난한 귀갓길을 선사했다.


2019년 1월 18일


 자전거(call a bike)를 빌려 다름슈타트의 유일한 관광명소인 마틸다언덕(mathildenhöhe)과 결혼탑(Hochzeitsturm)을 보러 가기로 했다. 학생들은 30분 동안 무료로 자전거를 대여할 수 있어 그 안에 모든 일을 해결할 욕심에 열심히 페달을 밟았다. 정수를 내팽개치고 달렸지만 길을 헤맨 탓에 30분을 넘겨 민망하게 됐다.






 시내로 나가 또 탈색 약을 사 왔다. 전체 탈색을 감행하기로 한 것이다. 이 분야는 나의 전문이다. 정수는 외국인보다 더 외국인 같은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다. 하지만 오늘 이곳 한인학생회 신년회를 가기에는 부담스럽다는 의견을 적극 수용하여 살짝 톤을 낮추는 작업에 들어갔다. 해가 진다.



 경품 추첨을 위한 숫자를 받고 신년회가 열리는 학교 건물에 들어섰다. 각종 음식과 사람들로 정신이 없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경품 추첨이 시작됐다. 경품과는 인연이 없는 나는 박수 칠 준비나 하고 있었다. 3등은 스타벅스 상품권과 머그컵을 타갔다. 맙소사. 2등은 나였다. 호들갑을 멈출 수 없다. 마라톤 대회를 나가 유기농 사탕 한 봉지를 받았던 내 과거는 잊어라! 오늘 마라탕 쿠폰의 주인공은 나다. 내 귀를 의심할만한 상황이 펼쳐진다. 놀랍게도 1등은 정수였다. 연속된 숫자가 뽑힌 것이다. 신년회에 오는 길에 정수에게 입장료보다는 더 먹어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던 내가 부끄러워진다. 3D 영화 관람권과 팝콘/콜라 콤보 이용권을 손에 쥔 우리는 더 바랄 게 없다.


 배불리 먹고 마시고, 즐기던 사람들은 하나둘씩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고 파티도 끝이 났다. 나도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아직도 물욕을 버리지 못하는 내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남은 서브웨이 샌드위치들이다. 허가가 떨어졌고, 거대한 플라스틱 통을 들고 집으로 돌아간다. 이번 신년회의 최대 수혜자가 정수와 나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2019년 1월 19일


 오늘은 프랑크푸르트에 간다. 프랑크푸르트 암마인 공항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도시에 산다는 내 말을 듣고 싶은 대로 들은 정수는 프랑크푸르트 관광 정보들만 잔뜩 조사해왔었다. 그의 메모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나도 프랑크푸르트를 ‘관광’해본 적은 없지만 기대는 되지 않는다.

 


 날씨 좋은 프랑크푸르트를 거니는 것은 좋지만, 괴테 생가를 간다거나 카이저돔 첨탑으로 가는 332개의 계단을 오르는 일은 썩 유쾌하지 않다.

 

 점심은 신년회에서 남은 서브웨이 샌드위치를 길에서 먹었고, 관광을 마치고는 알트작센하우젠에 가 사과와인과 음악을 곁들인 수제치즈(Apfelwein und Handkase mit Musik)를 먹었다. 왜 유명한지 여전히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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