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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rry Mar 09. 2020

베를린: 문화의 도시

문화시민들

 나의 첫 베를린은 낭만과 예술의 도시였다. 독일에 온 이상 수도인 베를린에 가야겠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지만 꽤 멀리 떨어진 거리, 그리고 언제든 갈 수 있다는 생각에 자꾸 미루게 되는 것이었다. 다행히 이곳에서 만난 민정은 실천하는 지성인으로 베를린에 가자는 합의에 다다르자 무서운 속도로 일을 일사천리로 진행시켰다.


 베를린에서의 하루는 오전 7시 즈음에 기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오전 8시 즈음에는 호스텔 바로 옆에 위치한 리들에서 빵이나 과일을 아침으로 사들고 나선다.


 베를린에 도착한 날, 민정이는 나에게 혹시 클럽에 관심 있냐고 물었었다. 그를 만난 지 3개월 정도밖에 안된 터라 그의 속내를 파악해보려 했지만 실패하고, 큰 관심은 없다고 솔직하게 말한다. 그도 같은 마음이다.

 베를린에는 무수히 많은 박물관이 있다. 주요 박물관만 돌아본데도 3일은 결코 넉넉한 시간이 아니다. 평소 예술에 조예가 깊지 않은 나로서는 그 작품들의 가치를 다 이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나만의 시선으로 작품들을 이해하는 것 역시 의미 있다. 박물관 패스를 산 우리는 투자한 1센트까지 회수하기 위해 주요 박물관 외에도 베를린 전역에 퍼져있는 %? 스러운 박물관들까지 방문했다. 전화기가 잔뜩 전시되어있는 통신(communication museum), 초등학생들과 함께 레이저 태그를 즐길 뻔한 스파이 박물관이 그런 곳이다.


 하루 종일 누군가가 엄선해놓은 작품들에 둘러싸이는 건전한 즐거움에 허우적댄다. 저녁을 먹고 천천히 호스텔에 돌아와도 밤 10시라는 사실에, 씻는 걸 미룬 채 자진해서 인터넷이라는 그물에 걸려 허우적대는 행복을 누릴 시간이 넉넉하다는 사실에 미소 짓는다.


  베를린에서의 이튿날 밤도 전날과 다름없이 여유로운 저녁 시간이어야만 했다. 호스텔에 돌아와 전날 밤 코를 골던 아저씨의 부재를 확인하고 안도했다. 하지만 그것은 빨리 이 호스텔을 나가라는 경고탄이었다.

 10인실 호스텔에 7명 정도의 일행들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들은 어딘지 모를 언어를 주고받으며, 쉼표 없는 악보를 입으로 연주한다. 자정까지는 참아보자라는 생각으로 부들댄다. 문화권의 차이인지 자정을 넘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빵을 곁들인 수프를 후루루룩 대며, 그 와중에 말하는 것도 쉬지 않는다. 조금만 조용히 해달라는 말에도 정적이 1분을 넘기지 못한다.


 내일 아침 우리도 다른 투숙객들에 비해 빠르게 나갈 때 부스럭거릴 것이므로 이해했다. 내가 꿈을 꾼 걸까? 새벽 5시에 밝게 불을 킨 방에서 분주하게 준비하고 방을 나서는 일행들이다. 눈치 없이 클 수 있었던 그들의 환경이 너무나 궁금하다.


 당시 나는 독일에서 대중교통에서 표검사를 하지 않는 정책은 가난한 사람들의 이동성을 보장해 주기 위한 것이라는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마치 식당 직원이 남은 음식을 싸가는 것을 알면서도 무어라 하지 않는, 무임승차가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것을 알지만 눈감아주는 것이라고 말이다. 마음 편하게 지하철 표를 산 민정과 달리 빈 손으로 지하철에 오른 난 나른한 오후임에도 잠들 수 없었다. 열린 문으로 지하철에 오르는 사람들 중 검표원이 있는지 살피느라 바빴던 것이다. 현실은 내가 생각했던 최악의 시나리오에서 조금 더 최악이었다.


 출입문이 열리고 닫히고, 열차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노란 조끼를 입은 검표원이 왼쪽 끝에서부터 표를 검사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앉은 자리에서 튀어오르며 졸고 있는 민정을 흔들어 깨워 요란을 떨었고, 한국말을 못 해도 내가 표가 없다는 사실 쯤은 다들 눈치챌 수 있을 정도였다. 내가 예상 못한 건 오른쪽 끝에서도 검표원이 다가올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열차 가운데쯤에 앉은 나는 가만히 앉아 샌드위치 될 운명에 절망한다.


 검표원이 우리에게 거의 다다랐을 때, 열차는 다음 역에 정차하며 문이 열렸고, 그대로 뛰쳐나갔다. 차비 아끼려는 목적에 비해서는 너무나 큰 정신적 고통이었다.

 민정이에겐 미안하지만 원래 내리려던 정거장 한 정거장 전에서 내린 우리는 걷는다. 이때를 포함해 베를린에서는 1시간을 넘지 않는 거리는 아무렇지 않게 걸어 다녔는데, 이게 내가 베를린의 매력에 빠진 큰 계기였던 것 같다. 길을 걸을 때마다 매번 새로운 풍경을 만나게 된다. 이는 빠르게 걷기는 물론, 오래 걷기도 마다하지 않고 흔쾌히 함께 해 준 친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심지어 마지막으로 기차를 타러 가는 길도 여행 내내 본 적 없는 새로운 풍경이었다.


이곳이 대도시로구나! 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는 나의 운명을 직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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